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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한국인 메이저리거 중에 가장 아쉬웠던게 서재응...
게시물ID : baseball_1011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lues91
추천 : 5
조회수 : 199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8/15 12:44:55
내가 느끼고 기억하는 서재응은 비운의 투수같습니다.
이전에 많은 야구팬들이 김병현 같이 그라운드에서 배짱 있는 캐릭터를 봐왔듯 가끔은 서재응 같이 변덕스러운 캐릭터를 보는 것도 제겐 소소한 재미였습니다. 알고 보면 참 흥미로운 선수죠.
미국에서 배워온 자신감과 승부욕이 스타일에 묻어나 가끔 그라운드에서 격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나이스 가이라는 별명과는 별도로 타이거즈 덕 아웃에서 응원단장이란 우스갯 스러운 별명은 클럽 하우스 리더 역할을 자처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승부사라고 생각됩니다. 팀을 위해선 어떤 보직 또한 망설이지 않고 마운드에 공을 던지죠.
 
광주 제일고 출신으로 고교시절 유망주였던 서재응, 오래 전 위세가 사그라들은 인천 팜은 애초에 제외하고 서울팜,영남팜,호남팜은 한국 프로야구를 이끌어가는 인재의 산실이 된지 오래입니다. 여기서 호남 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8~90년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를 가장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런 단적인 면으로 광주를 연고지로 삼았던 타이거즈의 압도적인 우승 횟수가 말해주죠. 대표적으로 광주 제일고 메이저리그 출신 3인방
※여기서 ‘팜’은 지역 연고 안의 리틀,초,중,고를 합친 인재를 육성하는 장소
 
서재응,최희섭,김병현
참 대단하지 않은가요?
상위리그에 뛴 선수들 3명을 한 학교에서 배출했다는데 박수를 쳐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명의 선수가 한 시대를 동시에 배출 되었다는건 실로 호남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비록 오늘 날 서재응과 최희섭은 빅리그에서 실패를 맛 본 후 다시 국내리그로 복귀했지만 역대 MLB에 진출한 한국 선수 가운데 선발 투수 기준으로 박찬호 류현진선수 다음으로 성공한 선수를 뽑자면 응당 서재응 선수를 뽑습니다.
물론 김병현 선수가 애리조나 D백스에서 마무리 투수를 역임 하다 보스턴 레드삭스 이적 후 불펜에서 선발로 아예 보직을 전향 했지만 선발 투수는 김병현의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이 청신호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김선우와 봉중근,류제국 그리고 이젠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인 신분으로 살아가는 백차승 선수 등 서재응 선수의 메이저리그 통산 승수와 감히 근접 할 수 없는 성적이죠.
 
