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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2)
피아치 항구의 새벽은 핏빛에 싸여 피비린내 속에서 밝아왔다. 고래 한 마리가 배를 위로 한 채 항구 한쪽에 떠올랐다. 죽은 고래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와 주변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수면 위쪽으로 열린 항구의 반구형 공간 꼭대기에서 서서히 밝아오고 있는 인공태양이 그 모든 비현실적인 참혹한 광경을 점점 더 또렷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고래들의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피아치 항구는 정적에 휩싸였다. 잠수정들이 속속 떠올라 고래를 중심에 두고 멀리에서 에워쌌다. 멀리 부둣가에도 사람들이 나타났다. 잠수정 위에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이 거대하고 고귀한 생명체를 죽였는가? 세레스 지하 바다에서 다 자란 혹등고래가 살해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노래를 멈추고 침묵에 빠진 고래들뿐만 아니라 그 참극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 사람들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무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오랫동안 그렇게 죽어가는 고래를 지켜보았다.
다음날 티티우스-보데 중앙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침묵 시위를 시작했다. 광장을 둘러싼 세레스 자치정부 건물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인 영빈관을 향한 소리없는 시위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과거 인류가 지구에서 저지른 수많은 범죄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질적이고도 가장 어리석은 최악의 악행, 포경을 누군가 세레스에서 재현하려 하고 있음을 세레스인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알게 된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비극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세레스에서 포경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구 고대인들에게 웅장한 신화와 위대한 영웅의 대서사가 있었다면, 세레스인들에게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설, 고래가 있었다. 절대무와 절대고독의 공간 너머 소행성대까지 건너가 거기에 바다를 만들고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낙원을 가꾸어낸 역사는 그 장대한 규모로 보나 그 알찬 내용으로 보나 지구의 고대 신화나 전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실제로 세레스인들은 그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일군 지난 30년 동안의 위대한 시대를 세레스의 창세기라고 불렀다. 고래는 바로 그 세레스 창세기의 결말이자 절정이었다. 세레스와 세레스인 그리고 태양계의 빛나는 보석이라 할만한 세레스의 지하 바다, 더 나아가 소행성대 전체를 상징하는 토템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고래 자체가 독보적인 크기와 개성으로 몹시매력적인 생명체이긴 했지만, 티티우스-보데 시민들의 고래 사랑은 세레스 밖에서 온 외지인들 보기에는 유별난 구석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고래의 노래에 매혹당한 사람들이었다. 유리돔 도시에 인공태양이 뜨고 질 때와 정오, 그렇게 하루에 세번씩 그들은 도시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응급상황 경보 시스템을 통해 각각 다른 고래 노래를 내보냈다. 하루도 쉬지 않았고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리고 고래의 노래는 생방송이었다. 오직 그 목적을 위해서 고래 세 마리를 먼발치에서 스물 네 시간 내내 그림자처럼 따르는 수중 드론 세 대가 고정적으로 운영되었다. 어느 고래의 노래를 생방송할지는 자치정부 중앙컴퓨터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는 알고리즘에 따라 결정했다. 심지어 경보 시스템을 통해 내보는 3분 분량 이외의 노래 또는 고래의 음향 정보까지 스물 네 시간 내내 방송하는 라디오 방송 채널 세 개가 있었는데,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그 채널만 틀어놓고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고래노래 명상은 세레스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유행성 유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세레스인들이 경험한 고래 사랑의 최고봉은 고래교였다. 고래교도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 세상은 실은 거대한 한 마리의 우주 고래의 뱃속이기 십상이며, 영원을 살아오면서 자신의 기억 속에 축적해온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낸다음, 태양계보다 더 큰 자신의 고래 뇌에서 시뮬레이션하는 가상현실이야말로 백억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확신해 마지 않는 자신들의 '나'의 진상이라는, 정교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 전제-추론-증명의 작은 고리들을 한없이 이어가는 방식으로 성립되는 자연과학으로서는 참으로 공략하기 힘든 상대였다. 정교한 논리보다는 재미나는 이야기로 돌아가는 인간 뇌 특성의 한 단편이라고나 할까. 고래교는 백만 명 세레스인들 사이에서 종교가 없거나 종교를 아직 고르지 못했거나 자신의 종교를 아직 만들지 못한 혹은 그 와중에 서성이는 무종교인들 빼고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종교, 또는 이야기였다. '인생이란 어차피 한 편의 이야기 꾸미기' 란 속설이 가장 잘 들어맞는 곳이 바로 백만 덩이의 뇌가 모여 있는 세레스라고 할 수 있었다.
"칼리포 연안에 머물고 있는 귀신고래 (쇠고래-009638) 가 세레스력 34년 4월 23일에 예정대로 순산, 쇠고래-106218 태어남. 자치정부 사두위원회 축전."
"혹등고래 (흑고래-008310) 가 세레스력 34년 4월 24일, 피아치 항구에서 피살. 자치정부 해양수산부 조사 착수."
세레스 연대기에 공식 항목으로 추가된 내용이었다. 한 사람 한 고래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각자의 인생에 쌓여간다면, 세레스 전체의 역사도 이야기의 형태로 쌓아올려지고 있었다. 사람이나 고래처럼 자신만의 기억장치를 갖지 못한 왜행성 세레스의 개별적인 이야기는 인간의 오래된 기록 수단인 문자를 통해 기록되었다. 세레스인과 지구인 전체의 흥망성쇠 너머 먼 미래까지, 심지어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태양의 적성거성시대와 머나먼 빅크런치 종말의 때까지 보존되고 전달되기를 혹여 기대해 본다면 우선 정보의 양이 적으면서도 그 밀도는 높으며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기는 감도는 풍부해야 하는데, 그런 기준에 딱 들어맞는 정보 저장 형식이 바로 순수 문자이기 때문이다. 당장 표현하기에는 생생하기 그지없는 시청각과 후촉미 형식의 자료는 너무 많은 정보를 담아 전하려다 결국 아무 정보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부차적이었다.
