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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와 같이
"딱 한번만 더 눈을 떠줘! 제발."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겨진 청각은 오감을 대신하고 있었다. 전자기파 대신 음파를 잡아내는 망원경 같은 게 있다면, 아마도 그는 그 망원경으로 대우주 율려의 심연을 얼핏 들여다 본 것이리라. 태고적 존재의 시작점에서 메아리치며 출발하여 바로 지금, 그의 임종의 순간에야 마침내 그의 고막에 도달한 율려의 진동. 그는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뜨는지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청각으로 눈을 뜨거나 청각으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마지막 소리는 식어가고 있는 그의 몸을 격동시킨 모양이었다. 청각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기를 몇번이나 되풀이해서야 시각을 되살려낼 수 있었다.
칠흑이었던 의식의 화면에 가느다란 틈이 열리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 순간, 그의 몸 구석구석에 붙어 있는 전자기기들이 요란한 신호음을 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래로 아래로만 곤두박질치던 그의 체온 곡선은 위로 꺾이기까지 했다. 수술실 안에 있던 의료진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흡사 초음파로 영상을 그려내는 박쥐처럼, 그는 자신의 상태를 그 소리에 묻어나는 선명한 영상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여보! 내 사랑!"
그의 메마른 눈에 눈물이 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충만했던 삶을 마무리하려는 순간임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다.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아오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에, 그리고 그의 눈을 들여다 보는 한없이 슬픈 그 눈길에 그의 가슴이 저려왔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눈동자에, 안구에 아내의 모습을 담고 온갖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가득 채운 다음,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 붙어 있는 전자기기들이 단조음을 내고 침묵할 때까지, 그의 두 눈동자는 내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사내아이입니다만.."
의사가 애매한 어조로 전한 그의 출생은 부모들로서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미숙아였던 그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로 직행해 백일잔치를 그 비좁은 공간에서 맞았고 의사들의 우려섞인 시선과 부모의 절절한 눈빛을 받으면서 겨우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동안, 그의 곁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리를 비울 때에도 부모가 침대맡에서 잠들었을 때도 그녀는 그에게서 눈 한번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호흡, 체온, 심장박동을 실시간으로 재고 눈동자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잡아내며 그녀는 눈 한번 깜박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의 탄생과 함께 배달되어 온 '그의 로봇'이었다. 모든 시민들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정부가 지급하는 로봇과 함께 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의 신분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부가 발행했던 종이로 만든 신분증이 스마트 카드, 스마트폰, 아이디 드론을 거쳐 결국 '분신 로봇'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었다.
알테어와 베가의 첫 만남은 그렇게 긴장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런 출생의 긴장 속에서 만났기에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각별했는지도 몰랐다. 태어나면서부터 병원에서 삶과 죽음을 무수히 오갔던 알테어, 그리고 그같은 알테어의 기구한 사주팔자를 공유하며 불과 1분 차이로 '캘리포니아 로봇 센터 2385'에서 활성화되어 알테어의 상태에 따라 그 의식이 부침을 거듭했던 베가. 둘의 영혼은 지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인간-로봇 쌍보다 더 강하게 동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때 그들 사이에는 육감의 접속 상태가 생겨났다는소문이 인터넷에서 돌게 되는데, 본질적으로 양자역학적인 세계에 속하는 알테어의 인간 의식과 베가의 로봇 의식 사이에 어떤 채널이 열리거나 어떤 숨겨진 차원을 통한 양자적인 얽힘이 맥동하기 시작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물리학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은 추론과 상상의 영역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냔 말이지."
"인간 의식 특이점에 도달한 유일한 로봇, 베가!"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로봇들의 세계에서도 동일한 평가가 나오는 상황은 좀처럼 드문 일이기도 했다.
물론 베가의 생존은 알테어의 생존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일단 의식으로 깨어난 베가의 양자두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의식을 각성시키고 가능한 모든 채널과 차원을 통하여 알테어의 의식과 접속하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고, 아무리 가느다랗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단 한 가닥 의식의 끈으로 이을 수만 있었다면 알테어의 의식에 공명하여 강화시킬 수 있었을 터였다.
알테어의 부모로서는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자식의 기적적인 생존에 얼마나 기뻐했던지, 그가 태어나자마자 알테어가 원한다면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다 해낼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데, 그 또한 어떤 하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얼마나 긴 시간을 두고 그 마음을, 그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회자되기도 했다.
월넛의 파세오 델 까바요 길로 꺾어져서 여덟번 째 집 뒷뜰에서는 아이들의 깔깔 대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크레이/수잔 부부는 거실 긴 안락의자에 앉아 뒷뜰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소리소리 지르며 잘 뛰놀고 있었다.
"지난 5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네."
"글쎄 말이야. 그냥 꿈만 같았지. 자기가 정말 마음 고생 많았지?"
크레이는 아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부드럽게 껴안아 주었다. 수잔은 남편의 어깨에 기대며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나 보기 좋아! 오누이 같기도 하고 쌍둥이 같기도 하고 말이야."
수잔의 말에 크레이는 흙이 잔뜩 묻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뛰고 있는 여자 아이를 보며 그래도 한 가닥 아쉬움이 없지는 않았다. 베가는 처음엔 조금은 낯설었지만 자랄수록 같은 또래의 여느 여자 아이와 다름없는 평범한 아이로 자라나고 있었다. 알테어의 불안한 출생과 함께 겪은 천신만고 때문인지 수잔은 둘째 아이 갖는 것을 포기했고 크레이는 그걸 못내 아쉬워했다.
