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냄새. 먼저 정신이 든 것은 눈보다 후각이었다. 어릴 적 낡은 부엌 구석에 썩은 판자에서 풍기던 냄새. 그것은 냉기와 함께 콧구멍으로 들어왔다. 거부감은 입술과 콧등을 꿈틀거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추위는 피부를 파고들었고, 쑤시는 근육을 괴롭혔다. 신경을 긴장시키는 추위 덕분에 정신이 조금 드는 듯 했지만, 정신이 들수록 혼란은 가중되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눈을 떴을 때는 녹슨 쇠벽이 보였고, 고개를 살짝 들어 앞 쪽을 봤을 때는 길고 어두운 복도가 보였다. 지하 어딘가 숨어 있어야 어울릴만한 오싹한 느낌이 드는 복도. 바닥과 천정과 벽은 온통 녹슨 철로 만들어져 있는 듯 했다.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관절이 쑤셨고, 움직일 때 녹슨 도르래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왼쪽 발꿈치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이 부분은 농구하다 다친 곳인데. 몽롱함이 기억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발 부분의 통증은 호수 공원에서 농구하던 때를 생각나게 했다. 올 코트로 시합을 했었는데, 나는 가드로 공 배급을 맡았다. 날씨가 추워져 손가락이 얼었고, 패스나 드리블 미스도 많이 나왔다. 30점내기 시합에서 두 점 정도 남았을 때, 후배가 나에게 긴 패스를 던졌다. 수비 한명이 따라 붙었지만, 보통 나는 속공 찬스를 쉽게 놓치지 않는다. 까만색과 은색이 섞인 나이키 농구공을 길게 드리블하며 상대편 골대로 달려갔다. 패스 하는 척 페인트를 쓴 다음 점프를 뛰었다. 그때, 어린 아이 한명이 코트 안으로 들어왔고, 아이를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어 비스듬한 자세로 착지를 했다. 내가 신은 농구화는 쿠션이 좋기로 유명했지만, 뒤꿈치를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나는 통증에 주저 앉아버렸고, 시합이 끝날 때까지 벤치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의 냉기가 뒤꿈치로 올라오는 것 같아 무릎을 약간 기울여 왼쪽 발끝을 세운다. 균형이 불안정해 한 손으로 벽을 기댄다. 철로 된 벽을 조이는 육각 머리 못이 손끝에 만져졌다. 복도의 천장에 전등이 드문드문 붙어 있다. 전등은 천장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그 곳에서 나오는 불빛은 제한된 부분만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복도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앞과 똑같은 광경. 문득, 기다란 관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시체들이 관속에서 틀림없이 맡아야 할 축축한 냄새. 손을 들어 소매로 코끝을 비빈다. 그리고 내 옷이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고개를 숙여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본다. 온통 회색. 신발까지도 회색이었다. 이런 색깔을 오랫동안 입고 있다면, 피부까지 회색으로 물들어 버릴 것이다. 누가 이런 옷을 입혔지? 이상하게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두려움이 스믈스믈 뒤꿈치를 기어 올라와 어깨에 앉았다. “거기 누구 없어요?” 목소리는 긴 복도를 얼마 못 가 철판에 흡수 되어 버리는 듯 했다. 대답은 없었다. 장딴지 근육에 힘을 주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를 구해주러 올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방이 아니라 복도에 있기 때문이다. 방에 있는 것과 복도에 있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방이란 것은 소속이 분명한 것으로, 누군가 찾아 올 수 있고, 그런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복도는 소속이 불분명하며,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그 대신 자신이 누군가를 찾아 다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있는 복도에 선택권이 많지 않다. 앞으로, 혹은 뒤로. 만약에 더 많은 길이 있었다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깨어났을 때, 머리쪽이 향하던 길을 택했다. 발꿈치의 통증 때문에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등의 빛을 벗어난 부분의 바닥엔 검은 고양이 한 마리라도 웅크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실루엣처럼 동물의 형상이 몇 번 보였으나 눈의 착각이었다. 성당의 지하. 문득 머리 속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성당의 바깥을 장식한 장미창, 안으로 들어와 보면 스테인드글라스가 밝게 빛나고 있다. 부채꼴 돔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시선을 내리면,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빛을 반사하고 있다. 그 아래.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성당 지하가 나오고, 그곳은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곳처럼 깨끗하지는 않다. 무덤. 