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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소설] 마지막 30일 1~3
게시물ID : readers_100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요리뽀이
추천 : 0
조회수 : 3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11/23 00:49:54
D-30. 여느 때와는 다른 하루

11월 25일 아침, 사지가 으슬거린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종아리와 팔뚝이 시렸다. 코끝도 차갑다.


“간밤에 내린 비 이후로, 아침 출근길 시민들이 추위에 떨 정도로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오늘 아침 서울 최저기온은 영하 2도, 낮 최고기온은 6도입니다. 초겨울 날씨가……”

“푸엣- 취!”


  TV를 켜 놓고 잔건가? 몸이 차가워 조금씩 정신이 들던 찰나 TV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에 완전히 잠을 깼다. 언제나처럼 출근을 해야만 하는 나는, 습관처럼 핸드폰부터 만지작거렸다. 7시 45분, 늦은 시간은 아니군. 세수하고 이 닦는 데 5분, 머리 감는 데 3분, 머리 말리는 데 2분, 옷 입는 데 3분, 양말 신으면서 TV 보는 데 2분, 딱 15분 걸리겠군. 8시에 집을 나서면, 지하철역까지 걷는 데 10분, 주안역까지 45분, 주안역에서 회사까지 걷는 데 3분. 그럼 8시 58분으로 세이프!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섰다. 덥수룩한 수염에 커다란 눈곱이 불쾌하다. 물끄러미 거울을 바라보니, 거울 속의 나는 크게 한 숨을 쉬었다.


“에휴우-. 나, 왜 이렇게 사냐.”


  스물일곱 살 밖에 안 됐는데, 나는 4년차 직장인이다. 3년 만난 여자친구가 있었다. 어제부로, 그녀는 더 이상 내 여자친구가 아니지만 말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거울 속의 나는 죽은 사람 마냥 힘이 없었다.


“에휴우-, 근데 어쩌냐. 그렇게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말야.”


  어디선가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분명, 이 집에는 아무도 없다.


“끙! 후우, 잘 찾아왔나 본데. 너, 김주훈 맞지?”


  거울 속에서 웬 남자가 튀어 나오더니, 내 이름을 맞췄다. 순간 말을 잊은 나는, 어쩔 방도 없이 그 남자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맞냐고, 김주훈.”

“어, 어. 맞아. 근데 이건 대체...?!”

“반갑다. 내 이름은 딱히 알 거 없고, 음... 설명하자면, 난 저승사자야.”

“저승사...?!”


  저승사자라면, 검은 도포에 갓을 쓴, 새하얀 얼굴의 남자가 아니었던가? 근데, 지금 내 눈 앞에 서 있는 이놈은, 누구나 이해할 만한 저승사자는 아니다. 깔끔한 정장에 얇은 넥타이, 초콜렛 색으로 염색한 머리...


“말도 안 돼. 넌 대체...?”

“뭐가 말이 안 되는데? 내가 저승사자가 아니라면, 이런 스펙타클한 등장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냐?”


  신빙성 있는 것 같은 말이다. 꿈도 아니었다. 분명 난, 추위에 떨다가 잠에서 깼었다. 그렇긴 해도, 쉽사리 믿겨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냐?”

“아, 그, 그래! 대체 왜 여길 찾아온 건데?”

“저승사자가 인간을 왜 찾아오겠냐.”

“그, 그게 무슨...”

“예고해주러 왔다. 넌 30일 후, 그러니까 12월 25일에 죽는다. 그러니까...”

“뭐, 뭐라고? 30일 후에 내가 죽는다고?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병도 없고 오히려 건강하다구. 지금 이 상황도 믿기지가 않는데, 지금 너, 나한테 니 말을 믿으라는 거냐?”

“흐음, 대부분의 인간들이 처음에는 너처럼 반응하지. 믿거나 말거나, 그건 니 마음대로 해. 어쨌든, 난 30일 후에 네 영혼을 가지고 갈 거야. 그럼 안녕-”

“이, 이봐!!! 어이!!!!!”


  그럼, 안녕- 이라니, 무슨 동화책의 왕자님이 날 찾아왔다 간 건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나는, 덥수룩한 수염과 커다란 눈곱을 얼굴에 그대로 달아놓은 채 10여 분을 써 버렸다. 



“주훈 씨, 또 늦었네. 젊은 사람이 대체 왜 지각을 하는 거죠?”

“죄송합니다.”


  아침의 그 놈 때문에, 나는 10분 지각했다. 나를 쥐잡듯 쏘아붙이는 저 여자는, 편집팀의 도예지 팀장. 나이는 서른 후반인데, 아직 미혼이다(누구든 그녀를 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출판사에서 4년째 말단 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나는, 지난 4년의 출근일 중 하루도 빠짐없이 저 여자의 화살과 같은 말들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욕지기를 되뇌며 얼굴을 폈다.


“주훈 씨, 일루 와 봐요. 어제 준 편집본, 오타가 너무 많잖아. 빨리 와 봐요.”

“앗, 네. 잠시만요. 가방 좀 벗고...”


  무슨 오타가 있다는 거지? 하긴, 오타가 있을 만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던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가 내 온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을 무렵 타이핑한 자료였으니 말이다. 나는 구석탱이 내 자리에 가방을 급하게 벗어놓고, 땀 몇 방울을 삐질거리며 팀장님의 책상으로 달려갔다.


“이거 봐, 이거. 띄어쓰기도 지금 몇 개를 틀려놓은 거야.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안 되나? 이제 이런 건 안 틀릴 때 되지 않았어? 가방끈 짧은 거 티내는 거야, 아니면 반항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해서 바로 올리겠...”

