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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포수들 <BGM>
게시물ID : history_100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8
조회수 : 283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6/13 12:59:09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uVV6q
 
1917년, 일제는 인명보호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원정 온 포수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호랑이와 표범 사냥을 했습니다....  

모두 8팀으로 나눠 전국에서 포획을 시작했는데, 산세가 깊은 함경도에는 3팀을 투입하였고, '전설의 포수'로 불리던 강용근과 이윤회 포수도 함경도에 투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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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팀에서 포획한 호랑이.  왼쪽이 최순원 포수, 오른쪽이 당시 사냥 총책임자 야마모토

인터넷 사이언스 타임즈 --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에서

1917년 11월 12일 부산항에 야마모토 타자부로라는 일본 고베의 사업가가 도착했다. 이틀 뒤 매일신보에는 “정호군의 총대장 야마모토 씨 입경”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정호군(征虎軍)이란 바로 호랑이를 잡기 위한 군대를 일컫는 용어였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정호군은 11월 15일 남대문에서 출발하여 본격적인 사냥 여정에 올라 그해 12월 5일 조선호텔에서 해산식을 거행할 때까지 조선 팔도를 누비며 호랑이 2마리를 비롯해 표범과 곰ㆍ멧돼지ㆍ노루 등의 대형 포유류를 무차별적으로 포획했다.

이 정호군에는 최순원ㆍ강용근ㆍ이윤회 등을 비롯해 당시 이름 꽤나 날리던 조선의 사냥꾼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몰이꾼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호랑이 같은 날쌘 동물을 잡기 위해서는 조선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 야마모토라는 일본인은 왜 조선인을 고용하고 거금의 돈을 들여가며 조선의 호랑이와 맹수들을 잡아들인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300여 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로 진격하여 조선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맹활약을 펼친 일본의 전설적인 무장 가토 기요마사는 호랑이 사냥꾼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그가 임진왜란 기간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진상한 조선의 호랑이만 해도 모두 5마리에 달할 정도다.

그는 추위와 오랜 타지 생활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때마다 호랑이 사냥을 하여 기세를 다시 떨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일본은 섬이라는 지형적 특수성으로 인해 호랑이 같은 대륙성 동물은 살지 않으므로, 호랑이를 잡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야마모토가 노린 것은 바로 가토 기요마사처럼 되기 위해서였다. 1917년이면 제1차세계대전이 장기화되면서 정치ㆍ사회적으로 불안하던 시기였다. 그 같은 암울한 시대 상황에서 일본은 젊은이들의 사기를 높이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기발한 아이디어로 등장한 것이 야마모토의 정호군이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부터 해로운 짐승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펼쳤다. 또한 식민지 조선의 호랑이는 서양 사냥꾼들의 좋은 표적이 되기도 해,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호랑이 원정대들이 조선을 휘젓고 다녔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등의 자료를 취합해 보면 일제강점기 동안 잡혀서 죽임을 당한 호랑이의 수는 141마리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을 취합한 통계일 뿐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호랑이들이 포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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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의 모습

널리 알려진 남한에서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2년 10월 2일 경상북도 경주 대덕산에서 포획된 수컷 호랑이다. 구정주재소의 미야케 요조 순사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사냥한 이 호랑이는 당시 경주를 방문했던 일본 황족에게 헌상되었다.

그 후 1924년 2월 1일자 매일신보에 “1월 21일 강원도 횡성 산중에서 팔척짜리 암컷 호랑이가 송선정이라는 자에 의해 포획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 모습이다.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28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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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호랑이의 모습

널리 알려진 남한에서의 마지막 호랑이는 1922년 10월 2일 경상북도 경주 대덕산에서 포획된 수컷 호랑이다. 구정주재소의 미야케 요조 순사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사냥한 이 호랑이는 당시 경주를 방문했던 일본 황족에게 헌상되었다.

그 후 1924년 2월 1일자 매일신보에 “1월 21일 강원도 횡성 산중에서 팔척짜리 암컷 호랑이가 송선정이라는 자에 의해 포획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그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 모습이다.

http://www.sciencetimes.co.kr/article.do?todo=view&atidx=0000028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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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가 구한말 '왕실 포수'였던 강용근 포수, 오른쪽이 이윤회 포수

<영남일보> 조선의 명포수들 (1)

다섯명의 조선포수들이 백두산 동쪽 두만강을 건너 만주땅 장바이산(長白山) 기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에 들어와 통감부를 설치하고 있던 1914년 5월이었다.

강용근(姜容根)·이윤회(李潤會)등 모두가 한국왕실 직속인 어용엽사들이었다. 어용엽사는 왕실에 녹용·웅담 등 한약재를 제공하고 외국 귀빈의 사냥안내를 해주는 포수들이나 나라가 망했으니 할 일이 없어졌다.