유명한 건축가들의 무덤은 종종 성당 지하에 마련되었다. 그 중 몇몇은 신도들의 발길에 닳아 이름조차 읽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벽에 손바닥을 붙이고 예리한 감각을 손가락 끝에 집중 시키며 걸어간다. 비밀문은 보통 신도들은 상상도 못할 장소에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업용 도면은 ‘트레이싱 하우스(설계 사무실)’에서 보존이 되지 않는 재료 위에 그려졌고, 이 도면들은 작업실이 해체되면서 동시에 사라졌다. 건축가의 재치는 비밀처럼 지하보다도 더 지하로 내려간 곳에 숨어 있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 성당의 지하가 아닐까라는 생각한 이유는 우선 지하라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지하는 보통 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불빛이 비추지 않는 곳은 칠흑처럼 어둡다. 그리고 이런 한기는 지상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래된 성당 따위는 내가 사는 곳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빌딩 지하? 요즘 짓는 건물에는 이런 장난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머리 속에 질문이 많아질수록 혼란이 가중되었다. 우선 걷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많은 질문 중에 깨달은 것 한 가지는, 그 어떤 것도 만족할 만한 해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잠시 멈춰, 허리를 펴고 천장을 보았다. 내 머리에서 한 뼘 정도 위. 키 큰 사람이면 머리를 숙이고 걸어야 할 정도로 낮다. 천장을 손으로 만지자 벽에서 느껴졌던 냉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복도의 공기는 갇혀서 썩고 있는 듯 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복도지만, 어딘가 올라가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길은 길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원칙이니까. “거기 누구 없나요?” 다시 한번 소리친다. 전처럼 좁은 복도의 무거운 공기에 가로막혀 멀리 가지 못한다. 발자국 소리도 바닥의 냉기에 녹아버리는 것 같다. 이렇게 긴 복도를 만들려면 역시 지하 아니면 불가능 할 것이다. 이곳이 지하에 있다는 생각에 확신이 붙었다. 이곳은......... 발걸음을 멈추어 소리를 완전히 제거한다. 앞쪽에서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숨소리조차 가늘게 바꾸어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한다. 탕. 탕. 작은 울림이 복도의 벽을 타고 들려왔다. 분명히 앞쪽에 누군가 있다. 발뒤꿈치의 통증도 잊은 채 소리가 들리는 앞쪽으로 달렸다.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내가 멈춘 곳은 어떤 문이 있는 곳이었다. 복도의 한쪽 벽에 감옥의 독방처럼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철문 가운데 얼굴 크기만 한 창이 철판으로 막혀 있다. 소리는 그 속에서 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이 방 안에 갇힌 것인가? 하지만, 철문에는 손잡이도 없었고, 열쇠 구멍도 없었다. 문 모양만 하고 있을 뿐 문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문에 기댔다. 순간 조그만 창을 가로막던 철판이 위로 열렸다. 젊은 여자 얼굴이 갑자기 창으로 나타나자 나는 놀라 뒤로 넘어졌다. 여자는 넘어진 나를 보다가 울기 시작한다. “아. 다행이다. 살려주세요.” 여자는 울면서도 내게 애걸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많이 울었는지 눈이 뻘겋게 부어 있었다. 여자 때문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일어서려는데 뒤꿈치에 다시 통증이 일었다. “살려주세요.” 여자의 울음사이에 간간이 살려달란 말이 섞여 있다. “그 방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습니까?” “내?” “거기 어떻게 들어가게 됐냐고요?” 내 질문에 여자는 훌쩍거리던 울음을 멈춘다. “모르겠어요. 깨어나 보니 여기에 있었어요. 나 좀 꺼내주세요.” 여자가 내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동료가 한 명 있으면 마음이 놓일 것이다. “그럼, 거기 얼마나 있었던 거예요?” “모르겠어요. 깨어난 지는 삼십분 정도 되었을 거예요.” “혼자에요?” “예.” 여자에게 질문을 하는 도중 철문의 틈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다. 원래부터 닫혀 있어야만 하는 문인 듯, 벽에 꼭 붙어 있었다. 손잡이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힘을 주어 앞으로 한번 밀어보고, 옆으로도 밀어보았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여자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안 열려요?” 얼굴이 다 보이지 않는 작은 창으로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문 틈새에 시선을 고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울기 시작했다. “거기 다른 사람은 없어요? 어떻게든 저 좀 꺼내줘요.” 