“어후, 술냄새! 미쳤어 정말? 일부러 나한테 냄새 맡으라고 가까이에서 말하는거야, 뭐야? 아침부터 정말!”

“죄, 죄송합니다...”


  제기랄, 어제 혼자서 퍼마신 소주 냄새가 올라왔나 보다. 팀장님의 눈길이 경멸에 가득 차 있었다. 나를 벌레만치도 안 보는 것 같다. 하아- 나는 마음속으로 욕을 수천 번 했지만, 얼굴로는 죄송함을 연기했다. 나는 얼른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아까의 그 치욕을 마음속으로 씻어내려 할 때, 허연 서류 뭉텅이가 내 팔을 건드렸다.


“주훈 씨, 미안한데 이거 세 부만 복사해주라. 미안해요, 내가 지금 급한 회의를 들어가야 해서... 미안해요, 나중에 밥 살게요!”


  대답할 새도 없이 그가 뛰어나갔다. 주승환, 우리 팀의 수석 팀원이다. 나이는 나보다 겨우 일 년 더 먹은 놈이, 수석으로 입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깔본다. 개자식. 그래도 나는 그 서류 뭉텅이를 들고 복사기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주훈씨, 편집본 25분 내로 다시 올려요. 회의 들어갔다가 나올 거니까, 그 전에 올려놔요. 딴 짓 하지 말고요. Got It?”

“아, 예엣!”


  에휴, 불쌍한 김주훈.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이냐, 니가.



  복사기에 복사 세 부를 걸어놓고, 오류 알림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온 청각을 복사기에 기울이며 어제의 오타들을 빛의 속도로 수정했다. 아마 팀장님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런 집중력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복사 세 부가 이상 없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삐이- 삐이- 삐이익’ 소리가 남과 동시에, 메신저로 편집본을 새로 올렸다. 복사된 서류들을 탁탁 두드려 스테플러로 잘 찍어서 주승환 놈의 책상 위에 던졌다. 다행히 던졌다는 표시가 나지 않을 만큼 가지런히 잘 착지했군.

 

  어젯밤 집으로 돌아가면서 소주 세 병을 사갔던 나는, 그 소주 세 병을 혼자서 다 비우고 잠이 들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속이 끓었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급한 소변부터 해결하고, 큰 놈도 해결해야 한다는, 뱃속의 외침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겨우 달려와 소변기 앞에 자리한 내 옆에, 홍보팀 김 팀장이 섰다. 이 기분 나쁜 늙은이는, 화장실에서 남의 물건 훔쳐보는 게 특기다.


“이야, 주훈 씨 물건은 언제 봐도 놀라워. 통통한 게, 남자 구실 제대로 하게 생겼어. 어때, 진짜로 잘 하나?”

“아아, 아니, 네, 아니오...”

“아핫핫! 남자끼리 뭐가 어때서 그래.”


  변태같은 놈! 딸이 둘이나 있는 가장 주제에, 20대 남자 사원들 물건 훔쳐보는 게 취미인 변태다. 그 놈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지만, 지금 내 안에는 더 강하게 들끓는 것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변기 칸으로 들어가 앉았다.


“큭, 냄새! 뭘 쳐먹고 사는 거냐?”

“너, 너?! 대체 니가 어떻게...?!”


  변기칸 구석에, ‘저승사자’가 기대 서 있었다. 나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서는, 모든 생리 활동을 멈춰버렸다.


“불쌍한 자식. 너 참 빡빡하게 사는구나?”

“휴우...”

“담배 필래?”

“화장실 금연이야.”

“걱정 말고 한 대 물어, 임마.”


  화장실에서 담배 핀 사실이 들키는 날엔, 도 팀장은 물론, 대리님 차장님 과장님 부장님 등의 높은 사람들이 날 가만두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눈 앞의 ‘저승사자’를 믿기로 했다. 그가 걱정 말라고 했으니까. 담배 연기가 한 숨만큼 폐로 들어오니, 들끓었던 것들이 순간 쏴아-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변기통 물 아래로 내려간 것들도 있었다.


“크으윽, 냄새 장난 아니네, 개자식”

“흐흐, 미안.”

“그나저나, 너 계속 이러고 있다가 갈 거냐?”

“어딜?”

“나랑 가야지. 12월 25일”

“후아-, 개소리 하지 마. 내가 죽긴 왜 죽어?”

“아, 진짜라니깐? 너 사는 거 보니까, 내가 다 마음이 아프다 이 새꺄. 내가 웬만해선 인간들 사는 거에 관여 안 하는데, 넌 진심으로 불쌍해. 30일밖에 안 남은 주제에, 그렇게 살고 싶냐? 어?”

“......”


  회의감이 들었고, 통탄스러웠다. 내가 원한 삶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세계 곳곳을 다니며 여행기를 담은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도 싶었고, 기타 하나만 메고서 전국을 누비는 가수가 되고도 싶었고, 돈도 왕창 벌어서 부모님께 외제차도 사 드리고 싶었고, 김태희같은 미녀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고도 싶었는데.


“저승사자. 그 말, 진짜냐?”

“어. 너 진짜 불쌍해.”

“아니, 그거 말고. 진짜로, 30일 있다가 날 데리고 갈 거냐고.”

“그럼.”

“내가 거부하면?”

“그런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하아......”

“어떻게 하든, 니 선택이니까 니 마음대로 해. 여기서 온갖 치욕을 겪으면서 구르다가 따라오던지, 마지막 남은 30일을 뜻깊게 보내던지. 니 마음대로 하라고.”

