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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밤거리를 메웠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스산한 골목. 어지간히 담력이 있지 않고서야 함부로 지나다니기 힘든 길이었다. 골몰의 중앙 껌뻑거리는 가로등 아래 검은 우비를 입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사내가 담배를 빨아들이자 담뱃불이 치직거리며 빨갛게 타올랐다.
후우-
사내가 폐 깊숙한 곳까지 빨아들였던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연기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다가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에 의해 산산이 흩어졌다.
또각 또각
적막을 깨는 것은 여인의 구둣발 소리였다. 사내는 소리를 따라 여인을 흘끔 쳐다보더니 먹잇감을 발견한 뱀처럼 혀를 날름거렸다. 여인은 사내를 경계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길을 돌아서 나가진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오빠.” 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선 남자친구인 모양이었다. 마치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이 있으니 허튼 짓 하지 말라고 경고하듯 큰 소리로 통화를 이어갔다.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조급해 보이는 여인의 발걸음. 담배를 빨아들이는 사내. 여인이 스쳐지나가자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시퍼런 빛을 내뿜는 칼이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으아악!”
예상치 못한 벨 소리에 놀란 현수는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어두컴컴한 방 안. LED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만이 희미하게 방 내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모니터 안의 여인은 사내에게 무참히도 살해당하고 있었다. 현수는 보고 있던 영화를 정지시키고 바탕화면으로 나갔다. ‘로코’로부터 영상통화 신청이 오고 있었다.
“어휴 이 씨…….”
현수는 목구멍까지 삐져나온 욕을 억누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로코의 잘못은 아니었기에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현수가 수락 버튼을 누르자 화면 너머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낀 사내의 얼굴이 비춰졌다. 얼굴의 절반을 가려서일까. 그의 입술 옆에 박힌 작은 점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로코는 현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갑다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제우스. 같이 게임하자.”
닉네임 로코. 로맨스코미디의 약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가 자주 쓰는 닉네임은 로코였다. 그와는 오래 전부터 같은 게임을 하며 알게 된 사이였다. 성격이나 취미도 잘 맞아 사적인 이야기도 제법 나누었지만 실제로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실명도 모르고 나이도 몰랐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한두 살 터울의 또래라는 것과 그가 대전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 외에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기본적인 정보들. 어떻게 보면 타인에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현수는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실제 친구보다 더욱 친밀하게 느껴진 일도 많았고.
“미안, 지금 영화 보는 중이라서.”
“영화? 무슨 영화?”
“살인자의 법칙.”
“아……. 그 영화.”
로코는 탄식을 뱉듯 아, 하고 말을 길게 끌었다. 게임이 시시할 때 그가 자주 보이던 행동이었다. 그의 탄식을 들은 현수는 큰일 났다 싶었다. 통화를 빨리 종료해야 해야 했다.
“영화 끝나고 다시 연락할게!”
“그 영화 시시하던데…….”
현수는 로코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통화를 종료했다. 그는 게임이 재미없을 때 항상 돌발행동을 해왔다. 고의로 아군을 죽이거나, 진로를 방해해서 팀의 승리를 방해하는 식으로. 아마 그대로 두었다면 영화의 결말을 스포일러 한다 던지 그러지 않았을까? 게임 외에 현수의 유일한 취미인 영화 감상. 이 달콤한 낙을 빼앗기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라면 커다란 TV화면으로 봤을 테지만 얼마 전부터 TV가 고장이 나 지직거리는 잡음만이 들려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영화는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살인을 미학이라고 생각하는 영화의 살인자가 자신이 세운 규칙에 따라 차례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가족이 살해당한 형사가 그를 뒤 쫒는 줄거리였다. 영화가 끝나자 어느새 시간은 밤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게임을 한판 하고 잠들기에는 적절한 시간이었다. 현수는 마우스 휠을 드르륵 거리며 메신저의 친구목록에서 로코를 찾았다.
로코 - 마지막 접속 17분 전.
“에이, 뭐야 나갔네.”
이럴 때면 로코의 연락처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로코쪽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은 눈치인 것 같아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서로가 친구로 지내기 위해 지켜야 하는 최후의 마지노선. 그것이 서로에 대한 개인정보는 직접 말하기 전까진 물어보지 않는 것이었다.
***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 현수는 반사적으로 TV를 먼저 켰다.
“연쇄... 사건... 경찰은... 제보,..”
