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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식물
게시물ID : panic_1012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테라코타맨
추천 : 2
조회수 : 184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20/03/13 11: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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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애완식물


    “해피! 해피!”

    아들의 침대맡에서 잠들어 있는 그의 귀에 그 소리는 천둥처럼 들렸다. 지난밤 그는 아들의 발작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온 신경은 칼날의 날카로운 기운이 근처에만 와도 곧장 끊겨 버릴 정도로 팽팽한 상태를 새벽이 다 되도록 유지하고 있었던 터였다. 아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작은 입 언저리는 또 한차례 경련을 일으킬 듯 실룩거렸지만 다행히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는 아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여몄다. 동쪽으로 난 창에 어느새 새벽빛이 흐릿하게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삐끄덕거리는 바닥을 피해가며 안방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편안함이 몸통 한 가운데에서 시작해 팔다리 끝까지 퍼져나가자 여기저기에서 뻐근한 작은 통증들이 도드라졌다. 그리고 곧장 자기 몫의 악몽에 빠져들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캠퍼스, 박사 과정, 박사후 과정, 네이처 논문, 프랑켄슈타인 논란, 그리고 창업의 그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지더니, 그는 어느새 배양조 앞에 서 있었다. 곧이어 배양조는 거대한 괴물로 변했고 그 괴물은 아내를 흉칙한 입으로 집어삼켜버렸다. 이번에는 그가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또다시 화장실 창으로 골프공이 날아든 것이다. 토요일 아침부터 끝도 없이 골프공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려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이 일었다 사라졌다. 깨진 유리조각을 치우는 것은 급하지 않았다. 그는 아들 방으로 가보았다. 다행히 아들은 그 소음에도 잘 자고 있었다.

    한바탕 지진이라도 뒤흔들고 지나가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간단한 아침을 준비하여 깨우고 씻기고 먹인 다음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집앞 커다란 가로수의 짙은 그늘이 막다른 길목을 동굴처럼 시원하게 하는 느낌이었다. 차 뒷좌석에 앉힌 아들은 무엇에 마음을 빼앗긴 것인지 차에 타자마자 조용히 차창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아들 조엘, 다섯살. 헤잇니스가 아내와 함께 분자생물학 박사가 되고 박사후 과정에 들어가고 마녀사냥을 당하고 창업을 한 그 이전의 분주했던 10년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찾아온 조엘의 임신.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의 아내는 배양조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고 식물인간이 된 채 열 달을 채워 간신히 조엘을 낳을 수 있었다. 조엘에게는 엄마 없이 아빠와 함께 한 시간이 5, 선천성 뇌손상으로 고통 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헤잇니스 박사 부부는 스스로 명명한 '꿈의 물질'을 배양중이었다. 바로 박사 과정 때부터 한결같은 연구 주제였던 세 가지의 혁신적인 유전자, 곧 해파리 유전자에서 추출한 야광 유전자, 오징어 유전자에서 추출한 눈 유전자, 식물과 전기뱀장어 유전자들 조합하여 만든 생체전기 유전자였다. 그 유전자들은 물론 재설계 과정을 거쳐 어떤 생물체와도 결합이 가능한 인터페이스 부분을 갖춘, 다른 유전자에 레고 조각처럼 얼마든지 조립하고 분해할 수 있는, 유전공학의 반도체 칩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배양조 안에는 세 종류의 변형 대장균이 꿈의 물질을 생산하고 있는 중이었고.

    배양조를 점검하러 갔던 아내는 불과 30분 뒤에 배양조 안에서 발견되었다. 임신 중기를 지나고 있었던 아내는 배양조 안으로 떨어지는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 머리 부분은 벽에 기댄 채 온몸에 배양액을 뒤집어 쓴 것이라 위험한 질식이 일어날 상황도 아니었다. 그리고 배양조는 약간 따뜻하다고 느낄 정도의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저체온증도 탈수도 염려할 상황은 아니어서, 보통의 상황이라면 우유 대신 걸쭉한 배양액으로 목욕한 셈 칠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결국 깨어나지 못하였다. 의사들은 대장균의 신경계 감염이라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태아에는 문제가 없었고, 코마 상태에서도 태아의 성장 또한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헤잇니스 박사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아들을 얻는 대신 아내를 잃어야만 했던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슬펐지만 망설일 수도 없었다. 아들은 영구적이고 선천적인 뇌손상을 갖고 태어났다. 뇌의 일부라는 눈도 마찬가지였다. 팔다리가 자유롭지 않았고 앞을 볼 수 없었다. 장애물과 위험상황을 스스로 피할 수 있는 초보적인 휠체어 로봇 위에서 살아갈 운명이었다.