-서재응 결혼식, 광주 제일고 메이저리그 3인방-
사실 고교 시절 서재응은 유망주긴 했지만 당시 국내 유망주 기준으론 상위 클래스는 아니었습니다. 동기생 김선우가 고교2학년 94년 세계청소년대회때 유일하게 2학년신분으로 대표팀에 합류해서 3학년 김건덕,김상태,이승엽등과 함께 뛴 것에 비해 서재응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천 연고권 팀과 마찰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서재응 선수는 인천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인하대학교 진학후 대학야구 선수로 기량이 급성장 한 케이스이죠.
사실 메이저리그 입성도 참 말이 많았는데 먼저 서재응의 가치를 눈 여겨 본 뉴욕 양키스가 30만 달러로 배팅을 합니다. 하지만 서재응 측은 끝까지 60만 달러를 고수했고 협상이 결렬 되자 당시 국내에선 상위 클래스 유망주로 보지 않았던 서재응이 무슨 생각으로 양키스의 30만 달러를 끝까지 거절했느냐 빈축을 사기도 했었죠.
곧 이어 ‘뉴욕의 만년 2인자’ 뉴욕 메츠와의 협상 테이블에 135만 달러를 받고 98년 입단에 합의합니다. 서재응의 뉴욕 메츠 입단이유엔 당시 뉴욕 메츠 감독이던 바비 맬런타인의 야구관을 무시 할 수 없습니다. 95년 일본의 지바롯데 마린즈 감독을 역임 하는 등 일찍이 동양 야구의 가능성을 눈여겨 본 밸런 타인 감독의 강력한 요청 덕분에 서재응은 훗날 빅리그 무대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광주 제일고 3인방의 아주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OB베어스 코치였던 김광수 코치가 서재응이 고교3학년때 광주일고를 방문해서 서재응이 던지는걸 보고 깜짝 놀래서 “저정도 투수가 있다면 광주일고 올해 전국대회에서 우승 여러번 하겠는걸?” 이렇게 말하자, 광주일고감독이 씩 웃으면서
“우리팀 에이스는 서재응이 아닌데요?” 라고 말한후 2학년투수 한명을 불러서 공을 던지게 했다고 한다. 그 2학년투수가 공을 던지는걸 보고 김광수코치는 기절할뻔 했다고 한다.
그 2학년투수는 바로 김병현
훗날 후배로 제일고에 입학 한 최희섭 선수도 중학생 시절 투수 경력으로 고등학교 입학해서도 투수를 노리고 있었는데 신출내기 후배가 선배인 서재응,김병현의 피칭을 보며 단념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98년 서재응 선수는 방콩 아시안 게임 엔트리에 포함 되는 행운을 누립니다.
그에겐 성인자격으로 첫 태극 마크를 달았습니다. 당시 서재응의 은사 인하대 ‘주성로’ 감독이 방콕 아시안 게임 감독으로 선임 되어 김선우와 서재응 두 마이너리거를 두고 고심한 끝에 제자를 선택한 것이죠.
방콕 아시안 게임은 프로 선수에게 알루미늄 방망이를 안겨주면 어떤 재앙을 초래하는지 일깨워준 예로 남았습니다.
한국대표팀은역대 1기 드림팀이라 불리며 해외파와 당시 국내 최고의 선수들을 포함한 대표팀은 대만을 제외하고 아마추어로 상대 된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서재응 선수는 일찍이 병역 면제 혜택을 누리고 마음 편하게 미국에서 야구르르 집중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 ‘컨트롤 아티스트’의 시대가 도래 합니다.
-미트에 정확히 들어가는 공, 포수 미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서재응의 투구폼은 기품 있고 아름다웠습니다.
투구 시 인상적인 건 와인드업 동작을 시작으로 최종적으로 공에 손을 놓은 마무리 동작 까지 그립을 끝까지 숨기는게 오늘 날 다시 봐도 예술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하위권 이였던 메츠는 그에게 많은 승수를 챙겨 주지 못합니다.
국내 선수 가운데 제구력이 가장 완벽한 선수라 불리던 서재응
잘나갈 땐 300승 투수 ‘제구력의 마술사’ 그레그 매덕스와 당당히 승부 할 정도
 경기가 끝난 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매덕스가 서재응의 피칭에 경의를 표한다 말 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대게 착각하는게 서재응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똥볼을 던졌다고 말하는데 메이저리그 평균에는 비록 미치지 못한 직구를 던졌지만 이는 정말로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헛소리입니다.
그당시 서재응의 빠른공은 92마일에서 94마일까지 솟구치고 충분히 150의 직구를 던져대는 선수였고 다저스시절엔 최고구속 95마일까지 찍기도 했답니다.똥볼되고 한국와서 그렇지 ㅋㅋ
 