“...... 야, 저승사자.”

“왜? 뭐?”

“내가 지금 회사 때려 친다고 쳐. 근데, 내 통장에 잔고가 120만 원인가 밖에 없어. 그걸 가지고, 내가 대체 뭘 하겠냐.”

“에휴, 멍청한 놈아! 너한테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제대로 좀 생각해봐. 너한테 남은 시간은 꼴랑 30일이라고. 그 시간을 지금처럼 이렇게 의미 없이 보내고 싶냐? 이해가 안 가네. 아직도 내가 저승사자라는 게 안 밑기나 본데...”

“아니, 믿어. 이젠 믿어. 진짜 내가 30일 후에 죽을 거라는 것도, 실감은 안 나는데 이제 믿긴 믿는다구.”

“...... 한 대 더 피면서 생각해봐라.”


  거의 다 타들어갔다고 생각했던 꽁초가, 새 담배처럼 타고 있었다.


“제기랄... 30일이고 뭐고, 오늘은 집에 가서 쉬고 싶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난 정말 30일 후에 죽는 건가? 왜? 몸도 멀쩡한데 대체 왜 죽는다는 거지? 내 삶이 우울하긴 했지만,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저승사자’ 놈 때문에, 내가 이런 현실감 없는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주훈 씨, 퇴근 안 해?”

“네?!”


  주승환이었다. 회의 들어가기 전과는 다르게 코 아래가 거뭇해 보일 정도로 수염이 자랐다. 얼굴도 번들거렸다.


“복사해준 거 너무 고마워서 밥이라도 사려고 했는데, 점심때는 나가서 먹고 온 거야? 자리에 없던데.”

“네?! 아, 저 화장실을...”


  이게 무슨 소리지? 기껏해야 열 시도 안 됐을 텐데, 그가 퇴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순간 등줄기가 훅, 하고 섬뜩해졌다. 놀란 나는 재빠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보았다. 07:00 PM.


“아, 그래? 그럼, 얼른 퇴근해. 내일 봐!”

“네, 넵!”


  섬뜩한 느낌이 맞았다. 나는 황급히 회사를 뛰쳐나왔다.


“놀랬냐?”

“으허억! 이 자식,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나타나지 마!”

“크크큭. 내가 힘 좀 썼다. 불쌍한 자식.”


  저승사자 놈의 소행이었다. 이로써 나는,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는 진짜 저승사자다. 그리고 나는, 30일 후에 죽는다.


“나, 진짜 30일밖에 못 사는 거야?”

“안됐지만, 그래.”

“후우, 야, 저승사자. 너 술 마실 줄 아냐?”

“그러-엄. 인간세계 술중에는 소주가 제일 괜찮더군.”

“나랑 한 잔 하면서, 내 얘기 좀 들어줘라.”

“그 정도야 뭐.”


  나는 근처의 포장마차로 터덜터덜 걸었다. 그도 나를 뒤따라 걸어왔다. 어제와 오늘,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일어났다. 3년이나 사랑했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심과, 죽을 만큼 괴로웠던 소주 세 병. 거울에서 튀어나온 저승사자와, 줄어들지 않는 담배. 또, 베여 나간 시간.  그리고, 예고된 나의 죽음까지.


“이모, 소주 두 병이랑 우동 두 그릇이요.”

“우동? 야, 난 그런 국물 같은 거 싫어해. 매콤한 걸로 시켜줘.”

“닥쳐, 임마. 주는 대로 먹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미친 놈 보듯 쳐다봤다.


“야, 저승사자. 너 혹시, 나한테만 보이는 거냐?”

“당연하지. 내가 다른 인간들한테도 보이면 큰 일 나지.”

“빨리 말하지! 나 혼자 떠들면 미친놈처럼 보일 거 아냐! 이모, 죄송한데 우동 취소요!”

“에, 뭐야? 왜 안 먹어?”

“미친놈아! 날 미친놈 만들고 싶은 거냐. 집에 가서 먹어야겠어. 집으로 가자.”


  나는 집 앞 구멍가게에서 소주 네 병과 뻥이요를 사들고 언덕을 올랐다. 저승사자는 불평했다.


“아, 니네 집 대체 어디야? 이 언덕빼기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건데?”

“조용히 좀 해, 정신 사나워.”

“으아아아-! 다리 아프다.”


  집에 도착한 나는, 언제나와 같이 옷부터 벗었다. 사각 팬티 한 장만 달랑 걸치고, TV 앞 바닥에 철푸덕 앉아 병뚜껑을 돌려 깠다. 저승사자도 방을 조금 둘러보는 듯싶더니, 이내 내 앞에 앉는다. 나는 그에게 소주병을 건넸다.


“잔 같은 건 없는 거냐?”

“설거지거리 만들기 귀찮아. 그냥 먹어.”


  나는 아무 말 없이 소주병을 물고, 고개를 들었다 놨다 하며 반 병 정도를 마셨다. 저승사자도 군말 없이 소주병을 물고 꼴깍였다.


“이런 막돼먹은 술자리는 처음이군.”

“하하핫. 이게 소주 맛이야, 자식아.”


“너무 걱정하지는 마라.”

“걱정? 흐음. 걱정은 안 돼, 아직. 실감이 안 나서 그런 건가.”

“죽는다는 거, 별 거 아냐. 그리고, 인간 세계에서 죽는다고 해서 너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말야.”

“사후세계 같은 게 존재한다는 거야?”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흐흐. 너, 저승사자 치고는 꽤 착하다.”

“원래 이런 짓 안 해, 저승사자는.”