지구에서 온 그들은 영빈관에 갇혀 있었다. 고래 살해는 고래교도가 아니라 해도 세레스인들에게는 신성모독 버금 가는 범죄였다. 혹등고래를 살해하는 현장에서 잡힌 그들은 요행을 바랄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있었다.
"대표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들의 계략에 제대로 말린 듯한데 말입니다."
2층 창문에 드리운 발을 살짝 젖히고 밖을 내다본 대머리 금무가 반팔옷이 찢어질듯 우람한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을 습관적으로 불끈거리며 몸매는 가늘고 얼굴은 희고 신경질적인 표정을 감추지 않는 박전리를 돌아다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계략은 무슨! 도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것인가? 왜 멀쩡한 고래를 잡느냐고!"
박전리는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우리가 무엇 하러 왔는지 잊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대표님. 하지만 펄떡이는 고래를 본 순간 그만 옛 버릇이 도지고 말았지 뭡니까."
"포경선 탄 게 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박전리의 나직한 말에 나머지 세 사람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일었다가 사라졌다.
"지구의 바다에 우글거리던 그 많던 야생 고래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대표님."
세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웅얼거릴 뿐이었다. 진심으로 겸연쩍어 하는 표정들이 역력했다. 하나같이 빡빡머리에 우람한 체격들인 그 사내들은 박전리 대표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터였다. 금무, 금두, 금홍 세 사람은 각각 작살꾼, 해체꾼, 추적꾼으로 인류 최후의 포경선을 탔던 사람들이었다.
"고래를 오래도록 사냥하고 싶다면 가려 가면서 잡았어야지. 씨를 말려버리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물론 자네들이 잡고 싶어 잡은 것은 아닌 줄은 아네만, 고래만 보면 눈이 돌아가서는 안 될 것이야. 우리의 큰일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이쪽 사람들에게 고래는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박전리가 작정하고 강의를 시작하는 판에 금무, 금두, 금홍 세 사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방문자가 찾아왔다.
"세레스 해양수산부 장관 쌤입니다. 박전리 대표님이시죠?"
박전리는 자기 수행원들과 덩치에서 밀릴 것 같지 않은 상대와 엉겁결에 악수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재빨리 스캔하듯 살피며 어떤 단서라도 찾아낼 궁리를 했다.
"세레스 자치 정부는 우리를 언제까지 가둬둘 생각이시오? 고래 백만 마리 가운데 고작 한 마리 잡은 걸 가지고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소. 우리가 이번에 선물로 가져온 고래가 백 마리나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빨리 망각한 것은 아닙니까?"
적반하장에 쌤 장관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 되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박전리를 건너다 보았다. 세 덩치에 비하자면 가냘프기 그지 없고 그보다는 한참 연장자로 보이는 사내였지만 강력범치고는 너무나 뻔뻔하고 뻣뻣한 태도로 나왔다.
"고래를 잡았다? 고래를 살해한 게 아니고? 대표님은 고래 토템이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바로 우리 세레스인들이 고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바로 그 고래를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살해했잖습니까. 세레스 정부의 재판 절차를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만 알아두십시오."
쌤의 말에 박전리와 세 사람은 태연한 척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지구에서처럼 몸을 뒤척였는데, 세레스의 미약한 중력은 그런 작은 움직임조차 잡아주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손과 발을 단속적으로 움직이는 우스꽝스러움을 연출하고 말았다.
"우리 (주)새우는 지난 30년 동안 세레스 복원 사업에 엄청난 후원을 한 회사입니다. 이번에도 특별히 이빨고래 이식까지 지원하러 오는 등 이날 입때까지 한번도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 기억해주시오."
박전리는 대화가 진행될수록 안정과 자신감을 되찾아갔다. 새우주식회사는 백억을 넘어서고 있는 인류에게 단백질을 공급하겠다는 야심찬 광고 마케팅을 펼치는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태양계 최대의 종자회사, 식품회사, 포장육회사였다. 지구 정부의 세레스 재개발 사업에 일개 사기업이 발벗고 나설 때부터 항간에는 지구 정부 내 세레스 복원위원회는 (주)새우의 대리인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모종의 음모론까지 그럴듯하게 더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30년 전 일이었다.
"혹등고래를 우리가 잡았다고 단정하다니 말이 됩니까. 이빨고래의 소행일 수도.."
"그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가?"
빡빡머리 금무의 말을 박전리는 싹둑 잘라버리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쌤이 그 방에 들어선 이후 처음 보는 흥분한 모습의 박전리였다. 쌤은 30년 전에 소문처럼 나돌았던 음모론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고 마음먹었다.
빨라야 2년, 어떤 경우에는 5년에 겨우 새끼 한 마리씩 낳는, 특히 덩치 큰 수염고래들의 낮은 출산율을 고려하여 새끼 고래들에게 위협이 될만한 요인들은 철저하게 관리해온 게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이빨고래와 상어류 도입은 최대한 늦춘다는 게 세레스 해양수산부의 기본 정책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역시 지구의 바다에 야생 고래들이 넘쳐나던 풍요와 번성의 시기에도 이빨고래는 늘 거기에 있었던 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지라, 결국 세레스에도 이빨고래를 이식해야 하지 않겠느냔 의견이 나오던 차에 지구 정부의 공식 사절단도 아닌 (주)새우의 인물들이 지구 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이빨고래 백여 마리와 함께 세레스에 나타났다. 그것도 덩치가 작은 돌고래와 덩치는 크지만 오징어를 주 먹잇감으로 삼는 향유고래 대신 덩치 큰 고래들까지 공격하는 범고래 위주의 구성이었다. 새끼 고래가 잡아먹힐 수 있는 상황의 변화에 세레스 여론은 들끓었다.