    아내를 잡아먹고 아들을 망가뜨린 그의 벤처 스타트업은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사고 이후 경영과 연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꿈의 물질은 과연 그 쓰임새가 무궁무진이었다. 야광 유전자는 식물이나 동물을 빛나게 하여 조경과 애완동물 업계를 차원이 다른 경지로 이끌었고, 눈 유전자는 살아있는 광학 빅데이터의 수집을 가능하게 했으며, 생체전기 유전자는 생산과정이 '더러운' 태양전지를 완벽하게 대체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회사가 자동화된 것도 순식간이었다. 전문경영인은 순식간에 해고되었고, 주문, 생산, 배송은 물론이고 마케팅, 애프터서비스까지 인터넷, 인공지능, 로봇이 처리했다. 헤잇니스 박사가 사업 목표를 정해주면 나머지는 자동이었다. 사업 목표를 정하는 데 참조할 자료를 준비하는 것도, 최신 연구과 시장 동향을 연구하는 것도 회사 인공지능이 다 했다. 신제품 개발이 결정되면 로봇이나 사람 연구자를 고용하여 연구개발에서 상품화까지 감독하는 것도 인공지능이 훨씬 더 잘 해냈기 때문이다. , 그의 회사는 회사의 창업주이자 소유주인 헤잇니스 박사 포함,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몇 가지 기능성 유전자를 공급하는 회사로, 세상의 배경에서 마치 자연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회사에서 생산된 유전자가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투입 노동력 없는 순수한 자본으로만 돌아가는 회사,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켜가는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노동마저 자본이 흡수한 상태로 전자동으로 돌아가는 회사, 노동과 얽히지 않은 순수 자본가 그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내와 아들을 댓가로 치룬 화수분, 딱 그거였다.


    해피는 그렇게 특별하다고는 할 수 없는 강아지였다. 생김새며 털 색깔도 아이들이 특별히 좋아할 만한 그런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성격과 목소리가 좋았고 짖는 소리의 표현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볼 수 없는 조엘에게 해피의 겉모습 같은 광학 데이터는 의미가 없었던 대신, 당연하게도 음향과 촉감 데이터는 거의 모든 것이었다. 절대적이었다. 조엘이 갓난아기 때 입양해온 해피는 처음엔 목에 작은 방울을 달고 촐싹대는 작고 시끄럽고 귀여운 강아지였다. 하루종일 곁에서 온종일 짖어대고 까불어대서 어쩌면 어린 조엘에게 해피의 존재가 아빠보다 더 큰 면이 있었다.

    이미 며칠 동안 해피를 찾으며 울부짖느라 기진맥진한 상태가 된 조엘은 애완견 센터에 도착해서도 로봇 휠체어에 얌전히 앉아 있기만 했다. 아빠의 생각에는 해피와 비슷해 보이는 강아지들만 골랐지만 조엘은 한사코 고개를 젓기만 했다.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조엘은 해피가 왜 자기에게 올 수 없는지, 언제 올 수 있는지를 되물을 뿐이었다. 헤잇니스 박사는 아무 소득도 없이 애완견 센터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피와 똑같은 살아있는 강아지를 찾을 수 없다면, 해피와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고 비슷하게 반응할 수 있는 로봇 강아지를 알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대학을 막 졸업했을 것 같은 젊은 의사가 말했다. 아동심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그 나이의 젊은이답게 모든 문제에 과학기술적인 해답을 내놓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것도 로봇이라니. 조엘의 로봇 휠체어가 바로 옆방에 마련된 아이들의 대기실이자 놀이방 한 켠에 조용히 멈춰 있는 게 보였다. 두 방 사이의 벽에 커다란 일방향 투명창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주 복잡한 유전자 합성 공장까지 로봇으로 전자동화하는 세상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민감한 아이의 정신 세계가 공장자동화처럼 호락호락할 것 같지는 않네요. 혹시 그런 애완동물 로봇을 이용한 심리치료의 경험이..”

    임상경험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더 알아볼 것도 없는 일, 그는 작별인사를 하고 놀이방에 가서 조엘을 데리고 나왔다. 로봇 휠체어는 달리 조정하지 않아도 장애물들을 알아서 피하며 그를 잘 따라 왔다. 조엘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었지만 별 말은 없었다. 해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헤잇니스 박사의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마음에 드는 강아지가 없어? 해피와 똑같이 생긴 로봇 강아지는 어때?”

    다른 강아지는.. 해피처럼 예쁘지 않아요. 소리도 다르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고..”

    헤잇니스 박사는 조엘을 쳐다보았다. 긴 속눈썹과 커다란 밝은 갈색 눈동자가 무척 예뻤다. 한 알의 카다란 보석이라고 해도 그처럼 영롱하게 빛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는 그처럼 멀쩡해 보이는 아들의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피가 조엘에게 무엇을 보여주는데?”

    . 해피가 짖으면 꽃이 보여.”

    그는 손을 뻗어 아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기분 좋은 느낌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그의 성향과 과거 검색 경향, 행동 특성 등을 모두 고려한다는 검색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내놓은 핵심어는 빛을 내는 애완동물. 하지만, 반딧불과 카멜레온, 그리고 몇몇 수중 생물들이 결과로 나왔을 뿐이었다. 포기하려는 찰나에 연관어들 가운데 한 단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야광식물. 그리고 주소 하나가 떴다.

    도시를 벗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시골에 나가본 것은 처음이었다. 도시화의 비율이 99퍼센트인 상황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살다가 도시에서 죽었다. 모든 편리함이 다 모여 있는 도시를 떠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살지 않는 1퍼센트.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 의문을 조금은 풀 수 있었다.

    원예가 김성록. 그는 자신을 그냥 농부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군살 하나 붙지 않은 깡마른 체격의 노인이었다. 마른 몸매에서는 강인함과 젊음이 느껴졌지만, 햇빛에 그을은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하여 웃음 띤 얼굴은 사람 좋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그의 넓은 텃밭과 정원을 보여주었다. 정오를 막 지난 따가운 햇살이 원없이 쏟아져 헤잇니스 박사는 벌써 땀을 흘리고 있었다. 목덜미가 땀에 젖어 끈적끈적한 감촉이 말할 수 없이 불편했지만, 그는 김 노인의 환한 표정,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듯 열정적으로 이어가는 농사 이야기를 거부할 수 없어 거의 두 시간 동안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오신 게요? 이 농장과 묘목장이 어떻습니다. 만약 이 사업을 그대로 이어간다면 시세의 절반 값에라도 넘기고 싶은데. 아들놈이 시골로 나올 생각을 안 해서, 이 좋은 일이 내 대에서 끝날 지경이거든요.”