“근데 넌 왜, 날 도와주는 건데?”

“도와준다? 하핫, 도와준다기 보다는, 너한테 남은 마지막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걸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널 보고 있자니, 내 인간시절이 생각나서 말이지.”

“인간시절? 너도 인간이었다는 거야?”

“보면 모르냐? 이 모습, 내가 죽었을 때의 모습이야. 스물 세 살때, 오토바이 사고였어.

“아...... 나도 이십대 초반에 오토바이 타고 다녔었는데.”

“다행이군. 안 죽었으니.”

“저승사자. 니 마지막 30일은 어땠어?”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저승사자는 새 소주병을 까들고서는, 크게 한 모금 넘겼다. 크으으-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인간 출신(?)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내 마지막 30일이라... 날 데려간 저승사자 놈은, 나만큼 성실한 놈이 아니었어. 어느 날 갑자기 꿈속에 나타나서, 30일 후에 널 데려가겠다아아아- 하더니 사라졌지. 난 당연히 개꿈이겠거니 했어.”

”으으음... 역시, 니가 특이한 케이스였어.”

“그래. 그때 난 제대하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뒹굴거리고,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오토바이 타러 다니고, 뭐 그렇게 한량처럼 살았거든. 마지막 30일은, 술을 안 마신 날이 없을 정도로 많이 마셨었어. 결국 친구 생일날 만취해서 오토바이 타다가 트럭에 부닥쳐서 죽었어.”

“...... 미안한 얘긴지도 모르겠는데, 싱겁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도 후회한다고. 그러니까, 내 저승사자 업무 첫 담당인 네 놈이 나처럼 싱겁게 죽게 두는 건 싫다 이거야.”

“하하핫, 내 살다 살다 저승사자한테 이런 얘기를 다 듣네.”


  그 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 앞에는 빈 소주병이 두 개가 있었다. 저승사자도 얼굴이 벌개져서 헤롱거렸다. 그런데 그의 앞에 있는 소주병은 뚜껑조차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어쨌든, 꿈같던 하루가 어영부영 지나가고 있었다.




D-29. 생산적인 삶은 대체 뭘까


김주훈해가 중천이다.”


  저승사자놈의 목소리였다어제에 이어서 들리는 저 목소리가내 죽음을 확정짓는 것만 같았다섬뜩했다그에 더해서해가 중천이라니그럼출근은?


몇 시야?”

두시 반

두시 반?!!!너 왜 나 안 깨웠어?”

아이조용 좀 해봐드라마 보잖어.”

이런 개...”


  저승사자 놈이 팬티 바람으로 TV에 집중해 있다저거인간 출신인 건 확실하구만어쨌든, 30일 있다가 죽는 것보다 무단으로 결근한 게 더 섬뜩했다제기랄도 팀장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아마 내 자리를 빼고잘라버릴 지도 모른다.


자리를 빼든널 짜르든이제 뭔 상관인데출근할 거야?”

당연하지출근... 하아맞다나 죽지?”

너무 기 죽지는 마라.”


  휴대전화를 켜 봤다분명 부재중 통화 몇십 개에 엄청난 카톡이 와 있겠지 싶었는데어라깨끗하다아무도 연락을 안 했다.


기 죽지 말랬잖어크큭.”

뭐야이것도 니가 한 거야?”

그으.”

”... 좋긴 한데이거 직권 남용 아니냐?”

직권 남용으음그런 것 같기도 한데.”

저승사자그럼 너내 소원도 들어줄 수 있지?”

안돼!”

?!”

그건 불법이야인간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꿔주는 건능력도 안될 뿐더러 불법이라고.”

뭐야그럼 지금까지는 뭔데시간도 뛰어넘고뭐 그런 건 대체 뭐야?”

그건 내가 하고싶어서 한 거지널 위해서 한 건 아니잖어.”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구만.”

아오좀 그만 조용좀 해티비 소리 안 들려!”


  어제그리고 오늘 지금까지 있었던 신기한 일들이내가 30일 후에 죽는다는 사실을 더욱 더 명확하게 얘기해주는 듯 했다마음이 복잡했다내가 정말 죽는 건가내가 살 날이, 30일도 안 남았다는 게 사실일까내가 대체 왜 죽어야 하지?


까똑!’


  도 팀장인가나는 순간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며 재빠르게 휴대전화를 켜 보았다도 팀장은 아니었다가연이였다날 버린.


주훈아 출근안했나보네... 연락도 안되고... 잠깐 만날수있어?


  왜지어제는 종일 연락도 없어서 내 속을 뒤집어놓더니지금에서야 연락을 하는군근데타이밍이 이상했다저승사자놈?


나 아니다!”


  이상하다아까도 이상한 것 같았는데이 자식 내 생각까지 다 아는 건가?


뭐야어떻게 알어?”

크크크크니 생각도 다 들리거든.”

생각은 읽지 마쪽팔리게!”

내가 니 담당이라듣기 싫어도 다 들리거덩나도 어쩔 수 없다 이거야흐흐어쨌든만나러 나가야지좀 씻어라.”

따라오지 마샤워할거야.”


  수염도 덥수룩하게 났고얼굴도 꼬질꼬질하다이 상태로 가연이를 만날 수는 없었다. 15분 만에 준비를 끝내고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어서나는 구석구석 깨끗하게 샤워하기로 했다머리를 박박 감고손가락으로 얼굴 여기저기를 문질러 세수했다면도 크림을 구름만큼 짜서거뭇거뭇하게 난 수염 위를 두껍게 덮어 올렸다면도날이 미끈하게 나갔다샤워볼로 온몸 구석구석을 빡빡 닦았다오랫만에 진짜 씻는 느낌이 났다허물 벗는 기분이 이럴까?