"이제 멸종의 위험을 완전히 벗어났으니 고래들에게도 균형이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은 생태계 자체적인 균형유지 과정의 하나이기도 하니, 우리 인간들의 간섭은 최소화하는 게 정답이겠고요. 그래서 범고래들도 새끼 대신 바로 대형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는 성체들 위주로 데리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레스에 도착하자마자 박전리가 비공개된 자리에서 했던 말인데, 해양수산부 장관인 쌤으로서도 그땐 그러려니 했던 터였다.
역사책에나 나오는 줄만 알았던 사두위원회가 직접 참석하는 행사라서 그런지 티티우스-보데 중앙 광장에 있는 세레스 역사박물관 앞에는 행사장에 입장하지 못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심지어 공중에도 드론 허리띠를 찬 사람들이 까맣게 떠올라 박물관은 난데없는 새떼의 침공을 받은 모양새가 되었다. 이미 모든 정부 직책을 내려놓고 은퇴한 구대, 새미, 윈징, 순야 네 사람은 여전히 사두위원회라고 불리우며 세레스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세레스 자치 정부가 완비된 지금은 그 권한이 별로 크지 않은 명예기관이 된 사두위원회의 사두에는 1대 구대, 새미, 윈징, 순야에서 그들의 증손자로 구성된 3대 구정, 쌤, 윈핑, 순야타로 넘어와 있었다.
"위대한 삶이었습니다.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역사박물관에 안치하여 그 이름을 영원히 기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비록 이곳에 오면 늘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는 있겠지만 무수한 후학들을 몸소 이끌고 가르치던 살아숨쉬는 현장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아픈 것 또한 어쩔 수 없네요. 모든 세레스인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
세레스 자치 정부 수반, 겐지 총독의 헌사가 끝나면서 역사박물관의 드높은 중앙 홀 공간에 길고 우람하게 드리워져 있던 펼침막이 몇 조각으로 나뉘어져 천정쪽으로 빨려들어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쇠고래-000001!"
거기에는 길이 17미터 무게 40톤에 이르는 전설적인 귀신고래가 있었다. 수면 밖으로 고래뛰기하는 힘찬 모습이었다. 중앙 홀 안쪽에 있는 수천 명과 박물관 바깥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이 내는 박수와 환호 소리가 유리돔 안에서 한참 동안 메아리쳤다.
크고 작은 물고기들까지 세레스 지하 바다의 조성과 복원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 이루어진 고래 이식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물고기들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압도적인 크기와 무게를 가진 고래를 어떻게 그 머나먼 지구에서 세레스까지 수송할 것이냐는 게 첫번째 문제였다. 지표면에서 지구 궤도까지는 나노 섬유 케이블로 건설되어 있는 우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최소한의 물과 공간만을 갖는 우주선으로도 고래를 장기간 운반할 수 있는, 신진대사 최소화를 가능하게 하는 저체온 기술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한두 마리도 아니고 한 종에 수십마리씩 모두 수백 마리를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소행성대 궤도까지 수송하기는 기술적인 도전은 아닐지몰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크나 큰 경제적인 도전이었다. 그 해답은 다 자란 성체 대신 새끼 고래들을 이식하자는 대안이었다. 하지만 그 해답은 곧바로 고래 이식의 두번째 문제로 이어졌다.
고래는 몸집만 큰 게 아니라 지능 또한 다른 바다 생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리하여, 계절 따라 대양을 종횡하는 회유, 복잡다난한 짝짓기,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육아, 대량 먹이획득 방법, 그리고 인간들의 고대 대서사시 못지 않은 내용과 형식의 고래 노래로 상징되는 그들만의 소통 능력 등등, 본능 차원에서는 세대 간에 전수될 수 없는 복잡도의 고래 문화, 또는 적어도 '밈'이라 부를 수 있는 문화적인 요소를 무시하고서는 고래가 고래를 낳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새끼 고래들만 세레스 바다 속 멸치떼 속에 떨어뜨려 놓고 어엿한 성체 고래로 성장하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새끼 고래는 성체 고래가 아니라 늑대 무리 속에서 자란 늑대소년처럼 고래 크기의 멸치가 될 공산이 컸다.
어미 고래 로봇. 세레스 복원위원회가 찾은 두번째 난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키와 몸무게 제한 때문에 엄마 고래를 유원지 롤러코스터에 태울 수 없다면 아기 고래를 대신 돌볼 능력을 갖춘 엄마 고래 로봇을 태우자는 것이었다. 쇠고래-000001은 로봇 귀신고래였다. 겉으로는 새끼 고래들도 속을 만큼 크고 아늑하고 따뜻했으며, 안으로는 어미 귀신고래의 행동과 반응 특성 연구 수천 건의 결과를 고스란히 체현하여 새끼 고래들을 훌륭하게 키워낼 만큼 지혜로운 인공지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새끼 수십 마리를 한꺼번에 이끌며 기를 수 있는 넉넉한 용량을 가진 어미 고래 로봇은, 한 배에 새끼 한 마리나 두 마리만 낳아 기르는 진짜 어미 고래보다 조금은 차가울지 몰라도 훨씬 더 강한 체력과 인내심, 분신술, 분심술을 가진 셈이었다. 그리고 지구의 바다와는 여전히 많은 면에서 다른 세레스의 바다 환경에 맞게 밈의 편집과 프로그래밍도 가능했기에, 적어도 세레스 지하 바다에 최적화된 제1호 어미 고래로서는 완벽했다.