다시 힘을 주어 문을 밀어보지만, 변하는 것은 내 심장박동 뿐이었다. “그쪽에는 손잡이 없나요?” “아무것도 없어요.” “문 밀어 봤어요?” “예. 안 열려요.” 숨이 차고, 발꿈치가 아파 벽 쪽에 기대어 앉았다. 여자는 그런 내 모습을 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 바라본다. 눈에는 절망이 서려 있다.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듯한 표정이었다. 무엇이든 여자에게 말을 시켜 안정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들어오기 전 마지막 기억 있어요?” “전 사무실에서 퇴근 했어요. 동료들이랑 술을 먹으러 갔었는데, 1차 끝나고 나서는 기억이 없어요. 그리고 눈 떠보니 여기 있었어요. 전 잘못한 것도 없고, 누구에게 원한 산 것도 없는데.” 원한. 여자가 그 말을 꺼내자 나도 원한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2년 전, 혼자서 사진 찍으러 교외로 나가던 중 사람을 친 일이 있었지만, 보상금도 넉넉히 주었고 문제없이 해결되었다. 내 차에 친 사람도 처음에는 디스크 압박으로 신경이 마비되었지만, 곧바로 수술하여 완전히 회복되었다. 다른 원한 같은 것은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성당 다녀요?” “내?”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아니요. 저는 불교신자에요. 그렇다고 자주 절에 나가는 것은 아니고요. 그게 문제가 있나요?” 여자의 목소리와 눈동자에 불안감이 흔들린다. “아니에요. 그냥 해본 소리에요. 그런데, 그쪽도 회색 옷을 입고 있나요, 저처럼?” “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우릴 여기다 대려다 놓았을까?” “모르겠어요.” 여자와의 대화는 나 혼자 질문을 던질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해답을 주지 못했다. 연결고리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을 듯 했다. “잠깐.” 전구 불빛이 닿지 않는 문의 위쪽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얼핏 표식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뭐가 있나요? 문 열 수 있어요?” “좀 살펴보고요.” 문 위쪽으로 다가가 표식 같은 것을 살펴보았다. 엄지와 검지를 모았을 때 생기는 구멍만한 동그란 철안에 녹색의 공이 조그맣게 들어가 있다. 그 외에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녹색의 공을 눌러본다. 하지만, 눌러지지도 않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 내가 문에서 멀어지자 여자가 다시 묻는다. “뭐가 있어요?” “문 위에 어떤 표식 같은 것이 있는데요. 녹색으로. 하지만, 별 의미는 없는 것 같아요. 아무런 변화도 없고.” “아. 그래요.” 여자의 목소리에 힘이 없다. 내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이가 몇이에요?” “스물둘이요.” “회사 다녀요?” “예.” 무의미한 대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본다. 우선 이문에 대해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여자를 방에서 꺼내줄 수 있는 방법은 찾기 힘들 것 같고, 기껏해야 대화 상대나 해주면서 불안감을 감소시키는 것 외에는........ “저기요. 아저씨. 여기 문에 달린 창에 있던 쇠판은 어떻게 열었어요?” “내가 안 열었는데요. 이쪽에는 아무런 장치도 달려 있지 않아요. 그쪽에서 연 건 줄 알았는데.........” “제가 연 건도 아닌데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시 머리 속에 혼란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복도에 있고, 여자는 방 안에 갇혀 있다. 그리고 복도에는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다시 말해 통제가 되지 않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하지만, 지금 저 문에 달린 조그만 창은 스스로 열렸다. 내가 문에 손을 대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열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곳은 뭔가의 통제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란 뜻이 된다. 어두운 불빛은 여자의 초췌한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췄다. 간헐적인 숨소리가 그녀의 심리상태를 잘 나타내주고 있었다.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제가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나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나는 오른 발에 힘을 준 채 가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여자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가지 마요! 나 혼자 두고 가지 말아요!” 비명은 곧 울음으로 바뀌었다. “무섭단 말이에요!” 나는 두발자국 정도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창으로 보이는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녀는 내가 가버릴까봐 눈물이 흘러내려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알았어요. 하지만, 조금 있다가 가봐야 해요. 