  깨끗하게 면도를 마친 나는마음대로 자란 머리를 뒤로 싹 넘겼다거울 속의 나는 멀끔하니 괜찮았다.


이야깨끗하게 씻겨놓으니 볼만하긴 한데자뻑 보소!”

저승사자 놈아훔쳐보지 말라니깐!”


  여튼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훔치고 머리를 말리기 위해 욕실을 나갔다머리를 말릴수록 붕붕 떠서사자 갈기 같았다.


너 사자냐머리 좀 어떻게 하고 가.”

좀 잘라야겠다깔끔하게.”

요새 젊은 남자들은 머리를 어떻게 깎냐나 때는 무작정 기르는 게 유행이었는데.”

요새는옆머리 뒷머리 싹 밀고 윗 머리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유행이야.”

구렛나루를 민다고세상이 바뀌긴 바뀌었구만.”


  제대하고 나서 미용실을 가본 게 몇 번이었더라기억도 안 난다하여튼최근 서너 달 동안은 머리를 깎으러 갈 시간조차 없었다제대로 씻지도 못하고머리도 못 깎고 살았다니이게 삶이 맞는 건지멍하니 거울 속의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스타일이구만?”


  저승사자 놈이 잡지책 비슷한 것을 들고 읽는다어디서 구한 책인지 궁금했던 나는그 쪽으로 갔다.


무슨 스타일인데?”

이런 거 아니야거울 봐봐.”

거울으어어?”


  거울 속에는 저승사자 놈 말고도남자 한 명이 더 서 있었다나인가자세히 보니 나였다옆머리와 뒷머리가 단정하게 밀려 있고긴 윗머리가 깔끔하게 포마드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맘에 드나 보네크크!”


  나는 조금 놀랐다덥수룩한 수염과 답답한 장발에 갇혀 있던 내 얼굴선이 드러나면서인상이 훤해졌다이게 내가 맞나싶을 정도였다그 동안 내가 그렇게 관리를 안 했었나여튼이 모습을 가연이가 본다면 어떤 말을 할지가 궁금해졌다.


고맙다저승사자.”

인간한테 고맙다는 말을 다 듣는군.”


  사실 고마울 상황은 아니지만지금은 그냥 그렇게 해 두기로 했다나는좀 잘나진 내 얼굴에 신이 나서평소에 입지도 않던 아끼는 정장 바지를 꺼내 입었다잘 다려진 흰 셔츠에 니트 가디건을 입고코트도 걸쳤다매일 입고 다니던 청바지와 라운드 티야상에서 벗어나보고 싶었던 것 같다나는이전의 나에게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그리고가연이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가연이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네시 반나는 네시 이십 분 정도가 되어 카페에 도착했다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창 밖을 바라보는 나를 향한 뭇 여성들의 시선이 느껴졌다그래이게 김주훈이지으쓱해진 나는 그 시선들을 즐기기로 했다누군가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 주훈아?”

왔어앉아커피 마실래?”

아니.”

여기카페모카 한 잔이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만약 내가 어제의 나였다면나는 울며불며 그녀에게 따졌을 것이다하지만급속히 자라난 우월감이 나를 그리 하도록 두지 않았다오히려 안절부절 못 하는 건그녀 쪽이었다.


회사관둔 거야왜 갑자기...”

그냥.”

머리도 깎았네?”

.”

”... 화 많이 났어?”

”...... 그런 얘기는 별로 듣고싶지 않고왜 헤어지자고 한 건데이유나 들어 보자.”


  믿을 수 없을 만큼 냉정한 말들이 튀어나왔다내 옆에서는 저승사자 놈이 오오새끼쫌 하는데와 같은 잡소리를 지껄였다.


미안해요새 니가 너무 바쁘고 그래서... 만나기도 힘들고... 힘들어서 그랬어.”

그래?”

”... 미안해.”

그래커피 마셔라간다.”

주훈아!”

?”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내가 때깔 좋아지니까 군침이 도냐가식적인 그녀의 미소가 거슬렸지만나는 순간 떠올렸다나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남은 시간 동안이라도이 상황을 즐기자.


우리 집으로 가서 얘기해.”

으응.”





어쩔 셈인데?”

-어쩔 셈이긴너도 남자면 알 거 같은데.


  나는 머리 속으로 내 생각을 전했다저승사자는 내 뜻을 잘 알아들었는지계속 말을 걸었다.


응큼한 새끼!”

-다른 건 다 힘들어세계 일주도 하고 싶었는데돈이 없고영어도 못 해가수도 되고 싶은데음치야다른 것 말고본능에 충실해서 때깔 곱게 가는 게 좋을 거 같애.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맘대로 해라.”


  머릿속 대화가 몇 번이고 오간 뒤나는 그녀와 함께 퀴퀴한 자취방에 들어갔다.


청소... 해 줄까?”

아니됐어얘기 좀 하자며앉아하고 싶은 얘기 있음 해 봐.”

“... 미안해나도 순간적으로 말이 잘못 나온 거였어.”

그래그럼날 좋아하는 마음은 안 변했다는 거야?”

아직은난 너 좋아해그래서 오늘도 연락한 거야.”

그래그럼증명해 봐.”

증명?”


  나는 그녀의 두 어깨를 손아귀에 꽉 넣고는 입술을 맞췄다그녀는 나를 밀어내는 듯 싶었지만이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나는 윗옷을 벗었다.