그것은 알파 고래의 죽음이나 장례식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퇴역식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자리였다. 첫 배 새끼들이 어미가 될 때까지 몇 대에 걸쳐 무수한 새끼 고래를 키워낸 어미 고래, 할미 고래로서의 공로도 컸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고래 문화의 밈, 고래들의 정신세계를 후대에 전하여, 뇌보다는 문자와 기계와 같은 외부 기억장치의 힘을 빈 인간의 기록문화에 버금 가는, 수십만 년 동안 무수한 고래의 뇌에 켜켜이 쌓아왔던 그 방대한 기억문화를 보존하였다가 후대 새끼 고래들의 믿음직한 기억영역에 고스란히 전해준 점은 전 우주적인 중요성을 띤 대사건이라 할 만했다. 만약 고래가 그대로 멸종되었다면 그 소중한 지구의 유산, 그 엄청한 데이터베이스, 그 우아한 거대 생명체의 빅데이터가 이 현세 우주에서 영원히 소멸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겐지 총독의 옆자리에는 박전리 대표 일행이 지구특사 자격으로 앉아 있었다.
세레스의 바다는 그 전체 부피에 있어서는 지구의 대서양에 필적하긴 했지만, 수천만 평방 킬로미터 넓이에 비해 평균 깊이는 4 킬로미터 남짓으로 전체적으로 보면 얇게 퍼져 있는 대서양과는 달리, 세레스의 중심핵과 지각 사이 두께 백 킬로미터의 두툼한 맨틀 부분을 채우고 있어 전체적으로 본다면 중심이 빈 커다란 물의 공이나 껍질이 두꺼운 비눗방울 같은 형상이었다. 그렇게 평면적인 지구의 바다에 비해 둥글게 뭉쳐놓은 물의 공처럼 다분히 입체적인 세레스의 바다도 실은 지각과 중심핵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둥과 벽 구조물로 인해, 그리고 인공해류의 흐름과 인공태양등의 위치와 출력에 따라 실질적으로는 4 킬로미터 정도의 두께로 얇게 층층이 나뉘어져 있었다. 세레스의 바다에 사는 물고기나 고래의 입장에서 보면 세레스 지하 바다의 실질적인 넓이와 깊이의 느낌은 지구의 바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레스에 이식된 고래들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바다, 모든 생명체들이 꿈꾸던 낙원에 그 커다란 덩치와 지능을 가진 고래들에게 천적이 없었다. 세레스 바다에 도입된 고래는 거의 다 수염고래여서 주로 크릴과 새우 등 갑각류와 같은 작은 먹이로만 살았고 큰 먹이라고 해봐야 작은 물고기와 오징어 정도여서 그들 고래 주변에서는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질 일이 없었다. 물고기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세레스 바다가 말 그대로 물 반 고기 반이 되고 나서 도입된 돌고래는 비록 이빨고래라고는 하지만 갓 태어난 새끼 수염고래에게도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점잖은 바다의 신사였다. 돌고래는 애초부터 대왕고래, 참고래, 귀신고래, 혹등고래등 대형 수염고래들과는 먹이를 다투지 않는 평화로운 관계이기도 했다.
그러던 세레스의 바다에 본격적으로 이빨고래가 도입되었다. 바로 박전리 대표가 이끄는 지구 특사의 선물이자 작품이었다. 대형 이빨고래인 범고래와 향유고래를 생태계 역사가 일천한 세레스의 바다에 굳이 그토록 성급하게 도입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는 지구 정부 산하 세레스 복원위원회와 지구의 무수한 해양생태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세레스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빨고래는 세레스 바다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최상위 포식자입니다. 세레스 바다의 폭발적인 풍요로움으로 볼 때 어쩌면 이빨고래만으로는 역부족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빨고래 도입에 대한 찬반 논쟁이 춘추전국시대를 방불할 때 조용히 치고 들어온 게 바로 새우주식회사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유전자 조작 식물과 유전자 조작 동물로 지구 생태계를 말도 못하게 교란했던 대표적인 문제 기업이었다. 짜깁기한 누더기 유전자들로 지구 생태계 전체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오염시킨 장본인이었다. 핵방사능, 인공화학물질, 조작 유전자라는 인류가 만들어낸 치명적인 3대 오염원 가운데 하나였던 그들이 갑자기 유전자 다양성을 부르짖고 생태계의 건강성을 외치고 나온 꼴이었다.
"지구 정부가 세레스 복원 사업을 입안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주)새우가 가장 큰 후원자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거야. 그들이 자선사업가일 리가 없거든."
"설마 세레스까지 조작 유전자로 오염시키려는 건 아니겠지."
"난데없이 이빨고래 타령을 하는 꿍꿍이 속을 모르겠단 말이지."
혹등고래의 죽음과 지구특사에 대한 처리를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사두위원회 자리에서 주제는 당연히 (주)새우의 기묘한 행보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고래고기야. 틀림없어."
구대의 말뜻을 새미, 윈징, 순야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고래고기,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단어의 조합이었다. 특히 고래를 토템으로 떠받드는 세레스에서 입술에 올려 말하고 귀를 열어 듣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낱말들이었다. 세 사람은 손으로 자신들의 입과 귀를 막을 태세였다.
"설마 그들이 그토록 대담하겠어? 게다가 지구도 아니고 세레스까지 와서?"
"일단 그림이 예쁘지 않아. 피 웅덩이 속 토막 해체, 과연 22세기의 지구인들의 눈동자와 심장과 비위가 그토록 적나라하고 충격적인 그림을 견뎌낼 수 있을까?"
윈징의 말에 순야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아니, 그렇다면 여러가지 수수께끼 같은 조각들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새미는 뼈만 앙상한 손가락을 얇은 입술에 댄 채 말했다.
"그들은 오로지 돈만 쫓는 기업이지. 그런 그들이 정부의 세레스 복원 사업에 뜬금없이 막대한 돈을 풀었다는 것은 사냥개 돈을 풀어 여우 돈을 사냥하자는 속셈이고."
"세레스에 이빨고래를 풀겠다는 것은 이빨고래의 날카로운 이빨로 수염고래의 살덩이를 뭉텅이로 물어뜯어내겠다는 뜻이겠고."
"세레스 바다 생태계의 건강성을 지키기 위해 이빨고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한 것은 부실한 이빨로도 우주 최강의 식욕을 자랑하는 우리 인간들을 끌어들이자는 얘기겠지."