여기 무작정 있을 수는 없잖아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잖아요.” 여자는 내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는지 그제야 흘러내린 눈물을 닦는다.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그 때 들렸다. 새벽을 타고 울리는 소리는 짐승의 깊은 내장에서 나는 것처럼 낮고 굵었다. 여자와 나는 눈을 마주치며, 서로의 표정에서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하지만, 뭔가 두려운 것이 다가온다는 것 말고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시 울림이 들렸다. 그 소리는 여자 귀밑을 지나 작은 창으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쪽에서 나는 소리인가요?” 여자의 목소리가 기타의 가장 가는 줄처럼 떨린다. “아닌 것 같은데요. 그 안에서 나는 것 같은데.”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으로 보이는 것은 여자의 뒷머리뿐이다. 나도 천천히 물러서 벽 쪽에 붙었다. 문 위쪽에 있던 녹색이 어느새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붉은색은 언제나 불길한 느낌은 던져주었다. 불안감과 함께 오는 안도감. 내가 방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고, 그 감정 뒤에 죄책감이 따랐다. 하지만, 소리가 점점 커짐에 따라 불안감이 나머지 모든 감정을 억누를 만큼 커졌다. 그 무언가가 문을 열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자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에 대한 책임을 져버릴 수 있었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여자는 다시 작은 창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예요? 이 소리 뭐예요? 나 좀 살려줘요.” 나는 다시 문을 살펴보는 시늉을 했다. 여자의 불안한 입김이 느껴졌다. 호흡도 가빠져서 곧 숨을 멈출 것 같았다. 크르릉. 그 소리에 놀라 문에서 살짝 물러섰다. 여자의 몸이 한번 바르르 떨리더니 뒤를 한번 돌아보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살려줘요! 문 좀 빨리 열어줘요!” 누구에게 외치는 것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를 향해 말하는 건지, 그녀를 위협하려 다가가는 무언가를 향한 건지...... “뭐, 보여요?" “모르겠어요. 문 빨리 열어줘요!” 여자는 조그만 창에 대고 소리 질렀다. 조그만 창이라기보다는 문에 뚫린 사각의 구멍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 깊이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문을 발로 차보려 하다가 그 정도 두께의 철문이라면 꿈쩍도 할 것 같지 않아 그만둔다. 생매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생매장을 해놓고, 그녀를 가둔 구덩이를 작은 구멍을 통해 보는 느낌. 소리 질러도 내가 할 수 있는 없다. 그저 죽는 것을 바라보는 수밖에. 삶보다는 죽음에 훨씬 가까운 곳에 여자가 서 있는 것 같다. 그냥, 이상한 소리의 정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다. “거기 정말 손잡이 없어요? 정말 없어요?” 구멍으로 여자의 얼굴이 사라지더니, 가늘고 하얀 팔이 나왔다. 여자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가 있는 방향의 문에 손잡이가 있는지 찾았다. 하지만, 무의미한 행동. 철문의 매끄러운 표면을 여자의 손가락이 훑고 지나갔다. 손가락은 쇠못의 머리 부분에 걸려 상처가 났고, 그 부분에서 곧 피가 흘렀다. 하지만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여자의 피로 그린 그림이 구멍을 중심으로 반원 모양으로 퍼진다. 크르릉. 소리가 한 번 더 들리고, 여자는 구멍에서 손을 뺐다. 나는 다시 여자의 떨리는 눈빛을 봐야 했다. “무섭단 말이에요! 살려줘요!” 누구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그런 절규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뻔히 보면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뒤에 뭐가........” 내 말 중간을 철판이 막았다. 구멍을 막고 있던 철판이 다시 내려왔고, 여자와 내 대화는 단절되었다. 여자 목소리는 두꺼운 철문을 울림으로 전해졌다. 시각적 단절. 쿵. 무언가 둔탁한 것이 철문에 부딪친 것 같은 소리. 비명. 쿵. 문의 울림. 비명. 나는 문에서 물러나 반대편 벽에 기댔다. 들리는 소리만으로 여자가 살아남기 힘들 것이란 것을 알았다. 철문에 부딪치는 것이 여자의 머리일 것이라는 생각. 하지만, 도대체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이기에 여자에게 이렇게 비참한 비명을 지르게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복도를 뛰었다. 절룩거리면서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렸다. 심장이 갈비뼈에 찔린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을 부여잡는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소리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그것과 맞닥뜨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복도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확신이 섰다. 