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마룬캬(Malunkya)라는 제자를 상대로 다음과 같
이 설한 적도 있다.
"그러므로 마룬캬여, 내가 설하지 않은 일은 설하지 않은 채로 수
지(受持 ;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지니는 것. 즉 받드는 것.)함이
좋고, 또 내가 설한 일은 설한 대로 수지함이 좋으니라.
그러면 마룬캬여, 내가 설한 것이란 무엇이던가? '이는 고(苦)이
다.'라고 나는 설했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이
는 고의 멸진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또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마룬캬여, 왜 나는 그것들을 설했던가?
마룬캬여, 그것들은 정말 도움이 되며, 범행(梵行 ; 청정한 행위.
욕망을 끊는 것.)의 기초가 되며, 적정 , 증지 , 등각 , 열반에 이바
지 하느니라. 그러기에 설했음을 알라."
마룬캬라고 불리는 이 제자는 오늘날의 말로 하면 철학 청년이라고나
할까? 이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가
못하는가, 또는 영혼과 육체는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은가, 당시에 유행
하던 이런 문제를 논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붓다는 전혀 그
런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그것을 불만스
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 젊은이가 어느 날 붓다를 찾아와서 그 불만을
털어 놓았을 때, 그에게 '화살의 비유'를 들어 친절하게 설명한 다음,
마지막에 가서 힘을 주어 한 말씀이 이것이었다. 거기에서 붓다는 "내
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채 수지하라." 또 "내가 설한것은 설
한대로 수지하라."고 하여 매우 힘 있게 끊어서 말하고 있거니와, 그러
면 대체 붓다가 설한 것은 어떤 내용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성제'였다고 붓다 자신이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성제'는 붓다의 가르침의 중심 골격을 이루는 것
이었다. 이 사실은 저 다섯 비구를 상대로 설해진 이후, 그 생애를 통
해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내용이었던가? 지금은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중심 문제요, 그 사상을 설명하는 것은 주제가 아
니나, 먼저 얼마라도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최초의 설법소식
은 완전히 그 안목(眼目)을 잃고 말는지 모른다.
'네 가지 성제'(cattari ariyasaccani)는 흔히 줄여서 '사성제' 또는
'사제'라고 일컬어진다. '제'는 sacca(Pali) 혹은 satua(Skt.)의 역어
로 '진리'를 뜻하는 말이거니와, 그것은 아울러 '엄숙한 단언'을 뜻하
기도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오히려 '엄숙하게 진리를 말씀한 단언적
명제'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그 뜻에 더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붓다
는 아마도 그 생애를 통해 이것을 숱하게 되풀이해서 설했으려니와, 이
제 여러 경에 나타난 바를 검토할 때, 가장 간명한 형식은 앞서 인용한
마룬캬에게 설명해 주던 그 양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고(苦)이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
"이는 고의 멸진(滅盡)이다."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아함경 이야기>, 마쓰야 후미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