새미의 말뜻을 윈징과 순야는 금방 알아들었다. 세 사람은 구대를 쳐다보았다.
"부끄럽지만 내가 한때 미식가랍시고 고래고기에 탐닉해봤잖아. 고래고기에는 확실히 불가사의한 중독성이 있지. 맛은 뭐 특별하달 것도 없지만, 지구에서 키워낸 최대의 생명체를 먹는다는, 그 거대한 크기와 힘과 생명력과 우아함을 내 안으로 흡수한다는 일종의 신내림 같은 느낌이랄까. (주)새우는 소위 식품, 식량, 먹거리를 통해 돈을 버는 기업이고, 인간의 식욕이란 괴물은 오욕칠정과 끈적끈적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 어떠한 자극이라도 결국 식욕으로 전환시킬 수 있단 말이지. 자극이 괴이하고 희한할수록 식욕은 더 커지고 더 지독한, 무한증식과 자가증식을 반복하는 괴물이 되고 말지. 몸의 위아래뿐 아니라 마음의 안팎을 동시에 자극하는 고래고기, 충분히 구미가 당기겠지."
구대는 고래를 먹었다는 죄의식과 (주)새우의 의심스러운 행보에 대한 우려의 빛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네 사람은 즉시 겐지 총독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세레스인의 영웅이자 원로인 사두위원회에 대한 총독의 태도는 깍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면담은 즉각 받아들여졌고, 비록 총독 관저와 같이 티티우스-보데 중앙 광장에 있는 곳이긴 했지만 총독 자신이 사두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장소로 직접 찾아왔다. 면담 신청 시점에서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 겐지 총독은 공손하게 사두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지구특사라는 자들 말이오. 그 자들이 이번에 혹등고래를 살해했다는 게 사실이오?"
구대가 총독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사두위원회와 겐지 총독의 사이는 원만한 편이었다. 그 대부분은 인간 자석이라 불리우는 겐지 총독의 공이었지만 말이다. 이번 만남에서는 사안도 사안이었지만, 귀신고래-000001 퇴역식에서 지구 특사를 자신과 나란히 앉히고 유난히 살갑게 대했던 광경을 기억하고 있는 구대의 말소리는 건조한 공식적인 어조에다가 살짝 추궁하는 어투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겐지 총독은 구대의 차가운 기색에도 불구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구대와 네 사람 쪽을 향해 상체를 약간 기울인 채 말을 시작했다. 원로들을 다루는 겐지 총독의 화려한 초식이 현란하게 펼쳐졌다. 포경선 선원 출신인 특사 세 사람의 혹등고래 살해는 범고래의 짓으로 어물쩍 넘어갔고 이빨고래의 세레스 이식은 신속하게 이해되었다.
겐지 총독은 박전리 한 사람만을 총독 관저로 불렀다. 지구 정부가 보낸 특사라면 세레스 정부의 수반으로서 최선을 다해 대접해야 하는 상대였지만, 혹등고래 살해 이후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세레스인들의 일반적인 정서 그대로 밀어붙여 푸대접을 하거나 어떤 불상사가 발생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세레스인들에게 네 사람은 무려 고래를 살해한 중범죄인들이었지만 특히 총독 자신에게는 그들이 지구 특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박전리 대표님,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총독은 자신의 집무실에 갑자기 불려와 불안과 도도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박전리에게 왼손을 들어 집무실 왼쪽 벽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몸짓은 위압적이었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는 상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박전리의 불안은 자신의 반응을 총독의 몸짓 언어에 맞추어야 할지 말과 표정에 맞추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총독의 몸짓은 크고 강했지만 말과 얼굴은 작고 부드러웠다.
"세레스의 고대 유적입니까? 아, 그럴 리는 없겠고, 선사시대 지구 유적이겠군요."
박전리는 총독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벽면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비 10 미터 높이 6 미터 벽면 가득 그려진 수많은 동물들이었다. 동물들은 투박한 듯하면서 생동감이 넘쳐 흘러 금방이라도 갇혀 있는 납작한 벽을 뛰쳐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 작품이지요. 저 많은 동물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은 동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고래입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한반도 선사시대의 암각화 유적 탁본이 왜 제 방에 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겐지 총독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박전리는 총독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감당할 수 없어 벽에 그려진 고래들만 쳐다보았다. 그림 속에서도 동물들, 그 가운데 고래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가장 큰 고래는 길이가 거의 1미터에 이르는 넉넉한 덩치로 그 특징이 상세하게 묘사된 반면 인간은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가느다란 선 서너 개로 대충 그려져 있었다.
"저 뾰족하고 가냘픈 선들이 이 거대한 유선형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때까지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끊임없이 흔들리던 박전리의 눈이 총독의 말에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 존재감 공허한 가는 선들은 인간, 그것도 긴 창 또는 작살을 든 사냥꾼 같아 보였다. 바로 선사시대 인간들이 고래를 사냥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림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순간, 마치 총독 집무실이 통채로 선사시대로 순간이동한 것처럼 집채만한 고래의 느리고 거대한 몸부림과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 없는 피라냐 떼 같은 고래사냥꾼들의 악착같고 영민한 움직임이 한 덩어리가 되어 그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온몸을 진동시키는 고래의 울부짖음과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파도와 그 공간 전체에 가득찬 피비린내가 그의 오감을 폭격했다.
"고래사냥이군요. 선사시대 때부터 우리 인류는 고래를 잡아먹어왔던 것입니다."
박전리는 가장 큰 고래 위에 올려놓았던 손바닥을 석고판 벽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돌아서서 총독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반짝였고 태도는 확실하게 불안에서 도도 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총독께선 이미 우리쪽 사람이신가요?"