    웃음기가 떠나지 않는 눈매의 김 노인은 그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김 노인이 농담 삼아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한 나절 보내기도 힘든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노릇이었던 것이다.

    김 선생님, 제 능력으로는 20에이커가 넘는 이 넓은 땅을 건사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힘에 부칠 것 같습니다. 오늘 찾아뵌 이유는 야광식물 광고를 봤기 때문에 그에 대해 좀 여쭤보고 싶어서입니다.”

    김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그래도 그게 어딥니까. 풀과 나무를 찾아준다는 게. 시골을 찾아준다는 게. 내 자식들을 빼고는 이 시골에서 이렇게 직접 사람을 만나본 것은 몇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지 뭡니까. 아까 반갑기도 하고 제 흥에 겨워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군요.”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김 노인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또다시 끝없이 펼쳐 놓았다. 그 내용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그는 또 그 대화를 중간에서 끊지 못하고 붙잡혀 결국 저녁까지 얻어먹게 되었다. 점점 짧아지고 있는 가을 해는 순식간에 서산 너머로 지고, 깜깜한 어둠이 농장을 덮고나서야 그는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동물도 물론 좋겠지만 식물이야말로 우리 인간들의 소중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요. 애완동물과 같은 활동성은 좀 부족할지 몰라도 식물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게 또 매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에게 분명히 아주 좋은 치료 효과를 낼 것입니다.”

    김 노인은 야광식물 판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풀과 나무가 좋아, 그냥 식물에 미쳐 사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편리한 도시를 벗어나 아무도 살지 않는 시골에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더할 뿐이었다.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도시에 살면서 가끔씩 그를 찾아올 뿐이었고, 평소에는 몇 년이 흘러도 사람 하나 만나볼 수 없는 생활이었다. 헤잇니스 박사를 만나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골에서 살려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 내 시간표는 내려놓고 대자연의 시간표를 사용하는 거야. 깜깜한 밤에 숲에 들어가 돌아다니다간 무서운 짐승들을 만나게 되거든.”

    어느덧 편하게 말을 놓는 김 노인의 모습에서 그는 식물의 치유 효과를 본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주문받으라고? 온라인으로 하게 되어 있다네. 요즘 기계는 나보다 나아. 자기들이 다 알아서 해.”

    김 노인이 앉은 자세 그대로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자 실내등이 꺼졌다. 헤잇니스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밝은 불빛 아래에서는 거기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여기저기에 놓인 화분들에서 일제히 풀과 꽃들이 영롱한 빛으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야광식물이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유전자 조작을 하네 뭐네 해도 역시 살아있는 물건이라 야광식물은 하루아침에 뚝딱 조립해낼 수는 없었다. 야광식물에는 미치지 못할지 몰라도 꽤 복잡한 사양을 주고 주문 제작한 화분 로봇은 이미 보름 전에 배달되었으니, 식물과 로봇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셈이었다.

    헤잇니스 박사는 야광식물을 임시 화분에서 문어 모양을 한 화분 로봇으로 옮겨 심었다. 문어의 머리에 해당하는 유리공 안에 마련된 자리에 흙과 함께 옮기고 뿌리가 잘 덮이도록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주면 끝이었다. 동물처럼 즉각즉각 반응하지만 못할지라도 식물들 또한 심긴 곳에서 방향과 각도를 조절하여 제 자리를 잡는 정도의 움직임은 가능했던 것이다.

    화분 로봇은 헤잇니스 박사 자신의 궁리였다. 늘 휠체어 로봇에 앉아 있는 아들이 어느 순간 제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야광식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휠체어 로봇이 없었다면 아들은 마치 상수리 나무 묘목처럼 한 장소에 붙박이로 하염없이 앉아 있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야광식물이 아들의 애완동물이었던 해피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으려면 강아지처럼 따라다닐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땅속에 박는 뿌리로 땅위를 걸으라 할 수는 없으니, 따로 다리를 달아주어야 하리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던 것이다.

    아들의 휠체어와 교신하며 따라다닐 수 있는 오감 갖춘 로봇, 아들 목소리 명령을 알아듣고 실행할 수 있는 비서 기능, 야광식물에 물과 거름기와 햇빛과 온도를 최적화하여 공급할 뿐 아니라 식물의 뿌리 하나하나에 접속하여 전기신호를 포착하고 식물이 내뿜는 미세한 화학물질까지 채집하여 분석하여 식물의 상태를 실시간 모니터하는 원예가 인공지능을 장착했고, 무엇보다도 여덟 개의 로봇 다리로는 머리 부분에 진동이나 가속이 전혀 전해지지 않도록 하면서 문어나 꽃게처럼 네발이나 두발 짐승처럼 걷거나 달릴 수 있었다. 언뜻 보면 애완로봇을 화분으로 쓰고 있는 꼴이랄까. 화분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문어가 연상되기도 했지만.

    야광식물 로봇과 처음 만난 조엘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움직일 때마다 로봇 관절에서 나는 미세한 바람소리 비슷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그 움직임을 추적할 뿐, 유리와 폴리머 재질의 미끄러운 촉감에는 손가락을 움츠렸다. 자신의 휠체어를 따라다니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자신을 그림자처럼 여운처럼 따라다니는 점에 이르러서 해피를 연상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변화는 물이 스며들 듯 조금씩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한 달도 되기 전에 조엘의 악몽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다.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아이가 놀라거나 무서워서 깨는 일은 없어졌다.