국내 복귀 후 기교파 투수로 전향 하지만, 메츠 시절 선발로 완급 조절 덕에 최대 구속을 던지지 않았을 뿐이지 메이저리그 말년엔 불펜 투수로서 전력 피칭을 했습니다. 국내 복귀 후 제구력을 위주의 피칭은 틀린 말은 아닌데 메이저리그에서 서재응은 평균구속이 88일(142km)로서 평속이 김광현,윤석민전성기와 별 차이도 없었습니다.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지만 서재응에게 WBC는 본인의 성공과 맞바꾼 큰 결심임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오랜 마이너리그 생활을 이겨내고 뉴욕 메츠의 주축 투수로 성장해 윌리 랜돌프 감독에게 메츠의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를 받았던 그에게 2006시즌 위기가 찾아옵니다.
사실 2006시즌은 서재응에게 더할 나위 없는 중요한 시즌이었습니다. 이제야 메이저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비시즌 동안 철저히 준비해 에이스급 투수로 부상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죠.
대게 비시즌에 메이저리거들은 자율 훈련을 하며 본인이 원하면 교육리그와 남미리그에 참가해 시즌 개막까지 기량을 점검 하는데 때 마침 월드베이스 볼 클래식 (WBC)이 열립니다.
아무리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야구의 세계화라는 목표로 만든 대회라지만 메이저리그들 입장에선 그저 대회라는 거창한 이름뿐이지 스프링캠프 연습 경기에 불과한 국가 대항전에 목숨을 걸고 달려들 이유가 없었죠.
하지만 아시아 국가 한국,일본,대만 그리고 아마 야구 최강이라 불리는 쿠바는 자국리그 위상을 위해 목숨을 걸고 대회 준비에 사활을 겁니다.
1대 김인식 감독은 국내파 투수로는 상위리그 타자들과는 상대가 불가피 하다는 것을 느끼고 해외파를 소집 하는데 박찬호,김선우,봉중근등이 합류에 약속 했지만 김인식 감독에겐 서재응의 선발진 합류가 절실했습니다.
처음엔 서재응은 “한국프로야구에 좋은투수도 많고 다음시즌을 준비하고 싶다.” 라고 거부했지만 김인식 감독은 서재응의 자리를 비워 놓겠다며 언론에 선언하죠.
선택은 서재응의 몫이지만 이는 서재응에게 대표팀에 합류 하지 않으면 비난 받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말 한마디에 조성 한 것입니다. 국가의 부름을 거절 하기엔 본인에게 돌아올 비난의 화살이 너무 컷고 결국 서재응 선수는 WBC 대표팀 선발진에 합류합니다.
wbc에서 가르시아와 상대하는 서재응
 
도쿄돔에 열린 대만과의 예선전 호투로 승리
LA 에인절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본선 멕시코 전 호투로 승리
그리고 운명의 4강 일본 전,호투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외야수 후쿠도메 고스케에게 홈런을 허용한 김병현을 시작으로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 에이스 우에하라 고지한테 번번히 틀어막혀 결승 문턱에서 좌절한 대한민국.
 
서재응은 WBC 3경기에서 선발등판했고 100개 투구 수 제한 규정때까지 버티면서 14이닝 1실점 방어율 0.64 2승을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2006WBC를 기억하면 박찬호, 이승엽,이종번,최희섭 등을 생각하지만..
WBC 에이스 서재응이 없었다면 대표팀은 4강 진출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저스로 트레이드된 상황에서도 시즌을 대비하기 바쁘고 방콕 아시안 게임 이후 팔꿈치 수술 경력도 있고, 그전해 마이너, 메이저포함 처음으로 200이닝을 넘기며 쌓인 피로도 풀어야했으나 본인의 의사가 100%는 아니었지만 대표팀에 합류해서 최선을 다했다습니다.
하지만 결단코 그의 앞날을 위해선 WBC는 참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물론 100%wbc탓은 아닙니다 선천적으로 팔꿈치에 문제가 있던 서재응이고 그래서 더더욱 관리가 필요한 선수였습니다.
 어찌 보면 국위선양 한 명예는 주었을지 모르나 선수로서 성공에 마이너스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빅리그에서 선발로서 많은 이닝을 소화 해 본 적 없고 이미 전시즌 빅리그와 마이너리그에서 돌아가며 많은 이닝을 소화한 서재응은
평소 같으면 비 시즌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준비기간인 MLB는 관심도 없는 WBC에서 무리한 후유증으로 인해 서재응은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큰 휴유증에 시달립니다. 2006 WBC 참가 후 어깨가 올라가지 않았을 정도라니 대강 상태를 짐작 할만하죠
그 후 서재응은 다저스와 탬파베이를 전전 긍긍하며 재기를 위해 투구폼 까지 변화를 주었으나 구속은 조금 올랐으나 메이저리그에 뛸 수 있었던 궁극의 장점인 제구력이 저하 되고 다시 팔꿈치 부상을 당하고 다시 수술하게 됩니다.
결국 빅리그 생활을 정리하고 2008년 광주 일고 출신 후배 최희섭과 함께 국내 리그로 복귀하지만 메츠시절 서재응은 이미 아니었습니다.
98년 꿈의 빅리그에 진출 했으나 본인의 성공을 잠시 뒤로 미루고 국위선양 마다하지 않았던 선수.
서재응선수하면 여러가지 이미지가 있지만 그래도 한번 제 기억속에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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