두려움을 원동력 삼아 발꿈치의 고통도 지배했다. 그렇게 꽤 많이 뛰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울림소리와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머리가 멍하다. 발걸음을 늦추고 뒤를 돌아본다. 내가 향하는 방향과 다름없는 모양의 복도가 뒤쪽에도 똑같이 보인다. 잘못 정신을 놓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지 찾지 못할 것 같다. 잠시 멈춰 들리는 소리에 집중한다. 하지만, 소리가 사라진 세상인 것처럼 고요하다. 어떤 울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비명은 아주 먼 옛날 얘기처럼 생각되었다. 그녀가 있던 방에 무엇이.......... 여자가 살아있기를 바람은 하지 않았다. 여자가 질렀던 비명은 죽음 직전에 저승사자에게 부르짖는 소리일 것이다. 날카로운 낫이 목을 겨눌 때에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소리. 절뚝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발꿈치의 통증은 아까처럼 심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벌어졌던 일과 시간적으로 벌어지자, 여긴 나가는 곳이 없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다가왔다. 무덤 아래. 오직 죽음으로 가는 일방통행만이 존재하는 곳.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소리는 내가 귀를 기울일수록 더욱 명확해졌다. “도와주세요!” 여자 목소리. 조금 전에 죽었을 거라 생각한 여자보다 더 어리게 느껴지는 목소리다. 왼발의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어 조금 더 빨리 걸었다. 저번에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었던 죄책감이 덜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번과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복도 옆에 붙어 있는 철문. 그리고 작고 네모난 구멍.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듯한 느낌. 여자는 내 얼굴을 보자 안도의 눈빛을 했다.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은데. “나 좀 꺼내주세요.” 철문을 살펴본다. 역시 전에 봤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말상대나 해주다가 다시 비명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 철문 위에 동그란 구슬은 붉은 색 옷을 입고 있었다. 뭔가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 “문을 열기는 힘들 것 같아요. 이쪽에는 여는 손잡이가 없거든요. 용접해놓은 것처럼 벽에 붙어 버린 것 같은데.......” 내 목소리는 차분했다. 여자의 눈은 둥글고, 눈동자가 다 드러났다. 귀여운 눈이었지만, 나는 어릴 적 내가 죽인 쥐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파트 1층에 살았는데, 어느 날 발코니에 쥐가 올라왔다. 세탁기 물 내려가는 통로를 타고 들어온 것 같았다. 쥐를 잡기 위해 끈끈이를 설치했고, 다음날 끈적끈적한 액체 속에서 허우적대는 징그러운 동물을 볼 수 있었다. 털들이 끈끈이 속에 파묻혔고, 어떤 좋은 세척제를 쓰더라도 원상태로 돌리긴 불가능해 보였다. 원상태로 돌릴 생각도 없었지만....... 끈끈이에 붙은 쥐를 밖으로 들고 나갔다. 다른 손에는 M16 비비탄 총이 들려 있었다. 벤치에 쥐를 올려놓은 채 총을 쏘았다. 비비탄은 쥐의 피부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박혔다 떨어졌다. 세 발 정도 쏘고 나서 총구가 바라본 곳은 쥐의 눈이었다. 조그만 눈이 총구를 보는지 나를 보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방아쇠를 당겼고, 비비탄은 눈에 박혀 피와 범벅이 되었다. 그 눈이 여자의 것과 상당히 닮아 있다. 크르릉. 여자가 있는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여자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마, 그쪽에서 들리는 소리일 거예요. 도와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네요.”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비명을 변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살려줘요. 제발. 문 좀 열어달란 말이에요!” 전에 봤던 여자보다 젊어 보였다.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화장 안한 얼굴이 하얗다. 볼 가장자리에 솜털도 보였다. 내가 말이 없자 구멍으로 손을 내민다. 그리고 전의 여자처럼 손잡이를 찾으려 문을 더듬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는 나도 점점 긴장감이 커졌다. 과연 이 여자도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인가. 그리고 죽음과 만날 것인가. 갑자기 철문 사이에 숨어 있던 쇠판이 네모난 구멍을 막는다. 그 바람에 여자의 팔이 팔뚝 부근에서 잘려나갔다. 잘린 팔은 비명을 타고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고, 나는 놀라 벽에 등을 부딪쳤다. 