    첫날부터 그랬다. 한밤중에 잠이 깬 헤잇니스 박사는 아들의 방으로 가보았다. 아들의 침대맡에 야광식물이 있었다. 로봇은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에 야광은 보이지 않았다. 열린 문틈으로 들어간 바깥 불빛이 아이를 깨울까봐 등뒤로 문을 닫은 다음에야, 그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다음에야 볼 수 있었다. 은은한 초록빛이었다. 자세히 보고 있으면 숨을 쉬듯 천천히 그 밝기와 색깔이 미묘하게 변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형광의 차가움이나 인광의 으스스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미니 오로라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도 같았다.

    아들이 잠꼬대를 하느라 몸을 뒤척이고 나서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야광식물은 아들의 들숨날숨에 맞추어 야광의 색과 밝기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조엘, 잠 잘 잤어? 야광식물 로봇이 있어 좋았어?”

    ! 해피가 있어서 잘 잤어.”

    헤잇니스 박사는 다음날 아침 아들 방으로 갔을 때, 조엘의 상태는 해피가 죽은 이후 최고였다. 잠옷 차림의 조엘은 야광식물과 함께 창가 햇빛 드는 곳에 서 있었다. 조엘은 왼손 주먹으로 자신의 턱을 괴고 오른손은 야광식물이 들어 있는 로봇의 유리공 머리 위에 올려놓은 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참이었다. 조엘의 머리는 로봇의 유리공과 나란히 붙어 있어, 마치 두 꼬마 아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뒷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조엘이 아빠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로봇은 그에 따라 자신의 자세와 위치를 조절하는 것 같았다. 한 예의바른 아이가 친구의 아빠의 등장에 한켠으로 공손히 비켜주는 것처럼.

    뭘 보고 있었는데? 새소리인가?”

    헤잇니스 박사는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바람 소리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해피랑 이야기하고 있었어.”

    해피?”

    아들은 야광식물 로봇쪽을 바로보더니 오른손을 유리공 머리 위에 다시 올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와 같은 동작을 하는 조엘의 손에서는 암중모색과 같은 주저함이 조금도 없었다. 로봇은 이미 원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가 있는 상태였는데도. 헤잇니스 박사는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지만, 로봇이 조엘에게만 들리는 무슨 소리로 기척을 낸 것이겠지 하는 합리적인 설명에 그 모든 것은 그의 무의식으로 흘러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 대신 야광식물 로봇이 대성공임을 직감했다. 로봇이 강아지의 이름을 이어받다니,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인더스트리. 도시 이름은 삭막했지만 군더더기 없이 잘 지은 작명이라고 그는 늘 생각했다. 반듯하고 넓은 포장도로, 길가에 간격 맞추어 깔끔하게 심은 가로수, 그리고 꽃과 잔디 등 여느 주택가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 다만 그런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조 단독주택들 대신에 콘크리트 벽이 단단해 보이는, 한 블럭을 다 차지할 듯 넓고 길고 납작한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레몬길과 밸리길 교차로 북서쪽 모퉁이 살짝 안쪽. 그의 회사는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한 블럭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네모 반듯한 납작한 단층짜리 건물. 옥상에는 냉난방기와 환풍기와 크고 작은 파이프의 미로가 있었지만 길거리에서 보면 앞쪽으로 열린 작은 철문과 뒷쪽으로 열린 커다란 강철 셔터문 말고는 흙손 자국 하나 없는 콘크리트벽 옹벽, 심지어 벙커처럼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회사 건물에 온 헤잇니스 박사의 감회는 새로웠다.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고 결국 목숨을 잃은 5년 전 그 사고 이후 처음인 것이다. 그는 건물 앞에 서서 두 눈을 감은 채 아내의 생각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그 사이 많이 엷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고막 너머에 꽂히는 날카롭기 그지없는 초음파처럼 그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정신적 고통은 가슴에 가느다란 떨림으로, 육체적 고통으로 남는다.

    그는 눈을 떴다. 오후 한낮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태양과 새파란 하늘을 이고 서 있는 짙은 주황색의 벙커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전체 팔면의 모습이 그의 마음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만신전 내부구면에 촘촘히 박힌 작은 조리개와 렌즈로 잡은 건물의 입체가 그의 마음 속에서 한번에 생생하게 다 잡혔다. 그는 눈을 찌뿌렸다. 잘게 부서진 방수막으로 지저분한 옥상과 콘크리트 기초의 울퉁불퉁한 밑면이었다. 기초의 밑면이야 드러날 일 별로 없으니, 옥상만 손을 보면 되는데, 외벽처럼 매끈하고 단단한 표면으로 덮어야만 마음이 개운할 것 같았다. 옥상에 설치된 기계장치들로부터의 열기, 습기, 공기를 제거하는 드러나지 않는 구멍과 틈이 그 매끄러운 표면 어딘가에 설치되어야 하겠지만.

    기계식 강철자물통에 열쇠를 꽂고 돌린 다음에야 전자식 보안시스템이 그의 홍채, 음성, 위치를 확인하여 철문을 열어주었다. 자동으로 조명이 켜지고 온도와 공기의 품질은 그에게 맞춰지기 시작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선 것이다. 반도체 제조공장의 클린룸 수준으로 관리되고 있는 내부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만, 원래 많은 직원들이 근무했던 곳을 자동화했기 때문에 빈 공간이 많아 휑한 느낌을 주었고, 그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이고 그의 숨소리조차 울릴 정도로 실내는 고요했다.