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아나운서로 추정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렇지. TV는 망가져 있었다. TV를 새로 사야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었다. 인터넷 쇼핑으로 간단하게 살 수도 있겠지만, 현수는 자신이 직접 써야하는 가전이나 전자기기는 현장에서 직접 보고 골라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다. 물건을 고르는 그 과정이 설레고 기쁘기도 했다. TV를 볼 수 없으니 오늘도 내내 게임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현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제 로코와 게임을 하지 못했으니 오늘은 같이 해야겠다. 그가 들어오려면 시간은 더 지나야 했다. 현수는 혼자 게임을 하며 로코를 기다렸다. 아군과 호흡을 맞춰 적진에 파고들고, 적이 보이면 클릭.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나간다. 일련의 과정의 반복. 요란하게 마우스를 딸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따르르릉- 따르르릉-
반가운 벨소리였다. 현수는 게임화면을 내리며 메신저 창을 열었다. 로코에게서 영상통화신청이 왔다는 메시지였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화면 너머로 로코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여전히 얼굴의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로코! 같이 게임하자.”
현수가 먼저 소리쳤다. 하지만 이어지는 로코의 대답흔 현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미안 나 다시 나가봐야 돼서…….”
“그래?”
현수는 내심 아쉬웠지만 그런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늘 같이 게임하자고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로코는 할 말이 있는 것인지 입을 벙긋하고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이윽고 마음먹었다는 듯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우스. 우리가 알고 지낸지 얼마나 됐지?”
그가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수는 로코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군대 가기 전부터 알고 지냈으니, 아마 6년쯤 인가? 벌써 그렇게 됐나…….’ 빠르게 지나간 시간에 무언의 허탈감이 들었다. 그만큼 로코와 오래 알고 지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6년쯤 됐네.”
“시간 참 빠르지?”
로코도 현수와 같은 기분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마 소주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한잔 걸쳤을 지도 모른다.
“우리가 알고 지낸지도 오래 됐잖아……, 그러니까 연락처라도 알고 지내면 어떨까?”
한참동안 시간을 끌다 어렵게 꺼낸 말. 현수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말이었다. 로코의 연락처. 이는 분명 자신이 바라던 것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제안에 현수는 기쁨보다는 걱정과 의문이 먼저 앞섰다
‘로코가 왜? 왜 갑자기 연락처를 물어보는 거지? 그렇게나 선을 지키던 녀석이…….’
여러 가지 생각이 현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코에 대한 의심보다는 가상공간에서의 관계가 아닌 현실의 관계를 맺더라도 지금처럼 편한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로코는 분명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랫동안 로코와 지낸 현수가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싫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그가 실제 친구보다 더 친밀하게 느낀 적도 많았으니까. 현수는 문득 낯선 남자가 자신의 안방에 불쑥 발을 내딛은 것 같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연락처까지는 좀 그렇지?”
한참이나 대답을 없자 로코는 현수의 눈치를 살피듯 말을 꺼냈다. 현수는 부정하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기에는 불편한 느낌을 지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아니야. 너무 갑작스러워서.”
로코는 씁슬한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메세지로 내 연락처 남길게. 내키면 연락 줘.”
띠링
맑은 메신저 알람 소리와 함께 로코의 연락처가 날아왔다. 로코의 울적한 모습을 본 현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오래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인데 이까짓 게 뭐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불편했던 기분은 마음 깊숙한 밀어 넣었다. 현수는 적힌 연락처대로 문자를 보냈다. 나 제우스야. 라고 적은 짧은 문자였다. 모니터 화면 너머로 작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문자 받았지? 그게 내 연락처야.”
“받았어. 고맙다.”
로코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였다. 입술 옆의 점이 그의 얼굴 근육을 따라 말려 올라갔다.
“일 때문에 이만 나가봐야 돼. 문자로 연락 할게.”
“그래.”
영상이 꺼지고, 로코는 접속을 끊어버렸다. 오랜 친구의 연락처를 알게 됐다. 어린 시절 새 반에 배정되어 새롭게 친구를 사귄 것 같은 설레임도 분명 있었지만 낯설고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도 뒤엉켜 있었다. 기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현수는 두루뭉술하게 뜬 기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런 느낌을 떨쳐버리려 게임을 했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재미를 느끼지 못한 현수는 게임을 끄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르지만 내일을 대비해 잠을 자려는 생각이었다. 현수는 머릿속에 복잡하게 떠오르는 상념들을 그대로 지켜봤다. 점점 바깥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에 무뎌지고, 자신도 모르게 의식 깊숙한 곳으로 빨려들어 갔다.