우후좋은 구경 하겠는데.”

-조용히 하고 있어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얼마나 지났을까그녀와 나는 갈 데까지 갔다.


증명... 된 거지?”

“... 아마도.”


  나는 그녀가 누워있는 옷방 침대를 뒤로 하고 욕실로 들어갔다후회는 없었다이전의 나였다면 꿈도 못 꾸었을막돼먹은 행동이었다하지만이상하리만치 기분은 깨끗했다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나를 가두었던 일상의 루틴을 깨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저승사자 놈에게아이러니하게도 감사함을 느끼며 변기에 앉았다.


짜식좋은 구경 시켜줘서 고맙다침 삼키는 소리도 안 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 하핫담배 있냐?”

고럼.”


  나는 담배를 물고는크게 한 숨을 쉬었다누군가 그랬지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자신의 한숨을 보기 위해서라던가샤워 부스에 비친 내 모습이 이질적이었다저승사자 놈도 맛깔나게 담배를 빨고 있었다.


고맙다저승사자

인간한테 이런 말도 들어보는구만.”

조금은 알 것 같아니가 온 이유만약 내가 니 말처럼 진짜로 30일 있다가 죽는다고 해도아니면 니 말이 거짓말이라고 해도나는 오늘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럴 것 같냐?”

그럴 것 같냐니무슨...”

그래니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면야나도 만족이야남은 날들을 다 그렇게 살라구.”

저승사자니 인간 생애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야?”

“... 몰라아무 것도 안 하고 산 거?”

그렇군아무 것도 안 한다라... 뭔가 생산적인 일을 안 했다는 건가?”

생산적인 일?”

그래생산적인 일... 생산적인 일이 뭐지생산적인 삶은 대체 뭐야흐음... 돈을 버는 것그 것도 생산적이긴 하지하지만살날이 한 달도 안 남은 나같은 놈에게는 그런 건 생산적이지 못해... 그렇다면...”

그렇다면?”

“... 모르겠다살면서 해본 일이 돈 버는 것 밖에는 생각이 안 나내 인생생각보다 많이 구렸네.”

크크크큭지금이라도 안 게 어디야.”


  저승사자 놈이 담배를 크게 한 입 빨았다나 역시담배를 한 모금 크게 빨아 폐 아래까지 연기를 눌러 담았다생산적인 삶이라... 아니그 전에나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어디 가?”

있다가 집에 가라친구 만나기로 했어.”

친구 누구?”

나간다있다가 집에 가라.”


  가연이의 말을 무시하고 집을 나섰다시간은 열한 시 쯤어둠이 깔려 있었다언덕 위의 달동네라이 시간 쯤 되면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그 고요한 속을 혼자서 내려갔다아니여기 어딘가에는 저승사자 놈이 날 따라오고 있겠지.

  친구를 만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나는 ATM기에서 50만 원을 뽑아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갔다강남의 밤은 내 자취방의 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시끄러웠고아름다웠다나는가장 사람이 붐비는 클럽으로 향했다그 안은 습하고 시끄러웠지만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맥주 한 병을 들고기둥에 기대어 여자 구경을 했다.


히야물 좋네이쁜 언니들 진짜 많다.”


  저승사자는 첫눈 맞은 강아지마냥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사람들을 구경했다나는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검은 긴 생머리에몸에 딱 붙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그렇게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는데아니나 다를까그녀가 다가와서 나의 귀에 가까이 입술을 대고 말했다.


혼자 왔어요?”

.”

나두요춤 출래요?”

좋아요.”


  그녀는 내 팔목을 거칠게 잡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나갔다그녀의 손은 내 어깨와 허리를 향해 왔고이내 나도 그녀의 허리 위에 손을 올렸다그녀의 손과 몸이 거침없이 나의 온 몸에 닿았다.


나가서 한 잔 해요.”

나가자구요좋아요.”


  나는 그녀를 끌고 클럽 계단으로 나왔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라.”

그러면서 클럽엔 왜 왔어요후후.”

나가서 둘이 한 잔 해쏠테니까.”

왜 반말해요후훗어쨌든좋아요.”


  우리는 가까운 술집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술을 마셨다그녀는 강남에 사는 스물세 살 대학생이었다나는 스물네 살이고역시 강남에 산다고 거짓말했다어차피 오늘 보면 더 볼 일 없는 사람이니거짓말해도 상관없다둘이 합해 소주 두어 병을 마시니그녀의 발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클랐다이러케 들어가면 아빠한테 혼나는데.”

그래도 들어가야지늦었다데려다 줄 테니까 일어나.”

오빠나 안 돼좀 깨고 가야 하는데잠깐 쉬고 가면 안 대?”

알았어일단일어나.”


  그녀는 나에게 온 몸을 맡겼고나는 거부하지 않았다나는 가까운 모텔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고저승사자는 또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 좋은 구경 많이 하네하핫!”




D-28. 소소한 것의 행복



김주

... 머리야몇 시냐?”

열한 시 반.”

하아... 내 핸드폰어딨지?”

요기.”


  이런오늘은 어제 아침과는 다르게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가 와 있다부재중 통화 23통은 가연이였고카톡도 가연이였다.


연락 안 받네... 집 좀 치워놓고 왔어들어오면 연락 좀 해!

후우...”


  얼마 안 마신 것 같은데온 몸이 쑤시고 머리가 띵했다침대에서 내려오니아랫도리가 허전했다아무 것도 안 입고 있었다내 팬티며 셔츠며 바지가 침대 옆에 마음대로 어질러져 있었다나는 팬티를 주워 입고화장실을 찾아 들어갔다머리는 떡졌고얼굴은 기름이 번들거렸다.