    주조정실에 들어선 그는 잠시 앉아 있다가 나왔다. 몇 개의 스크린에서 항상 점검하는 사항들이 조용하게 흘렀지만, 이미 그가 온라인으로 거의 날마다 보는 정보들이었다. 주문, 생산, 배송은 물론이고 연구개발까지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완전무인회사. 역시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 회사 건물은 낯설기만 했다. 유전자 조작/제작실도 마찬가지로 건조하고 깔끔하고 살풍경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최첨단 블랙박스들의 정연하고 정적인 배치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죄다 큰 상자 속에 작은 상자를 넣는 게임 같기도 했다. 건물이라는 커다란 상자 속에 방이라는 상자를 넣고, 그 안에 다시 크고 작은 상자들을 넣은 다음, 그 속에서 유전자를 잘라 붙이고 배양하는 그런 그림.

    그리고, 마침내 그 특별한 상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바로 아내가 빠졌던 그 배양조. 그날의 끔찍한 광경이 떠올라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호흡이 빨라짐을 느끼며 눈을 다시 떴다. 중앙에 있는 그 하얀 상자는 길쭉하기도 하여 언뜻 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자 자체는 5년 전과 같은 상자이겠지만, 그 배양조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부품들은 무인자동 유지보수 시스템에 따라 새것으로 교체되었을 수 있었다. 그 방 안에 있는 많은 부품들이 그러할 것이었다. 어쩌면 어떤 상자들은 통째로 교체되거나 자리를 옮겼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내 생각에 한번 빠지게 된 그는 시선을 그 배양조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날의 광경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 -. -.”

    정적에 휩싸여 있던 무인실에서 작은 경보음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배양조에 붙어 있는 철제 사다리를 두 손으로 붙든 채였다. 손아귀는 하얗게 핏기를 잃었고 몰아쉬는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경보음은 나직했다. 건물 내 어디에선가 기척이 나더니 점점 커지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그는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여 물리적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 곧 로봇이 등장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공장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그를 제압한 다음, 미리 연락해서 건물로 오고 있는 혹은 이미 대기하고 있는 경찰차나 앰블런스에 인계하려 할 것이었다. 그는 일단 배양조 사다리에서 손을 떼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벽쪽에 붙어 있는 철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난 괜찮아. 앰블런스도 경찰도 필요 없어. 내 상태를 보면 알겠지만.”

    그는 가장 가까운 천정 구석에 있는 감시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원예가 김성록으로부터도 비슷한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또한 자신의 무인 농장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의 무인 공장처럼 “블랙박스 속에 블랙박스가 들어 있는” 양파 같은 구조로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표준 모델이라 하더군. 그처럼 무인 자동이 되지 않으면 요즘 세상에서는 사업 자체가 불가능하다면서 어찌나 야단이던지. 은행은 무이자 대출을 해주겠다고 하지, 정부는 세제 혜택까지 준다고 난리를 치니,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우리에게는 블랙박스이지만 그들에게는 투명상자가 되는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저들이 그렇게 알아서 열심을 낼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김 노인의 말은 그럴 듯하였다. 회사나 공장의 소유주보다 은행과 정부가 더 잘 아는 구조. 하기야 무인 회사가 대세가 되기 훨씬 이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탈세를 방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정부는 말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탈세는 근원적으로 차단된다. 하지만, 정부의 '탈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기 마련. 모든 회사가 속속들이 정부에게 노출되는 대신, 경제 그 자체에는 나쁘지 않은 영향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생산과 소비가 전체적으로 최적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직접 운영할 때 그는 늘 오리무중 암중모색일 수밖에 없는 영업과 마케팅이 막막하기만 했는데, 그의 무인 회사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아서 수집하는 데다 정부 컴퓨터와의 접속으로 시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건네받아 따로 영업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해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해피에 어떤 유전자들이 들어갔는지 알고 계시지는 않은 거겠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해피에 들어간 어떤 유전자는 저희 회사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는데, 지금까지 그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도 못해봤거든요.”

    회사 컴퓨터가 다 알아서 하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 알아보고 나서 연락하지. 그런데 '해피'는 또 뭐요? 강아지 이름 같기도 하고.”

    강아지 이름이 맞습니다. 김 사장님 회사에서 이번에 구입한 야광식물에 제 아들이 죽은 강아지 이름을 붙였지 뭡니까. 다섯 살짜리가 엉뚱한 면이 좀 있지요.”

    결국 헤잇니스 박사는 궁금증을 풀 수 없었다. 조엘에게 일어나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의 원인은 헤잇니스의 요즘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하고 관심이 가는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는 만사 제쳐두고 이 일을 파헤쳐보려고 나섰던 것이다. 다만, 김성록 원예가를 두번째로 찾아가 보아도 별 단서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식물에서 신의 손길을 탐구하고 경탄한다는, 그야말로 식물에 흠뻑 빠져 있는 김 노인쪽을 탓할 수 없는 것이, 헤잇니스 자신 또한 5년 만에 들어가본 회사에서 따로 찾아낸 정보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자동화된 회사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설립하여 자신이 백퍼센트 소유하고 있는 회사에서 기술자산 내역, 영업 비밀, 고객 정보 등 그 어떤 정보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우리도 정부 투명성 제고를 위한 법 때문에 예전처럼 아무 자료나 막 뽑아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실은 컴퓨터가 자료를 주기는 하는데 그게 너무 방대한 자료라서 있으나마나 하거든요. 그러니까 '투명성'이란 단어는 빅데이터를 분석할 능력이 있는 정부 컴퓨터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요.”