그들도 이곳이 위험한 사냥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는 그 일대의 '미룩'이 몰려들고 그들을 노리는 범과 표범도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들은 조선의 명포수들이며 좋은 총을 갖고 있었다. 사냥 안내를 했던 외국 귀빈들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미국제·영국제 등이며 비록 유연총이나 100m 거리에서도 미룩을 쓰러뜨릴 수 있는 실탄총이었다. 미룩을 쫓아다닌다는 범이나 표범도 두렵지 않았으며, 그 맹수들도 사냥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들은 범을 잡은 경력이 있는 포수들이었다.

그곳에 들어간 다음날, 일행은 미룩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미룩은 마록(馬鹿)이라는 별칭처럼 말만큼이나 큰 사슴이며, 이맘때는 대가리에 달려있던 묵은 뿔이 떨어지고 새뿔이 솟아오를 때였다. 그 새뿔이 녹용이었다.
잔 털에 덮인 연골뿔인데, 산삼·웅담과 함께 영약으로 알려져 있다.

"조심해 모두 몸을 숙이고 발자국소리를 죽여. 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놓고…."

앞머리에 가고 있던 강 포수가 나직히 말했다.

미룩 발자국을 추적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표범의 발자국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표범은 두려운 경쟁자가 되지 못했다. 감히 다섯명이나 되는 포수에게 덤벼들지 못할 것이었다.

미룩과의 거리가 500m쯤 되자 포수들은 흩어졌다. 이윤회 포수 등이 사슴의 도주로를 막았다. 사슴은 매우 조심스러운 짐승이므로 포수들은 은밀하게 소리없이 움직여 사슴을 속였다. 사슴이 추적자들을 발견하고 후다닥 도망갔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숲속에 엎드리고 있던 이 포수가 발포했고 사슴이 쓰러졌다. 가슴팍 급소를 맞은 사슴이 즉사를 했다.

포수들은 사슴의 피를 마신 다음 야영을 했다. 불이 활활 타오르자 포수 한사람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경비를 하기로 했다. 발자국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포수인데 그는 이상이 없으면 곧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 2시간이 지나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http://www.yeongnam.co.kr/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80331.0102408400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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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포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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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포수팀
조선왕조 어용엽사들과 구전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100관(40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만주범과 80관(320킬로그램)에 못 미쳤다는 조선범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범들은 만주에서 강원도까지 불과 사나흘만에 내려오는 행동반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두 종류 모두 한반도에 공존했던 것은 확실한데, 기록에 따르면 만주범들은 체구가 한 둘레 크고, 털이 길고 뻣뻣하며 무늬가 옅은 반면, 조선범들은 체구가 좀 작고, 털은 짧고 부드러우며 무늬가 짙고 뚜렷한 데다 배가 눈부시게 희어 몹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범들이 훨씬 영악하고 잔인하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래도 사람과 생활범위가 겹쳐 있던 한반도의 범들의 특성일 겁니다.

구한말 마지막 어용엽사 중 한 분이었던 이윤회, 강용근 포수의 진술에 따르면 조선범들은 만주범보다 다리가 짧아 바위를 잘 탔으며, 훨씬 민첩했다고 합니다.

--  '한국 호랑이는 어디에 있을까?' 에서 인용
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1&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1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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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러시아의 유명한 사냥꾼이 느낀 우리나라 포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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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호랑이들은 시베리아의 대호와
 
크기도 거의 비슷하고 습성도 같다. 그러나 따뜻한 날씨탓인지 털은 더 짧다.
 
작고 좁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산에도 호랑이가 살고있을 정도로 호랑이가 많다.
 
 
 
그러므로 자연히 호랑이 포수가 많은데 , 이 나라의 사냥꾼들은 놀랍게도
 
관통력과 유효 사정거리가 60야드-대략 55m-에 불과하며 당장 박물관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믿어질법한 16세기  구식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사냥한다.
 
 
 
나는 조선의 숙련된 호랑이 포수들이 호랑이가 20야드-약 18m- 가까이 와도 미동도 하지않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자연히 이들의 화승총 숙련도는 내가 아는 유럽의 어느 총기전문가보다도 뛰어난데,
 
만약 이들에게 최신식 후1장식 라이플을 쥐어준다면
 
어느 누구라도 조선의 포수들을 능가할수는 없을것이다.
 
 
 
 
 
- 러시아의 위대한 호랑이 사냥꾼 , 조지 양코프스키 -



원글 출처 : 그림과 글이 있는 블로그 http://m.blog.ohmynews.com/arts/241169
추가 출처 펨코 미스터리/공포게시판
작성자 : Ormazd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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