어때?”

뭐가 어때.”


  이제는 익숙해진 저승사자놈의 목소리나는 머리를 감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제 28일 남았는데.”

하아-. 알고 있어굳이 확인 안 시켜줘도 안다구.”

흐흣그래어쨌든 지난 2일은 후회 없냐?”

후회없어.”


  아니다후회스럽다이건 내가 아니야나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야밤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 자던 사람이야그리고한 여자만을 계속 사랑해왔던 사람이야나는 어제의 나를 원망하고 후회했다.


거짓말나한테는 거짓말해도 소용없어.”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죽기 전까지 잘 살수 있냐고.”

난 모른다고 했다분명히.”


  샤워기 물소리에 점점 내 자신이 잠겨가는 기분이었다거품을 씻어내다 만 머리카락에서 거품이 흘러 내려와 팬티가 다 젖었다그 참에 나는 팬티를 벗고 샤워를 했다어제보다 더 구석구석빡빡 씻었다구정물이 배수구를 향해 내달았다그래그렇게 꺼져버려구정물 같은 김주훈.


오빠씻었어갈 거야?”

.”

“... 그래잘 가즐거웠어.”

그래너도 얼른 챙겨 가라.”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씻고 나온 나에게 말했다나는 나도 모르게 황급히 머리를 털고 옷을 주워입었다그리고는도망치듯 그 방을 나왔다.


오빠폰에 내 번호 저장해놨어.”


  번호를 저장해놨다는 건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인가약간 우쭐해지려는 찰나전화소리가 울린다가연이다.


어디야왜 전화 안 받았어대체 뭘 한 건데?”

가연아... 미안.”

왜 그래?”

아니그냥전화 안 받아서 미안하다구회사야?”

... 괜찮아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돼서 그랬어들어가서 쉬어.”

이따 퇴근하고 밥 먹을래오랜만에맛있는 데 가서 먹자.”

정말너무 좋지연락할게오늘 일찍 퇴근할 테니까나올 준비 하고 있어!”

이따 봐.”


  그녀의 들뜬 목소리가 나를 더 죄스럽게 했다그리고 나는그 복잡한 모텔촌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나는 대체 누구지나는 대체어떤 인간이지김주훈이라는 남자놈이 참으로 생경하게 느껴졌다대체죽기 전에 뭘 해야 후회없이 떠날 수 있을까그 고민이 자꾸만 나를 괴롭혔다택시를 잡아타고 동네로 돌아왔다달동네 위까지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갑자기 택시비가 아까워져 언덕 아래에서 내리기로 했다.


아아우올라가서 내리지다리 아프게.”

넌 산 사람도 아니면서 자꾸 꾀병 부리지 마라?”


  그렇게 저승사자와 신나게 떠들면서 올라가는데낯익은 파란 츄리닝 입은 남자가 걸어 내려왔다.


어어-김주쫙 빼입고 어디 갔다 오냐-?”

염탱올만이다.”


  염태훈고등학교 동창이다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였는데제대 이후로 같은 동네에서 자취하며 더 친해진 녀석이다이 자식은 취직한 지 5개월 만에 회사를 때려치고지금까지 대충대충 살고 있는 백수다.


이 시간에 웬 일이냐니가회사 안 가?”

그만 뒀어.”

오오오오오진짜니가 드디어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났구나.”

그래구렁텅이에서 겨우 기어 나왔다.”

흐음시간이 일러서 술은 좀 그렇고밥이나 한 끼 하러 갈까?”

그래밥 좋지.”


  오랜만에 친구와 한가한 점심 식사라니좋았다이렇게 소박한 것도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들이 또 한탄스럽기 시작했다.


대체 내가 지난 사 년동안 뭘 한건지 모르겠다회사 집 회사 집... 그리고 남은 돈은 달랑 몇십만 원...”

헤헷그니까 나처럼 아예 편하게 살지 그랬냐.”


  염탱과 나는 뼈다귀 해장국 한 그릇씩을 뚝딱 비웠다그리고 보니 시계는 한 시를 조금 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한 시밖에 안 됐네하아일을 안 하니까 이거뭘 해야 될지도 모르겠네.”

그런 건 내가 전문이지임마당구나 한 겜 치러 갈래?”

당구당구 좋지하하핫진짜 올만이네지는 사람이 겜비 내기다.”

그건 당빠지그럴 줄 알았으면 당구장에서 짜장면 먹을 걸.”

짜장면진짜으핫핫핫핫!!”


  내 가슴 아래에서 진실된 웃음이 터져 나왔다이렇게 한가하고도 소박한 삶이라니이런 게 행복인가나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고당구를 치러 가서도 그랬다오랜만에 잡는 큐대는 손끝에서 미끄러져 이상한 데로 나갔지만그래도 좋았다염탱은 나에게 욕지기를 하며 점수를 쭉쭉 뺐다그렇게 몇 판이나 쳤을까밖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우리는 아무 걱정 없는 아이들처럼 당구를 쳐 댔다.


맞다나 가연이랑 저녁 약속 했는데.”

가연이너 아직도 걔 만나냐대단하네.”

대단은 무슨... 주말도 없이 일만 다니던 날 만나준 가연이가 대단한 거지.”


  때마침 전화소리가 울렸다가연이였다.


자기어디야?”

나 우리 동네야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당구 한 겜 쳤어퇴근했어?”

아니한 삼십 분 있으면 퇴근할 거야어디 갈까?”

너 좋아하는 데로 가자레스토랑 Q, 거기 괜찮았지?”