    헤잇니스가 접촉한 정부당국자의 무기력한 답변은 가관이었다. 더군다나 예상한 대로였지만, 김 노인으로부터도 똑같은 답을 받아들고 그는 '해피'의 유전자 지도를 찾아보려던 일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회사 경영에서도 손을 뗀 지 오래라, 재미있는 나름 '연구과제'라고 생각하고 덤벼들었던 것인데, 여의치 않으니 다시 천지인의 궁궁한 도리를 탐색하는 자리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유전자 조작과 생산, 야광식물의 설계와 생산. 이런 것들은 어차피 자동화할 수 있는 일들에 지나지 않으니, 그냥 컴퓨터에게 맡겨 놓고, 인간은 인간 본연의 창조적이고 재미있는 일거리로 돌아가는 게 낫겠지.)

    헤잇니스 박사의 무의식의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 현장의 자동화를 추진하는 정부의 대표적인 홍보문구와 매우 닮아있다는 사실을 지금쯤 헤잇니스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엘이 해피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나는 그냥 즐기면 될 상황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겠지.”

    헤잇니스 박사가 입 밖으로 낸 혼잣말이었다. 단순한 생산노동에서 해방된 인간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어떤 면으로서는 '소외된' 것이겠지만.

    (인간이 어떻게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겠어. 그건 신성모독에 이를 수 있는 욕심이야. '블랙박스'라 해도 괜찮아. 컴퓨터가 계속 복잡해지다가 일정한 경지를 넘은 것 같아. 경이롭고 신비로운 대자연의 일부, 신의 일부라고 보는 게 더 마음 편할 수 있는 거거든.)


    해피가 입주한 지 반년이 지나기 전에, 조엘은 휠체어 로봇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타기 시작했던 유모차이기도 한 휠체어 로봇이었다. 해피가 곁에 있으면 조엘은 해피뿐 아니라 주변 사물들도 어느 정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선명도가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해피가 조엘이 감지할 수 있는 스펙트럼 영역에서 빛을 내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해피의 '야광'에 조엘의 눈이 적응해간다고도 볼 수 있었다. 안과나 광학연구소에 찾아간다면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겠지만, 헤잇니스 박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엘에게 자칫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게 될까 봐, 그리하여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 조엘의 상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까 봐 걱정이었던 것이다. 무지개가 떴을 땐 감상을 하면 될 일이지, 분광기를 들여다 볼 일은 아니란 생각이었다.

    새벽에 전등이 잠시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있었지만 캘리포니아에선 귀한 비가 내린 토요일 아침. 지진에 깨었는지 조엘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게 위아래층을 오가고 있음을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귀 기울여보면 조엘의 쿵쾅거리는 발소리에 묻혀 있긴 하지만 확실히 바람소리 같은 해피의 발걸음도 들렸다. 마지막에는 그 두 발걸음이 바람처럼 그의 침실로 향하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조엘과 해피가 쏟아져 들어왔다.

    아빠, 무지개야!”

    조엘이 외쳤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아침 햇살에 창 가까이 심겨 있는 나무와 골프장 잔디에 잔뜩 달린 이슬방울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 사이 너머로 아직 어둑한 서쪽 하늘을 배경으로 진한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그는 무지개를 한번 보고 조엘의 해와 같은 밝은 얼굴을 한번 보기를 되풀이했다. 가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용솟음쳤다.

    무지개가 잘 보여?”

    그는 조엘을 들어올려 안으며 창가에 섰다. 해피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아빠, 우리 밖에 나가. 무지개 보러 나가자.”

    조엘은 아빠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시력을 회복한 눈초리였다. 햇빛과 기쁨으로 반짝거리는 조엘의 눈동자는 참으로 영롱하고 사랑스러웠다.

    조엘과 해피는 일루소길을 따라 단숨에 언덕 위로 올라갔다. 장관이었다. 무지개 양쪽 끝이 낮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도시의 평원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한 쌍의 터치다운! 그는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감동에 젖은 그를 그 자리에 두고 조엘과 해피는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핑크하우스일 것이다. 지붕을 꽃분홍으로 칠해 이웃들의 빈축을 샀던 노부부가 살고 있는 집. 길거리에 면한 커다란 온실이 그들의 목적지였던 것이다. 그가 천천히 언덕을 걸어내려가 그곳에 도착할 때쯤 그들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까 그 언덕 꼭대기에 되돌아온 것은 모스카다, 파드리노, 티에라 루나 길들을 따라 큰 직사각형을 그리는 산책길을 다 돌고 난 뒤였다. 무지개는 이미 스러지고 서쪽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은 흩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그 하늘, 그 땅, 그 사이 공간을 휩쓸고 지나가는 상쾌한 바람까지.

    (, 행복하다!)

    언덕 아래에서 전동 골프 카트가 올라오며 위잉 소리를 냈지만 그의 행복감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그는 카트에 타고 있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서쪽 하늘과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도시의 도로와 건물과 거기에 빈틈없이 스며들어 있을 숱한 사람들을 육신의 눈으로 마음의 눈으로 감상하였다.

    ~~!”

