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는 어느정도 제 앞가림 정도는 하는 그런 쓸만한 사람이었다.
유명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날 추종하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실력덕에 소소한 부러움정도는 가끔가다가 받는 정도...
나는 그 생활에 만족했고, 앞으로도 그러한 생활이 계속되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그런 안이한 생각이 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는지도 모른다.
때는 약 3개월전...
'인간계 최강'이라는 칭호를 가짐과 동시에 나는 브론즈4라는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배치고사라는 이름의 날벼락을 맞고 나락 깊은 곳으로 추락한 것이다.
이 배치고사라는 이름의 잔혹한 단두대는 에이스의 목, 조커의 목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유저들을 두동강내어 나락에 던져버렸다.
오직 행운이라는 이름의 축복을 받은 자들만이 단두대를 피해갈 수 있었다.
물론 두쪽이 난 자들 중에서도 금새 몸을 추슬러 비룡재천하듯 순식간에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나
그들은 본래 아득히 높은 곳에 자리하던 이들이 어쩌다 미끄러져 내려온 것이었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지옥의 업화가 내뿜는 열기속에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느끼며 속절없이 추락할 뿐이었다.
그렇게 10번의 추락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브론즈4라는 동으로 만들어진 네번째 지옥이었다.
나에게 불을 뿜는 악마들의 말에 따르면 브론즈4라는 지옥 밑에도 한단계 더 끔찍한 지옥이 있고 그 밑으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심성을 뒤틀리게 하고 주변 삼라만상을 끝없이 끌어당기는 기이한 돌(Stones)과 모래(Sands)의 존재들이 있다고 한다.
5번지옥의 악마들과는 몇번 대면해보았지만 기이한 돌과 모래의 존재들에 대해서는 그들조차 언급을 피할정도였기 때문에 나도 더이상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4번째 동(bronze)지옥에 도착한 나는 주변에서 울부짖는 수많은 -아마도 나와 같이 위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자들과 기이한 언어로 사람을 희롱하거나 고통받게하는 악마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도 듣지도 않는 악마들을 보았다.
사실 난 이때까지만해도 떨어져서 울고 있는 자들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났다.
'그대들의 그릇이 아직 모자르기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울고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야 할터인데... 쯧쯧.'라는 생각떄문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났음에도 3번째 동지옥과 4번째 동지옥에 머무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온갖 번뇌와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는 이정도였던건가.'
'나또한 저들처럼 청동 그릇이란 말인가.'
'과거의 나는 나의 능력이 아닌 우연한 기회로 중간계에 머물러 있었단 말인가.'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 나아지지않는 현실에 대한 서러움, 자괴감이 나를 엄습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나도 내가 비웃던 그들처럼 지옥의 한 구석에서 울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깨달은 것은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노력을 다하고 손가락하나 움직일 수 없을 때 비로소 서러움에 북받쳐서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참을 울고 나서 다시 이를 악물었다.
'나는 올라갈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서 기필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리라.'
그렇게 나는 끊임없이 도전했다.
발디딜 곳도 손 짚을 곳도 없는 녹은 청동이 펄펄끌어서 넘쳐흐르는 절벽에 손을 박아넣고 버텨가며 한뼘한뼘 올라갔다.
하루에 두세뼘씩 올라가는 날은 거의 없다시피했고 대부분은 올라간만큼 다시 떨어져 청동쇳물속으로 쳐박히거나 오히려 더 깊은 곳까지 떨어졌다.
그러기를 열흘남짓, 어느덧 절벽에는 청동이 아닌 은빛의 물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물결은 수은도 아닌 것이 진짜 은인데도 불구하고 물처럼 흐르는 성질이 있었다.
허나 그러한 흐르는 성질은 변덕스럽고 난폭하여 간혹 윗쪽으로 솟아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래로 거세게 흐르는 급류를 형성했다.
청동쇳물이 흐르는 절벽은 고통때문에 올라가기 힘들 뿐이었지만 은빛 물결이 흐르는 절벽은 고통과 동시에 거센 흐름으로 날 밀어냈다.
그 은빛 급류속에서 오르락 내리락하며 가끔은 힘을 잃고 떨어져 청동쇳물에 푹 담궈지기도 하기를 약 두달...
나는 오늘 불과 몇일 전에 청동쇳물에 처박히며 신세한탄을 한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나는 금빛 광석지대에 도달했다.
이곳은 내가 본래 살던, 약간은 이기적이고 약간은 바보 천치같은 면이 있어도 기본적인 최소한의 할일을 하는 자들이 많은, 골드로 가는 초입임이 분명했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지옥에서 비록 구석진 곳이라고 하나 내살던 곳에 돌아오니 기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기필코 저 높은 하늘 구름 위로 올라갈 것이다. 여태까지 헤쳐나온 역경들만큼 앞으로도 수많은 역경과 고난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나를 방해할 것이 자명한 일이겠지만 지옥에서도 피눈물을 흘리며 기어올라온 나에게 더이상 그런 장애물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테지.
그 무엇도 나를 서럽게 만들고 떨어지고 미끄러지게 만들 수는 있어도 멈춰서게는 하지 못할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