"너무 앞서 가시는군요. (주)새우가 그렇게 대단한 회사입니까? 그래봐야 일개 기업에 불과하지 않나요. 나는 시스템 공학자일 뿐입니다. 세레스인들이 고래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도 없고 지구인들이 태양계 최대 기업에 대해 갖고 있을지 모르는 환상도 없는 편이죠. 하지만 늘 코앞에 있는 세레스의 고래가 태양 너머까지 멀어지기도 하는 지구의 기업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감을 갖는 곳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있지요. 다만 개인적으로 이빨고래와 세레스 바다의 균형 등등의 논리에 동감하는 편입니다. 세레스의 총독으로서 (주)새우의 솔직한 사업계획을 감정의 동요 없이 들어볼 수 있다는 뜻이죠."
총독의 말에 박전리는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듯 총독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순간적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미사여구 같은 기름기는 다 뺀 담백하고 솔직한 사업계획을 들어볼까요. 나는 고래에 대한 지나친 감상도 싫어하지만 기업의 위선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총독은 자신의 무심한 손을 상대의 열렬한 손아귀에서 되찾아오며 말했다.
"고래사냥과 고래고기 유통, 두 가지입니다. 저 선사시대 암각화에 잘 기록되어 있듯이 고래는 인류에겐 오래된 사냥감이자 음식입니다. 물론 20세기의 야만으로 되돌아가자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도 지속가능한 사업을 하고 싶지, 한꺼번에 다 때려먹어치워버리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습니다. 수천 년 넘게 이어온 전통의 보존, 그것은 민속학자나 인류학자에겐 중대한 일이겠지만 우리에겐 부차적이죠. 우리 입장에서는, 인류를 먹여살리는.. 아, 인류를 상대로 돈을 버는, 글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고래고기 사업을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이어가자는 것입니다."
박전리의 적나라한 화법은 총독의 마음에 꼭 들었다. 돈으로 최적화된 장사꾼과 시스템 공학으로 최적화된 시스템 관리자 또는 정치인의 내면이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었다.
"이빨고래가 세레스 바다의 건강성을 높여줄 거라는 논리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세레스 자치 정부가 무엇을 도와주기 원합니까?"
"수염고래를 잡아먹을 수 있는 포식자에 이빨고래에 이어 인간까지 넣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래고기에 대한 지속적인 교육과 노출이 중요합니다. 전통이자 필수 식량자원이란 인식을 대중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다분히 감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세레스 현행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그래야 고래고기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까지 획득할 수 있으니까요. 합법성만으로 부족해요. 사람은 머리만으로 이해해서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라는 것,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정당성이 곧바로 전면적인 포경 허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요. 법과 도덕이 아무리 허락한다 해도 고래사냥 장면이 여과없이 노출될 경우, (주)새우는 물론이고 세레스 자치 정부도 여론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말씀하셨듯이 인간은 결국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으로 생각하는 존재이니까요. 무슨 대책이라도 있으신가요?"
"일단 인간의 포식자 지정을 해결해 주시고 나머지는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당연히 세레스인들에게 고래사냥 장면을 광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세레스인들에게 고래고기 소비를 권장할 생각도 없구요. 그리고, 저희들에 대한 재판도 도와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삼라만상, 세상만사는 유체역학을 따르면 가장 좋을 터였다. 박전리를 돌려보낸 겐지 총독은 집무실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상상했다. 세레스 지하 바다에 해류가 흐르듯, 지구에서 소행성대까지 우주공간을 통해서까지 인류가 흐르듯, 고래고기도 인류를 따라, 사람의 식도와 위와 창자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막힘없이 물 흐르듯. (주)새우로 대표되는 막강한 흐름 유발자가 저수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데, 저수지의 둑을 한 없이 높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터지기 전에 흘려보내야 한다.
스무 마리가 넘는 범고래 무리가 잠수정을 뒤따르고 있었다. 잠수정은 고래들이 숨쉴 수 있도록 지각과 맨틀 기둥과 벽 속에 점점이 박혀 있는 기포의 포구들을 한 줄로 주욱 꿴 항로를 따라갔다. 다행히 세레스의 지각에는 그와 같은 천연 기포가 무수히 많았다. 게다가 고래를 본격적으로 이식하면서 곳곳에 인공 기포들을 더 만들었기 때문에 고래들 입장에서는 대기와 바로 접하는 해수면을 가진 지구의 바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범고래 무리는 다 새끼들이었다. 어미 범고래는 단 한 마리였다. 어미 범고래는 잠수정을 따르고 새끼들은 어미를 따라 세레스의 지하 바다를 빠르게 헤엄치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박전리는 그 모습을 수중 레이더 화면으로 보며 흐뭇한 마음에 미소가 절로 났다. 겐지 총독과의 회담도 만족스러웠으므로 그야말로 날아갈 듯한 기분에, 수행원 셋을 이끌고 보란듯이 고래사냥에 나서는 길이었다.
그들의 잠수정을 따라올 줄 아는 어미 범고래는 물론 로봇이었다. 박전리가 몸에 지니고 있는 고래접속기와 로봇 범고래가 교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범고래 로봇의 세세한 움직임을 조종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의 것 빼고는 가장 복잡한 고래 밈으로 새끼를 양육할 정도로 높은 인공지능과 유사 자의식까지 갖춘 존재를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슈퍼컴퓨터의 단말기로서 작동하는 고래접속기는 고래노래를 통해 일반 고래와 직접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주요 기능은 고래 로봇에 접속하여 진퇴와 공수와 같이 큰 틀의 행동양식으로 이끌기였다. 마치 여왕물질 페로몬을 분비하는 여왕벌처럼 무리를 이끄는 고래 로봇의 미세한 행동양식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고래 무리의 항로 조종은 물론이고 특정 목표에 대한 공격 명령까지 가능했다. 간단히 말해 어미 범고래 로봇을 고래사냥에 나서게 할 수 있었다. 다른 고래를 공격하고 잡아먹는 행동은 범고래 무리의 일상이기 때문에 새끼들을 양육하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미 어미 범고래 로봇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박전리의 잠수정은 범고래 무리를 이끌고 피아치 항구처럼 보는 눈이 많지 않은 작은 기포 포구로 향했다. 나서기 전에 미리 정해둔 곳으로 밍크 고래들의 주요 서식지 가운데 하나였다. 한껏 부풀어 오른 들뜬 기분의 크기로 친다면 대왕고래라도 잡아 총독 관저 앞에 던져놓고 겐지 총독이 기겁하는 모습을 보고도 싶었지만 범고래 무리, 특히 어미 범고래 로봇의 고래사냥 능력을 시험하는 터라 크기가 작은 밍크고래를 잡기로 결정했다.