    등 뒤에서 들려오는 티샷의 경쾌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경쾌함은 곧 뒤따르는 외침과 소란함에 묻혀버렸다. 헤잇니스 박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돌렸다. 길 건너에 있는 3번홀 티 박스에 한 사내가 엉거주춤 서 있고 다른 사내는 페어웨이를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사내가 달려가는 직선 상에 두 개의 작은 물체가 보였다. 바로 조엘과 해피였다. 그도 달리기 시작했다.


    김성록 원예가의 하루는 늘 한결같았다. 평지에 우뚝 솟은 산동네 마을 초입 오른쪽에 자리잡은 낮은 새끼봉우리에 지은 집. 조지아의 아침이 밝으면 그는 먼저 개 두 마리와 고양이를 이끌고 집 주변을 한바퀴 돌았다. 집 뒤뜰에 조성한 자그마한 텃밭에는 바로 찬거리가 될 수 있는 채소를 심어놓았으니 날마다 커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눈도 입도 즐겁자고 하는 일이었다. 텃밭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언덕 후미진 곳에 그의 '원예연구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야광식물을 비롯한 유전자조작 식물을 연구, 생산, 판매하는 곳이었다. 그 겉모습은 친근한 이동주택 형상이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헤잇니스 박사의 인더스트리 공장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는 그 건물도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무화과 나무, 야생포도 나무를 돌아보고, 언덕을 내려가 5에이커씩 두 군데로 나뉘어 있는 땅으로 갔다. 그때 쯤이면, 십중팔구 텃밭 돌아보는 사이에 고양이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난 뒤였다.

    한 곳에는 밭벼, , 옥수수, 아마란스를 심어 놓았고, 그리고 다른 한 곳에는 수십 수백 가지의 작물이 모자이크를 그리고 있었다. 그가 직접 가꾸는 곳은 집 뒤 텃밭뿐, 이곳은 농사로봇이 경작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가 어떤 작물을 심을지 결정하면 농사로봇이 씨뿌리고 물 주고 거름 주고 잡초 뽑고 수확했다. 그는 둘러만 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왕성하게 자라는 작물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그는 유전자조작 식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자연은 신이 창조한 그대로,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아름다움의 극치에 다다라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예연구소가 무인자동화되고 컴퓨터가 연구개발, 생산, 마케팅까지 모두 관장하게 되자, 그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부디 그의 연구소 컴퓨터와 정부 컴퓨터가 잘 알아서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유전자조작이란 작은 신성모독을 감수한다면, 그 결과는 몹시 흥미로운 것이었다. 야광식물이 특히 그랬다. 작은 화분이 야간전등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은 압권이었다.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적어도 화분 하나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닌가.

    ! 이런!!”

    밭둑을 따라 노란 꽃이 점점히 박혀 있는 광경이라니. 아침 햇빛에 그 작은 노란 꽃들을 그를 숨막히게 했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엉덩이로 선선한 흙덩이의 기운이 전해졌다. 곧이어 엉덩이를 공중으로 들어올리고 상체룰 숙여 꽃에 눈과 코를 바짝 들이댔다. 시야에는 노란색이 일렁였고 코로는 꽃 크기만큼이나 작고 은근한 향이 들어왔다. 지나는 사람도 볼 사람도 없었지만, 남들이 본다면 영락없이 작은 꽃에 큰절 하고 있는 그런 모양새였다.


    헤잇니스 박사는 조엘의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골프공에 맞은 것은 조엘이 아니라 해피였다. 눈앞에서 해피가 작동불능이 되고, 해피와의 접속이 끊어져 말 그대로 자기 눈앞이 깜깜해지자, 조엘은 공황 상태에 빠져 기절하고 만 것이었다. 다친 곳은 없었다. 해피는 야광식물이 심겨진 부분 바로 아래, 즉 화분 로봇의 두뇌 부분에 공을 맞은 것인데, 공은 화분 로봇의 얇은 껍데기를 뚫고 들어갔다.

    그는 로봇 회사에 연락했다. 그 다음날 소포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그 안에는 부품들이 들어 있었고, 그 소포를 배달하러 온 로봇 운전사는 바로 수리 로봇으로 변신하더니 배달한 그 부품으로 해피를 대뜸 고쳐버렸다. 그뿐 아니라 야광식물이 심겨진 화분 부분에 역시 가져온 각종 거름과 지렁이까지 넣고 사라져 버렸다. 해피 역시 자동화의 세례를 받은 영역인가 보다 했다.

    해피의 수리와 함께 조엘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해피와 조엘은 하나로 접속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해피는 조엘의 눈이 되어 길잡이 노릇을 할 뿐만 아니라 조엘의 뇌에 접속하여 활성화시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기야 뇌 구조상 눈을 뇌의 연장, 곧 뇌로 봐야 한다고 하였으니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지만.

    조엘, 골프공 조심해야 된다고 여러번 얘기했는데, 골프장에 들어가면 어떡해? 너는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해피가 다쳤잖아.”

    집이 보여 집에 가려고 했는데. 그리고 거기에 아무도 없었는데...”

    조엘은 다시 나가 놀겠다고 야단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골프장에서 나온 변호사였다. 클럽하우스는 집에서 건너다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오전의 사건에 대해 벌써 소식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골프장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아가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골프장이 먼저 있었고 집이 나중에 들어온 것이니, 골프공에 의한 피해는 집주인의 책임이라는 익히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혹시 골프공 요격 시스템에 대해 아시는지요? 티박스에서 좀 가깝긴 하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충분히 잘 작동할 겁니다. 티박스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티샷 감지기와 연동하는 드론 방패인데, 집 창문과 지붕에 떨어지기 전에 드론이 막아주기 때문에 쇠창살 같은 흉물스러운 것은 달아놓을 필요가 없어 집을 더 예쁘게 꾸밀 수 있지요. 드론은 24시간 작동하는 거대한 방패인 셈입니다.”