위이이잉-
묵직한 진동음이 현수의 의식을 현실로 돌려놓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짜증이 밀려왔다. 현수는 자신을 잠에서 깨운 근원을 찾아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놓인 핸드폰이 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진동의 원인은 로코에게서 온 문자였다.
[ 나 조만간 서울에 볼일이 있는데, 너희 집에서 지내도 될까? ]
갑작스런 로코의 말에 현수는 잠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서 지낸다고? 로코와 친하긴 하지만 우리 집에서……? 아무리 친하다지만 실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로코를 잘 아는 것도 아닌데.’
문득 현수는 깨달았다. 친한 친구로 지내온 로코와의 관계는 온라인상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그 선을 넘어버린다면 다시 처음부터 관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미안하지만 거절하자.’
그렇게 생각한 현수는 거절할 핑계거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 때 다시 한 번 진동이 울렸다.
[ 혼자 산다고 했지? XX동 XX빌라. 열쇠는 우체통 안이라고 했었나? ]
현수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게임패드가 필요해서 로코에게 추천을 받으려고 했을 때, 로코가 자신이 쓰던 패드를 보내주겠다고 해서 주소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열쇠에 대해서는 지나가는 말로 했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다. 확신은 없지만. 현수는 로코의 문자에서 공포를 느꼈다. 낯선 사내가 방에 발을 걸친 것을 넘어 서 집주인의 동의도 없이 안방까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불편하고 숨 막히는 느낌. 현수가 아는 로코는 이전과 지금이 분명 다르게 느껴졌다. 같은 사람임에도 분명히 달랐다.
위이이잉-
다시 한번의 진동.
[ 미안. 너무 갑작스러웠지?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
로코는 자신이 너무 지나쳤던 것을 알게 된 것일까. 문득 현수는 너무 서슴없이 자신의 개인정보를 밝힌 것을 후회했다.
***
며칠이 흘렀다. 메신저와 게임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로코와 만나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며칠 후면 주문한 TV가 올 것이다. 여러 가전 매장을 돌며 고심 끝에 고른 물건이라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때까지만 지루함을 참으면 된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현수는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핸드폰이 아닌 일반 전화번호. 모르는 번호였다. 늦은 시간대에 걸려온 전화인 만큼 업무와 관련된 것도 아닐 것이다. 평소라면 굳이 받지 않았겠지만, 약간의 심심함 탓이었을까. 현수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제우스냐?”
로코였다. 착 가라앉고 목에 가래가 낀 듯 걸걸한 것이 꽤나 지쳐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약간이지만 숨을 헐떡이는 것 같았다.
“어, 로코냐?”
현수는 애써 반가운 척 대답했다. 불편한 마음을 로코에겐 들키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며칠간 일부로 로코를 피해왔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제우스 지금 너희 집에 가도 될까?”
소란스러운 잡음이 로코의 목소리와 섞여서 들려왔다. 사이렌 소리인지, 아니면 주변에서 사람들이 크게 떠드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소리가 뒤엉켜져 있었다. 로코의 말을 들은 후 무슨 말이었는지 잠깐 생각해봐야 할 정도였다. 로코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미안한데 내가 사정이 급하게 됐다. 너희 집에서 며칠만 지내게 해줘.”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 하게 돼서, 급하게 서울에서 지낼 곳이 필요해. 나 지금 …… 인데 너희 집에 가도 되지?”
잡음에 의해 드문드문 인식할 수 없는 단어들. 갑작스러운 로코의 말에 현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집 안이 손님을 맞이할 상태도 아니었다는 건 둘째 치고, 낯선 누군가를 집에 받아들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미안한데 갑자기는 힘들 것 같다.”
현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수화기 너머로 거친 바람소리가 현수의 귀를 파고들었다. 로코도 급한 사정이 있으니 이렇게까지 하는 거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로코를 갑자기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로코는 친한 친구다. 이것만큼은 진심이다.
수화기 너머의 로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와 반대로 잡음은 더욱 크고 복잡해졌다. 때때론 누가 소리를 지르는 것도 같았다.
‘기분이 많이 상했나?’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로코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자 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코?”
“…….”
로코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화가 많이 난 것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미안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로코? 여보세요?”
뚝.
뭉툭한 가래떡이 뚝 끊어지듯이 통화가 끊어졌다. 로코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화가 많이 난 것일까. 설마 진짜로 찾아올까? 잠자리에 누워서도 여전히 신경은 로코에게 쏠려 있었다. 미안한 마음, 불편한 감정, 혹시나 진짜 집에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현수는 한참이나 침대에서 뒤척였다.
.
..
...
똑 똑 똑.