"혹등고래 잡을 때처럼 자네들이 나설 필요는 없네. 세레스 바다에서의 첫 고래사냥이라고 눈이 뒤집혀가지고 말이야. 이번에 또다시 현장을 잡힌다면 겐지 총독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작살 들고 나설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박전리가 말했다. 금무, 금두, 금홍 세 사람은 아쉬워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 작은 포구의 수면으로 부상하고 있는 잠수정의 앞쪽에 밍크고래 무리가 보였다. 그 순간 뒤따라오던 범고래 무리들이 잠수정을 앞질러 치고나가며 사냥을 시작했다. 박전리가 고래접속기를 조작할 필요도 없이, 어미 범고래 로봇이 새끼들에게 사냥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래노래를 통한 무리의 유기적인 사냥으로 유명한 범고래답게 공격은 조직적이었고 신속했다. 다만 결정적인 물어뜯기 공격은 어미 범고래 로봇의 몫이었다. 밍크고래 세 마리가 범고래 떼의 저녁식사가 되었다.
"총독이 설마 저 뼈를 찾아내서 우리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아니겠지요."
팔뚝 근육을 씰룩대며 고래사냥 장면을 보고 있던 금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영빈관에 갇혔던 맛이 좋을 리 없었다. 다시 적발되면 진짜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고 박전리가 엄포를 놓은 탓이기도 했다. 금두와 금홍도 똑같은 생각인 듯했다.
"수면 위에 떠오르지도 않은 고래에게 우리가 무슨 수로 작살을 꽂는단 말이야."
"우리는 이렇게 얌전하게 잠수정 안에서 구경만 하고 있잖아. 범고래를 잡아 넣진 못하겠지."
세 사람이 말하는 사이에 범고래 무리는 포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박전리가 고래접속기를 꺼서 어미 범고래 로봇으로 하여금 무리를 자유롭게 이끌고 나가도록 했던 참이었다. 포구 얕은 곳으로 흩어졌던 밍크고래들이 평온을 되찾고 수면에 떠 있는 잠수정 근처까지 헤엄쳐 돌아다녔다.
"저 큰 덩치를 작은 고래라고 부른다니 대단하구만."
박전리는 잠수정 바로 옆에서 자맥질을 하며 잠수정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는 밍크고래를 손가락질하며 세 사람에게 말했다. 그들은 박전리가 밍크고래를 보면서 대왕고래까지 잡아서 태양계 전체에 고래고기 유통망을 건설하는 즐거운 상상중이라는 사실까지 알 수는 없었다. 물론 범고래가 아무리 지구 바다의 최상위 포식자라고 하더라도 대왕고래나 큰고래, 참고래 같은 대형 고래들을 밍크고래 잡아먹듯 할 수는 없었다.
"어미 범고래 로봇, 대단하지 않아. 딱 한번 물어뜯었는데 밍크고래 옆구리가 뻥 뚫렸잖아. 자네들 작살질은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고 봐야겠지. 저런 고래 로봇만으로 한 무리를 구성한다면 대왕고래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걸. 범고래 로봇 포경, 정말 대단해!"
박전리는 계속 떠들었다. 매를 날려 꿩을 잡는 매사냥이나 사냥개를 풀어 여우를 잡는 여우사냥이라도 나온 듯 들떠 있었다. 금무 등 세 사람이 작살 얘기에 심드렁한 표정들을 지었지만 평소 눈치 9단 정치 9단이란 그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세레스에 대한 (주)새우의 30년 투자가 드디어 대왕고래 크기로 회수될 참이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판정은 세레스에서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검사와 변호사뿐 아니라 배심원과 재판부와 방청인까지 크게는 지구와 세레스, 작게는 (주)새우의 고래사냥 지지와 세레스인들의 고래사냥 반대 두 진영으로 찢어지고 엇갈리는 장면이 고스란히 지구까지 생방송되고 있었다.
피고석에는 박전리 일행이, 원고석에는 반구정, 쌤, 윈핑, 순야타 신사두가, 그리고 9인 재판부의 중앙에는 총독이 앉아 있었다. 석 달째로 넘어가고 있는 재판은 밀리미터 만큼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피고와 원고측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고 배심원은 결론을 내지 못했으며 재판부까지 정확하게 반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세레스인이 대부분인 방청석은 압도적으로 고래사냥 반대 진영에 속했지만, 세레스 소송법 아래에서는 지구의 수많은 생방송 시청자들과 마찬가지로 재판 진행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원고와 피고, 양측의 날선 공방에 약간의 배경 잡음이나 음향 효과를 더하는 정도라고 어느 현장 기자가 평가할 정도였다.