    변호사가 2층 침대에서 어느새 내려와 헤잇니스 박사의 옆에 서 있는 조엘과 해피를 힐끗 바라보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런 게 있었던가요? 무슨 미사일 요격 시스템 같군요. 역시 과학기술의 과잉이네요. 그것도 완전자동이겠고.”

    그는 그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변호사를 돌려보내고 돌아서려는데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이미 이층에 올라가 있던 조엘과 해피가 계단 위에서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이층에 그대로 있으라고 손짓을 했다.

    토요일에도 참 부지런들 하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의 사람과 한 대의 로봇. 사람은 맨몸이었고 로봇은 옆에 바퀴 달린 공구상자 같은 것을 붙잡고 있었다.

    로봇 수리 요청을 하셨죠? 먼저 로봇을 볼 수 있을까요?”

    로봇.. 어제 이미 수리를 끝냈는데요. 새 부품을 배달한 운전사가 바로 수리를 한 건데..”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헤잇니스를 어깨 너머로 이층 올라가는 계단을 살폈다. 조엘도 해피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회사에 확인해보죠.”

    그러고 보니 그 수리기사는 연세 지긋한 노인이었다. 로봇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장승처럼 서 있는 사이에 수리기사 노인은 차로 가서 한참만에 되돌아왔다. 의아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상하군요. 저희 회사에서 수리 부품이나 수리기사 로봇을 보낸 적은 없습니다. 일단 로봇의 상태를 볼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죠. 조엘! 해피! 아래층으로 잠깐 내려올래?”

    계단 난간쪽으로 간 헤잇니스 박사는 이층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 기척도 없었다.

    잠깐만요. 애가 워낙 장난꾸러기라서.”

    그는 얼버무리고 나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오른쪽으로는 곧바로 헤잇니스 박사의 침실이었고, 왼쪽 복도로 가면 조엘의 침실과 놀이방이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침실은 조용했다. 놀이방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 조엘과 해피가 들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조엘? 해피?”

    그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두드려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들어간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창문가리개가 닫혀 있어 어둑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조명을 켰다. 벽 옷장 문이 닫혀 있는 것으로 보아 거기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조엘, 숨박꼭질 그만 하고 해피 데리고 내려가자. 로봇 수리기사 아저씨가 해피를 한번 보고 싶대. 제대로 고쳐졌는지 볼 건가 봐.”

    옷을 헤치자 먼저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조엘이 보였다. 해피의 반짝이는 유리공 머리는 조엘 머리 뒤로 살짝 보이고 있었다.

    저 아저씨 안 볼래. 해피가 무섭대.”

    그게 다였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 없었다. 아이가 싫다는데 억지로 보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 좋아보이는 수리기사를 이층으로 올라오게 해서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화분 로봇이 정상작동하고 있으니 일단 더 지켜보기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참 희한한 일이군요. 우리 회사에서는 수리 팀을 파견한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되돌아갔다. 조엘과 해피는 한참 동안이나 더 옷장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와 식탁에 앉아 창밖으로 어두워지는 골프장을 내다보았다. 몹시 불편한 느낌이었다. 모든 게 자동으로 알아서 돌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블랙박스 밖으로 추방되어 그저 편안하게 살아주기만 한 세상, 자기 회사의 영업 내역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불편했다. 수리기사는 분명히 수리로봇의 통역 정도로 따라온 것이리라. 로봇이 만들고 로봇이 유지하는 로봇의 바다 위에 자신이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방문했던 로봇 수리기사입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수리부품을 주문한 사람의 이름은 '해피'라고 하는데..”

    이번에 맞딱뜨린 블랙박스는 유난히 짙은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는 느낌이었다. 전화를 끊고 뒤돌아 앉은 그의 앞에 해피와 조엘이 내려와 있었다. 뭔가 낯설었다. 해피가 조엘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리공 화분 안은 흙만 그대로일 뿐 텅 비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빠, 그 아저씨가 해피를 데려가는 건 아니지?”

    앞으로 나선 조엘의 머리 위에 야광식물이 올려져 있었다. 정수리 위에 작은 보리수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위에서 아래로 쭉 흘러 내려갔다.

    조엘, 이게 어떻게, 어떻게..”

    , 이거?”

    조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으로 야광식물을 조심히 잡아내려 화분 위에 놓았다. 뿌리는 자석이라도 붙은 냥, 흙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뿐이었다.

    해피라는 블랙박스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인가. 조엘에게 해피는 눈일까, 뇌의 일부일까, 아니면 화분 로봇을 조종하는 바이오칩 중앙처리장치일까. '해피'라는 저 야광식물, 애완식물 속에는 어떤 유전자들이 들어가 있을까. 빛과 눈과 전기. 그러고 보니 해피는 하나의 완벽한 분재처럼 들여다보면 볼수록 거대한 보리수 나무를 축소시켜 놓은 것 같았다.

    해피는 왕관이야.”

    조엘이 뜻도 모를 말을 했다. 조엘은 어느새 해피를 자신의 정수리 위에 올려놓았다. 어둠 속에서 해피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주변 사물을 지우자 눈앞에 거대한 보리수가 떠올랐다. 보리수는 조엘의 두개골을 파고 들며 빛나는 뿌리를 뻗어내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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