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운이 좋게도 CF에 섭외가 되었다.
여대생컨셉으로 여성용품을 광고하는 거였는데, 양쪽으로 땋아내린 머리와 보조개가 이미지와 잘 맞는다며 단박에 캐스팅되어 동기들과 선배들의 부러움을 샀었다.
CF가 방송을 타며 주변에서 축하전화를 엄청 받았다. 이미 스타가 된 듯 했다.
그 후 시트콤에서 주인공 친구로 섭외를 받았다.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시트콤이었기에 학교에서 나의 콧대는 꺾일 줄을 몰랐다.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자격지심도 자신감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대사가 급하게 줄었다. 뭔가 불길했다.
“야! 발음이 그게 뭐야! 혀 잘렸냐!”
입시연기학원 선생님께도 지적받던 발음이 문제였다.
그렇게 단 네 번의 출연으로 방송국과는 이별을 하였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안 되는 발음을 어쩌란 말인가.
발음이 좋았다면 아나운서를 했겠지.
대학로에서의 작은 연극 몇 편을 끝으로 대학생활이 끝나가고 있었다.
“선배니임~~이번에 딸 역할 저 주세요.”
연출부 선배의 팔짱을 끼며 자연스레 몸을 밀착했다.
이 선배가 날 몰래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게...벌써 역할이 정해져 있어서...”
“선배님이 다시 결정하시면 되잖아요. 네? 저 정말 잘할 자신 있어요. 저 아시잖아요~오. 어떻게 저녁 먹으며 한 잔 할까요?”
“아이 곤란한데...그래도 시연이가 술 마시자는데 맘 변하기 전에 얼른 가야지.”
덥수룩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선배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제 그 역할은 내 것이 된 거다.
“응, 방학동안 기숙사달린 공장에서 알바 한다니까. 심심해 죽겠다. 시연이 데리고 함 놀러와.”
“그래? 그럼 시연이랑 시간 상의해 볼게. 거긴 언제까지 있는 건데?”
“방학 내내 있어야지. 한 푼이라도 벌어야 다음 학기 버티지.”
오랜만에 주아에게 연락이 왔다.
방학동안 일하는 공장에서 주말엔 할 일없어 심심하다고 한번 놀러오라고 한다.
그래도 친구라고 가장 먼저 생각이 나는가 보다.
단짝이니까. 우린 둘도 없는 단짝이니까 말이다.
“나 이번 주말엔 약속 있는데~ PD님이랑 골프미팅이 있어서 말이야. 어쩌나~ 근데 몇 달만에 우리를 찾고 어쩐 일이래?”
역시 유명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르바이트 구하느라 발품 파는 우리 평범한 대학생들과는 급이 다른 것이다.
“친구니까 제일 먼저 생각나서 그랬겠지. 그럼 언제 가능해? 쭈 많이 심심한 거 같던데...그리고 방학 내내 일만 한다고 하니까 가서 좀 재밌게 해주고 오자. 응?”
“그럼 다음 주말에 가자. 그땐 시간 비워둘게.”
약속에도 불구하고 당일 아침에 전화가 걸려왔다.
“강아, 나 오늘도 못가겠다. 다음 주 예정이던 연극 리허설이 오늘로 변경됐어. 미안하지만 혼자 다녀오든지 다음으로 미루든지 해야겠어.”
안될 말이었다. 주아가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기다리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미룰 수는 없었다.
“그럼 이번엔 그냥 나 혼자 다녀올게. 다음에 한번 또 가지 뭐.”
“그럴래? 대신 안부 좀 전해주고.”
그렇게 혼자 고속버스를 탔다.
하룻밤 자고 오는 거라 짐이 많지 않아 백팩 하나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었다.
휴대폰시간을 체크하고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연결한 뒤 최신곡을 플레이한 후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소음에 눈을 뜨니 버스가 톨게이트로 진입하며 도로가 우는 소리였다.
기사아저씨의 도착 안내를 들으며 가방을 챙겨들고 아저씨와 인사를 나눈 뒤 대합실로 나와 주위를 살폈다.
출입구 쪽에서 하얀 얼굴의 주아가 반달눈을 하고 손을 힘차게 흔들고 있었다.
“꺅~! 주아야~ 얼마만이야. 기지배 연락도 뜸하고 얼마나 궁금했는지 알아?”
“유강아, 잘 지냈어? 얼굴 이뻐진거 봐. 연애한다더니 남친이 잘해주나 봐.”
“잘 해주기야 하지. 그보다 우리 얘기하자. 넌 어떻게 지냈어? 괜히 부담될까봐 연락도 못하고.... 그래도 네 생각 많이 했어.”
오랜만에 만났어도 어제 본 사이처럼 얘기는 끝이 없었다.
“여기서 택시타면 금방이야. 가서 점심먹자.”
웃고 있는 주아의 얼굴이 밝지가 않다. 웃고 있는데...분명 웃고 있는데....슬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