너무 좋아거기로 갈게한 20분 정도 걸릴거야.”

난 지금 출발하면 얼추 맞겠는데가서 보자.”

이따 봐!”


허어너네 4년 만난 커플 맞냐?”

?”

아니상큼해서 새꺄크크큭쨌든 맛나게 먹고 와라심심하면 또 행님 부르고오늘 잘 놀았다!”

그래들어가라고마웠다 오늘.”

새삼스럽게 고맙긴데이트 잘 해라!”


어때오늘은괜찮냐?”

-아직까지는!


  나는 버스에 올랐고자리에 앉자마자 저승사자놈이 물었다.


-인생이라는 거참 별 거 아닌 것 같아이렇게 소박하고 평범한 데서도 행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니 말이야.

흐흣그래너만의 행복을 찾는 게 중요하지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죽어서도 후회가 없을 거다.”

-그래고맙다저승사자이제는 진심으로니가 고마워.

하하하핫오길 잘 했구만.”

-근데너 이름이 뭐야왜 안 알려주는 건데매번 저승사자라고 부르기도 좀 그런데.

이름이 뭐가 궁금해그냥 저승사자라고 불러!”

-그래그럼이제 사자라고 부를게사자!

맘대로 해라.”


  웃기게도나는 저승사자를 친밀하게 느끼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그리고, ‘사자도 웃긴 게저승사자 주제에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이거이래도 되는 건가죽고 나면 염라대왕한테 둘 다 혼날 것 같은데그런 잡생각을 하면서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혼자 오셨나요?”

아뇨한 명 더 올겁니다.”


  나는 레스토랑 앞 대기 테이블에 앉았다오 분 쯤 지났을까계단 아래에서 가연이의 머리 꼭대기가 올라오고 있다가연이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달려온다.


주훈아기다렸어?”

아아-얼른 들어가자배고프지?”

!”


  가연이는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잘거렸다그녀는 자연스레 나에게 팔짱을 끼고내 팔뚝에 얼굴을 부볐다기분이 좋았다사랑하는 사람과의 저녁 식사소박하지만이런 게 진짜 행복이지 싶었다파스타를 먹으면서도 생긋생긋 웃는 그녀의 모습이 행복했고내가 썰어준 고기를 맛있게도 우물거리는 그녀의 입술이 행복했다어제의 우악스러운 나를 잊고오늘의 행복한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그녀의 마음이 행복했다우리는 식사를 끝내고도 두어 시간을 더 이야기했다.


자기난 자기가 일을 그만 두니까 더 좋은 것 같아.”

?”

난 자기가 자기 삶에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어매일 그렇게 주말도 없이 일만 해서버는 돈은 다 부모님께 보내드리고자기는 아무 것도 못 하고방세만 내고 밥만 겨우 먹고 그랬잖아.”

... 부모님...”

자기가 자기 자신한테 쓸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좋은 것 같아자기그 옷들 쇼핑도 하고미용실도 다녀오고그런 거지?”

아아!”


  지난 4년 동안 이렇게 빼 입고 가연이를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나는 그 사실이 또 후회스러우면서반면으로는 이제라도 가연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그나저나부모님지난 이틀간나는 부모님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내일은집에 좀 내려갔다 와야겠다.”

다녀 와어머님 아버님이랑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알았지?”

.”


  우리는 식사를 끝마치고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그녀를 집 앞까지 무사히 바래다준 나는뿌듯함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하루가 다 지나갔네오늘은어땠냐?”

-행복했어너무 좋았어.

그으래하핫니가 드디어 이 몸에게 진실로 감사함을 느끼는군.”

-그래고맙다사자!

그래서 내일은부모님 뵈러 간다고?”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욕정에 눈이 뒤집혀가지고는 빨빨대고 돌아다녔으니까 그렇지짐승 새꺄

-그 얘긴 고만 해후회한다고 했잖아.

크크크큭그래얼른 집에 들어가자드라마 봐야 돼.”


  어제와는 다르게오늘은 만족스럽게 지나간 것 같았다털레털레가 아니라따박따박 신나게 언덕을 올라 집에 들어왔다집에서는 꽃향기가 났고아무렇게나 TV 앞에 널려져 있던 소주병들과 과자 봉지들이 없어졌다바닥은 진득거리지 않았고이불도 잘 개어져 있었다. TV 위의 먼지도 한 톨이 없었다가연이가 청소를 해 놨구나.


-자기청소 너무 고마워너무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애알러븅!


  가연이에게 메시지를 남기고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웬 일이니전화를 다 하구엄마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엄마내일 집에 내려갔다 올게.”

시간이 어딨다구 집엘 내려와?”

하루 휴가 냈어그런 걱정 말구내일 아침에 출발할게엄마랑 아빠다 보고싶어.”

어이구아침부터 바쁘겠네몸 조심해서 내려와!”

엄마엄마잠깐만엄마사랑해요.”

“... 엄마두 아들 사랑해보고싶다.”


뭉클하네너 27년 살면서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한 게 몇 번이나 되냐?”

... 아마 지금이 처음일 거야.”

지금이라도 해서 다행이구만.”

이것도 니 덕인가하핫.”


  엄마와의 통화를 마치고나는 이내 양말과 바지윗옷을 다 벗었다사자도 그랬다우리는 캔 맥주 하나씩을 들고어제 못 본 드라마를 다시보기로 봤다이것도 나름 유쾌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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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시, 네이버 웹소설 연재중이에요!


오연시 : http://isseries.com/main/work_info?no=33

네이버 웹소설 : http://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151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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