"지구에서 멸절당한 고래는 그 기나긴 죽음의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세레스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잡았습니다. 고래의 죽음 여행의 출발지점에는 우리 인류가 놓여 있습니다.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진실인데 피고는 이같은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제1의 고래살륙터 지구도 모자라 이 머나먼 곳, 세레스까지 뒤쫓아와서 손수 고래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것도 작살로 잔인하게 말입니다. 세레스를 저들이 활개치는 제2의 고래살륙터로 만들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 세레스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대왕고래 중에는 저희 증조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개체도 있습니다. 대왕고래의 수명이 2백 년이라는데 그런 고래를 잡아먹겠다니 수백 수천 년 묵은 신령한 고목을 도끼로 찍어넘기고 쪼개서 땔나무 장작 만들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사람이 고래를 먹겠다니 오척단구가 그 크기가 수천 리라는 '곤'을 먹고 '붕'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꼴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파괴하기에는 지구 아니라 태양계도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손으로 건설하기에는 개미는 고사하고 박테리아 한 마리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산 고래 먹어치우고 죽은 짚신벌레 한 마리도 내놓지 못하는 주제파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래는 거대한 고깃덩이가 아닙니다. 고래는 수억 년 동안 조상 고래 수억 마리가 지구의 바다를 종횡하며 축적한 지구와 바다와 생명에 대한 빅데이터가 담겨 있는 큰 그릇이며 기억 덩어리입니다. 태양계 전체를 통틀어도 그만큼 소중한 보물을 찾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원고측 대표로서 윈핑이 최후진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방청석은 들썩였고 배심원들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총독은 시종 무표정이었다. 피고측 대표 박전리 특사가 일어서서 재판부를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할 때에도 총독은 무반응이었다. 그런 총독을 한번 더 재빠른 눈으로 훑어본 다음 박전리가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이 자리에서 소행성대 최대 천체 세레스를 '바다를 품은 진주' 로 탈바꿈시킨 세레스인들께 지구 정부를 대표하여 경의를 표합니다. 지구에서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인 깨끗하고 아름답고 풍요로운 바다를, 그것도 30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이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절대 허공 속에 건설해낸 사두위원회과 그 후예들께 존경과 사랑을 바칩니다. 무엇보다도 야생에서 멸종된 채 각국 정부 국가 직영 동물원과 수족관에 갇혀 고작 국위나 선양하는 국가 애완동물로 전락해버렸던 고래들에게 세레스 지하 바다, 그리고 그들에게 바쳐 마땅한 위엄과 신비를 되돌려 준 쾌거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필설로 다 그려낼 수 없는 제 자신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박전리는 말을 멈추고 재판부와 배심원과 원고석과 방청석을 향해 장중하게 하나하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고래살해죄로 법정에 선 피고인의 최후진술이 아니라 세레스 자치 정부 건국 2백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지구 특사의 축사 같았다. 박전리는 또다시 총독을 훔쳐본 다음 진술을 이어갔다.
"지구 정부와 지구인들은 세레스 자치 정부와 세레스인 그리고 바다의 우아한 거대친구, 고래 종족이 영원하기를 기원합니다. 다만 생태계의 항상성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싶습니다. 무수한 크고 작은 구성요소들이 사방팔방으로 가지를 치고 안팎으로 뒤얽히며 부분부분뿐 아니라 전체에 이르는 수많은 단계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 있는 거대복잡계를 구성하는 생태계는 이를테면 모서리 1천 킬로미터짜리 강철 육면체가 아닙니다. 살아서 꼬불거리는 구멍으로 절반의 질량이 없어져버린 구멍 투성이 치즈 덩이이며 무수한 가닥으로 생겨나 뻗고 없어지며 얽히고 설키는 커다란 그물입니다. 생태계는 역동적인 평형 상태를 유지하는 살아 있는 시스템입니다. 현재의 세레스 바다는 역동적인 평형 상태에 놓여 있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테리아 한 마리 살지 않던 증류수 또는 광천수 바다에 무수한 생명체들이 이식되고 번식하더니 이제는 고래만 백만 마리가 우글대고 있습니다. 이런 폭발적인 상황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을까요? 과연 바람직할까요? 세레스의 바다는 이빨고래를 비롯한 포식자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빨고래의 서식 밀도가 적정치에 이를 때까지 인류가 포식자 집단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박전리가 숨을 고르는 동안 법정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총독과 눈을 마주치고 나서 승리를 예감할 수 있었다. 윈핑을 비롯한 신사두의 표정에서도 그는 자신의 승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잘 보존해서 후손에 전달해야 하는 밈은 고래들에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류도 밈을 갖고 있습니다. 45억 년 지구 역사가 만들고 생태계 최강의 정보처리장치인 우리의 뇌가 집적하고 편집한 소중한 기억들일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 양은 고래보다 훨씬 더 많은 편입니다. 신석기시대부터 해온 고래사냥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밈만 보존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과 고래, 고래와 인간의 밈들을 하나도 잃지버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백만 명의 인간과 백만 마리의 고래, 두 종족의 연합국가인 세레스에서는 더더욱.."
박전리는 자리에 앉았다.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지구 특사가 세레스를 떠나기 전 영빈관에서 베푼 만찬에는 구사두와 신사두 그리고 겐지 총독이 초대되었다. 박전리 대표의 밝은 표정은 초대받은 사람들에겐뜻밖이었다. 금무, 금두, 금홍 세 사람은 무려 나비 넥타이를 매고 웨이터를 자처하고 있었다. 절반의 성공이라고 자축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거의 완벽한 패배였기 때문이다.
고래에 대한 인류의 포식자 자격 인정.
인류 밈 보전 차원에서 고래사냥 전면 허용.
지구 특사 일행의 혹등고래 살해 무혐의.
표면적으로는 지구 정부와 박전리 특사, 아니 (주)새우의 완벽한 승리였지만, 그 이면은 딴판이었다. 고래사냥 전면 허용에는 조건이 있었다. 고래의 멸절로 이어진 20세기의 기계적인 포경방식은 보존되어야 할 인류의 밈 또는 전통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따라서 고래사냥은 신석기시대 조상들의 방식으로만 허용되었다. 그런데도 박전리는 희색만면이다. 구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세레스를 위하여! 지구를 위하여!"
박전리가 건배를 제안했다. 구대는 여전히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앞에 놓인 접시에서 얇게 썬 붉으스름한 고기 한점을 입에 넣었다. 순간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뱃속 깊은 데서 30년 묵은 구토가 시작되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