크르릉. 소리의 감은 가까워졌고, 여자의 비명은 철문을 뚫고 계속해서 전해졌다. 쿵. 철문이 울렸다. 어떤 괴물이 나타나 여자의 머리를 문에다 박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방 안에 설치된 어떤 장치에 의해 여자가 짓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쿵. 철문이 다시 울리고, 여자의 비명은 작아졌다. 떨어져 있는 팔은 내 발목을 잡으려는 듯, 손가락이 벌어져 있다. 잘린 단면으로 흐르는 피는 쇠붙이 위에서 응고되었다. “제기랄!” 다시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철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는 알 수가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장난은 아닐 것이다. 잘린 손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고, 철문 안에 있는 여자가 어떤 상태이든, 팔이 없는 상태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예상이 맞는다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 잔인하게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지옥? 내가 지금 그곳에 와 있는 것일까? 만약에 이 복도가 끝이 없고, 계속 이런 장면만 보아야 한다면 이곳은 지옥이 틀림없을 것이다. 지은 죄를 생각해 보려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살인, 방화, 절도 같은 것은 내 생활과 거리가 있다. 만약에 지옥이라면, 내가 죽었다는 얘긴데........ 설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달리면서도 지옥이라는 생각을 뿌리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뒤꿈치의 통증을 안고 달리는 나에게 보이는 광경은 똑같은 철로 된 좁은 복도뿐이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지금까지 눈앞에서 사라져간 여자들의 잔인한 죽음, 들리는 것은 지옥의 가장 밑에 갇혀 있어야 할 생명체의 으르렁 거림뿐었다.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배고픔과 추위는 이미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처음 깨어났을 때 던졌던 질문을 다시 내뱉었다. 차가운 금속 벽은 추위를 배설하고 내 목소리를 잡아먹는 듯 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게임이라면 망설 임 없이 손을 놓았을 것이다. 대가가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만 해준다면 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포기조차 불가능한 곳이다. 바닥은 차가워 잠시 앉아 있기도 고통스러웠고, 무언가 뒤에서 달려들 것 같은 불안감이 계속 나를 채찍질 했다.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는 기분이라도 어쩔 수 없다. 차선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멈춰 귀를 기울였다. 사람의 소리. 다시 전과 같은 장면이 되풀이 될 것인가? 만약에 또 같은 장면이 나타난다면, 이곳은 지옥이라는 확신이 생길 것 같았다. 두려움에 떠는 얼굴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몸을 휘감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 없어요?” 사람의 목소리는 조금 분명해졌다. 남자의 목소리. 조금 더 나아가자 복도의 끝이 나타났다. 복도가 끝나는 곳. 그곳은 철문으로 막혀있었고, 철문의 네모난 창으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여기 사람 있어요!" 나는 남자에게 소리 질렀다. 내 목소리에 안도감이 묻어 나왔다. 내가 창으로 그의 얼굴을 보자 남자는 약간 뒤로 물러서 걱정스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빨리 그 방에서 나와요.” “방이요?” 남자는 나처럼 회색 옷을 입고 있었고,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 벽은 복도의 것과 같아 보였다. 남자는 위쪽을 슬쩍 보면서 다시 나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방이라니요?” 나는 다시 물었다. 남자의 대답은 실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내가 이 복도를 지나면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사실은 이 작은 구멍이 닫혀서 그들이 죽는 장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소리는 들었죠. 그 비명 소리는 얼마나 끔찍한지....... 어쨌든 빨리 그 방에서 나와요!” 내가 있는 곳이 복도가 아니라, 방이라고? 그럼 여자들이 있던 곳도 방이 아니라 복도의 끝이었단 얘긴가? 얼굴을 구멍에 밀착시킨 채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문 위쪽에 동그란 철덩어리 보입니까? 그 안에 구슬이 무슨 색인지.......” 불안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붉은색 입니.........."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속에 숨어 있던 철판이 내려와 구멍을 막았고, 크르렁 하는 소리가 내 뒤에서 선명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