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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상림에 대한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070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땅꾼95
추천 : 5
조회수 : 156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5/12 14:05:53
     상림(上林)은 함양의 대표적인 관광지중 하나이자 우리에겐 최치원이 조성한 방조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상림은 현재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죠.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상림공원은 사람의 힘으로 조성한 숲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숲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적 자료로서 가치도 매우 크므로 천연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하여 보고하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문화재청 뿐만 아니라 함양군, 상림의 안내판에서 모두 동일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상림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림이란 내용과 최치원이 처음으로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 어느 설명문조차 최치원이 상림을 최초로 조성하였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 최치원이 제방과 상림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으며 최치원 신도비(文昌侯崔先生神道碑)에 기록되어 있는 建學士樓手植林木於長提의 해석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런 이미 그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온 이야기가 최치원신도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림에 제방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은 조선시대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직(1471~1475)중에 남긴 詩에서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石楗爲之摧 黃流若陣焉 崩騰復喧豗 㵢溪一綫爾 江海何雄哉 偃蹇百年樹 其根蟠九陔 顚倒隨漂砂 何異樸樕材”(佔畢齋集卷之七, , 六月 大雨十日 百川漲溢 雨若不止 水將及城 出廵㵢溪岸 悶甚 有作) - 돌로 쌓은 방죽도 터지고, 높고 거대한 수목들은 모래와 함께 뒤엉켜 떠내려가는 형국이 마치 잔챙이 덤불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최치원에 의해 제방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방이 최치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오랜시간을 보냈으며, 당시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수리시설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상림의 홍수조절 원리는 중국 쓰촨성에 있는  (도강언)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을 막는 것이 아니라 물살을 분리해서 피해를 줄이는 것이지요. 이부분은 이야기 하자면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러한 도강언을 최치원도 봤을 수 있고, 그 기술을 귀국후에 실제 사용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상림을 최치원이 조성했는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저는 우리가 흔히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는 것들 중에는 인위적 간섭과 기억의 조작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이야기 하고 싶어서 입니다. 상림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 설화들이 몇가지 전해져 오죠.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최치원이 주무을 외워 독충과 뱀을 상림에서 몰아낸 이야기 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일본 佐賀縣 唐津市松原에서도 확인됩니다. 松原唐津灣 해안에 넓게 펼쳐진 소나무 숲입니다. 일본 3대 소나무 숲 중 하나로 특별 명승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 소나무 숲은 17세기 唐津의 번주인 寺沢広高가 황무지 개간의 일환으로 방풍림과 방사림을 조성한 것이 시작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숲에는 몇 가지 불가사의한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그 중 주목되는 것은 豊臣秀吉과 관련된 일화와 諏訪신사에 모셔진 諏訪公主의 소원으로 독사가 숲에 살고 있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http://www.karatsu-kankou.jp/karatsunmon003.html#7)

 17세기부터 조성되었다고 하는 숲에 그 이전 시대 사람인 豊臣秀吉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는 것은 이 숲은 그 이전부터 있었고, 17세기부터 철저히 관리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겨질 수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상림을 최치원이 조성한 인공림이 아닌 이전부터 있었던 자연림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김종원외, 2011, 한국 유적림(遺跡林)의 생성 기원에 대한 생태사회학적 고찰 : 안동 만송정, 성주 성밖숲, 의성 가로숨, 함양 상림, 경주 계림을 사례로, 5회 계명대학교 한국학 국제학술대회,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松原에는 스와 신사에 모셔져있는 스와 공주의 소원하여 옛날부터 독사는 않은 것 숲에 뱀이 살지 않는다는 것과 최치원이 주문을 외워 숲에서 뱀과 해충을 모두 쫒았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먼저 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두 이야기 닮아있고, 한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상림과 최치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최치원 신도비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이 비는 1923년에 세워집니다. 바로 일제 강점기이죠. 따라서 그 당시의 상황이 이 신도비를 세우는데 반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松原에 등장하는 뱀, 해충 이야기와 유사하다는 점은 최치원 신도비가 조성되는 시기의 사회적 상황을 일정 반영하고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내선일체론)을 목적으로 한국사에서 왕인이라는 인물을 발굴하고 현실세계로 끌어온 것이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과 유사합니다. 

쓰고 보니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네요. 우리나라 전역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다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일부는 분명 후대사람들에 의한 조작이 있었다는 것이 하고자 하는 주된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그 조작에는 조작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을 것 입니다. 역사해석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흔히 진실이라고 이야기 하는 역사적 사실이 정말 그러한지 의심해 봐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정확히 알려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올바른 역사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가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과거의 사실이 재해석되어 소환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겠지요.

첨부하는 사진은 최치원신도비의 일부와 상림내 제방의 흔적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신도비에는 비를 세우는데 중추적인 역활을 한 사람들의 이름이 쪼아져 알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진실을 숨기려고 했던 흔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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