일정하게 끊어지는 세 번의 노크소리.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수는 자기가 잠에 빠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누구세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목이 심하게 잠겨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누가 자신을 짓누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똑 똑 똑.
다시 한 번 규칙적인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마치 동굴에 있는 것처럼 울렸다.
“제우스. 나야.”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문 밖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작은 쇳덩이가 서로 부딪히며 짤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드르륵.
이어 차가운 열쇠구멍을 쑤시는 섬뜩한 소리.
찰칵.
문의 잠금이 풀렸다.
설마 우체통에 열쇠를 두고 왔던가? 그럴 리가 없는데……. 현수가 집안에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열쇠가 있어야지만 집 문을 열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문을 연 것 일까?
현수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갔지만 그와 반대로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쾅 하며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들려오는 쿵쿵거리는 남자의 발소리. 소리가 가까워지는걸 보아하니 현수를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현수는 온 몸을 비틀며 움직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하지만 거대한 중력이 현수를 짓누르는 것처럼 현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의 공포감. 목이 잠겨 소리는 지를 수 없었다. 성대에서 미약하게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도 같았다. 사내는 어느 새 현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짙은 어둠이 그의 얼굴을 가려주고 있었지만 입술 옆의 도드라진 점은 이상하게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보였다.
“제우스, 나야.”
...
현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끔찍한 악몽이었다.
***
마침내 주문한 TV가 오늘 도착했다. 기사는 능숙한 솜씨로 선을 연결하더니 채널을 돌려가며 이상이 없는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이상 없는지 확인해주시구요, 확인 끝나셨으면 여기에 싸인 해주시면 됩니다.”
기사는 태블릿을 내밀었다. 제품에 하자가 있는지, 서비스에는 만족하는지를 묻는 양식이었다. 현수는 대충 훑으며 좋은 방향으로 체크했다. 애초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불만족 한다고 체크할 수가 있을까.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범이 어제 붙잡혔습니다. 경찰은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해 범인의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정 하였습니다…….”
TV를 점검하며 틀어놓았던 뉴스화면에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사는 “어휴 저 나쁜놈.” 하며 욕을 내뱉었다. 현수도 동의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인 흉악 살인범.
경찰이 공개한 살인범은 매우 강한 인상을 가진 얼굴이었다. 터질 듯이 커다란 눈, 날선 코, 그리고 입술 옆의 작은 점. 어쩌면 점 따위야 사소한 것일 것이다. 그의 커다란 눈에 비하면 분명 눈에 띄는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작은 점.
‘로코가 살인범이라고?’
설마.
현수는 피식 웃어보였다. 그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리가 있나. 오늘은 로코와 같이 게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로코와 며칠 째 연락이 닿질 않고 있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메신저도 들어오질 않는다. 며칠씩 로코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건 이전에도 있어왔던 일이다. 주기적으로 그래왔던 것으로 보아 로코의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추측하고 있다. 현수도 어릴 적 보안이 철저한 시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 때 휴대폰과 같은 연락매체를 전혀 쓸 수 없었으니 로코도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분명 며칠만 더 있으면 먼저 자연스럽게 연락해올 것이다.
***
며칠이 지났을까. 로코가 없으니 게임도 재미가 없었다. 현수는 영화를 보기 위해 TV를 틀었다. 어떤 영화를 볼지 휴대폰을 뒤적이며 생각에 잠겨있을 때 흘러나오는 광고를 자르며 긴급 속보를 알리는 뉴스가 나왔다.
“긴급속보입니다. 며칠 전 경찰이 붙잡았던 연쇄살인범 K씨가 탈주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는 경찰의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연쇄살인범의 도주소식이었다. 뉴스는 빠르게 소식을 전하면서도 범인의 얼굴을 화면이 한 쪽에 띄워놓았다, 터질 듯이 커다란 눈, 날선 코, 입술 옆에 박힌 도드라진 점. 현수에겐 범인의 입술 옆에 박힌 점만이 보였다.
“에이, 말도 안 돼.”
현수는 코웃음 치며 부정했다. 하지만 혹시 모를 그 가능성은 뱀처럼 똬리를 틀며 온몸을 조여 왔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의 노크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어쩐지 들어본 것 같은 소리. 현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똑 똑 똑.
노크소리는 다시 한 번 이어졌다.
현수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에 바짝 붙어 작은 렌즈를 통해 바깥을 내다봤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쓴 사내. 그는 모니터 너머로 봐오던 로코가 분명했다. 그는 현수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씨익 웃었다. 입술 옆에 박힌 도드라진 점이 말려 올라갔다.
“제우스,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