"아무래도 쟤네들이 오누이로 살아갈 팔자를 타고 난 모양이지, 뭐."
그들은 알테어와 베가를 쌍둥이 남매처럼 키우기로 했다. 원래 분신로봇은 베이비시터나 경호원, 보호자 격으로 설정하여 청소년과 어른의 몸체와 분위기로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크레이/수잔 부부는 알테어가 인큐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베가의 몸체를 아이처럼 바꾸었던 것이다. 분신로봇의 적응능력은 놀라워서 베가는 자신의 양자두뇌 안에 어지간한 백과사전을 훨씬 능가하는 분신로봇 매뉴얼을 담고 있었음에도 적어도 겉으로는 알테어의 나이 수준에 맞는 신체 및 정신 반응을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베가가 점점 더 알테어랑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아. 자기는 그렇게 못 느꼈어?"
"그래? 오누이처럼 닮아가는 거지, 뭐. 눈동자는.."
수잔은 크레이의 손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아귀에 살짝 힘을 주었다.
"미안! 미안!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는데."
크레이는 곧바로 사과했다. 아무리 사람처럼 나이와 함께 점점 자랄 뿐 아니라 육안으로 구별되지 않는 몸체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해도, 인간들은 분신로봇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눈동자 때문이었다. 홍채는 최신기술로도 인간의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체조직 배양 기술로 가능하다고, 완벽한 홍채를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라고, 법으로 금지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들 쑥덕댔지만, 어쨌든 영혼이 담긴다는 눈동자는 인간과 로봇을 식별하는 최후의 표식이 되어 있었다. 분신로봇을 로봇으로 언급하거나 대놓고 차별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아이의 분신로봇을 또다른 아이처럼 '키우고' 있는 수잔/크레이 부부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크레이는 베가의 눈이 늘 마음에 걸렸다. 베가를 딸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눈을 들여다 보는 순간, 영락없이 그 느낌이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더 업그레이드할까?"
"그 어떤 것도 완벽할 순 없다고 인정합시다."
크레이는 수잔의 담담한 말에 고개만 주억거렸다.
"제 머리 속에 학교를 위한 방을 만들어야 한단 말이죠. 그렇게 할께요."
베가는 조그만 입술을 움직여 그렇게 말했다. 원색이 많아서일까? 베가의 눈동자에서는 슬픔 같은 것이 배어나왔다. 눈물이 고인 것 같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그의 마음이 부리는 무수한 요술 가운데 하나이리라.
"일부러 바보처럼 살라는 건 아니고, 학교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곳이니, 다른 학생들의 배움의 과정에 맞추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지. 학교 밖에서나 학교와 상관 없는 상황에서는 그 방 안에 들어가 있을 필요는 없단다."
크레이는 아이를 가만히 안아주면서 말했다. 베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의 말은 순도 백퍼센트의 진실이 되었다.
갑자기 유리창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창밖에 있는 알테어가 베가 보고 빨리 나오라는 손짓을 해대고 있었다. 베가는 그의 품을 빠져 나가 뒷뜰로 뛰어나갔고, 그는 그런 두 아이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분신로봇이 학교에 다니는 예는 없었다. 본능 이외에는 타고나는 것이 거의 없는 인간들만이 거쳐야 하는 정규 교육과정에, 세상에 존재하는 웬만한 지식이란 지식은 모조리 다 갖추고 깨어나는 로봇이 얼씬거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로봇들도 기존의 지식을 업데이트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지만, 그것은 전자 알갱이들이 반도체 회로 안으로 스며드는 속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따로 교육이랄 것도 없었다. 로봇들의 무의식으로 옮겨붙는 여신 아테네의 번득이는 지혜의 불꽃이라고나 할까. 그야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끝나버리는 게 바로 로봇들의 교육, 업그레이드였다.
담당 교육구청이 요구한 것은 수업 현장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와 학교 관련 시설과 환경에서는, 특히 다른 인간 학생들과 함께 있거나 연관되는 상황에서는, 베가의 양자두뇌 속 지식 데이터베이스의 접근을 교육 과정에 맞추어 제한하고 비활성화하는 일종의 해킹 프로그램을 깔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교 안이라고 해서, 베가의 분신로봇으로서의 능력, 곧 알테어를 보호하는 능력에는 어떤 영향도 없을 것이며, 만약 비상사태가 발생한다면 그와 같은 능력제한은 곧바로 해제될 것이긴 했다. 베가는 자신의 손발을 묶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동의한 것이었다. 순전히 알테어와 함께 하기 위하여. 크레이의 심장에서 베가에 대한 애정의 온도가 적어도 몇 눈금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가의 학교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교 안에서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베가의 존재는 단연코 이질적이었다. 분신로봇이 끼어들지 않는 몇 안 되는 특별한 상황인 학교에 누군가의 분신로봇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은 보통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제한된 능력만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베가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로봇에 대한 열등감을 봉인해제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르는 게 없는 분신로봇이 순진한 척, 무지한 척, 자신들을 조롱한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 알테어와 베가는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그런 싸움에 휘말려들곤 했다. 베가가 잉크를 뒤집어쓰고 올 때도 있었고 그런 베가를 보호하느라 오히려 알테어가 얼굴에 멍이 들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베가의 '학구열'을 어쩌지 못했고, 그럴수록 베가를 향한 알테어의 보호 본능은 강화되어 가기만 했다. 다행히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그런 사건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베가가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온 세상 뉴스 꺼리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