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 남태령을 넘어 사당사거리에 도착하니 고속버스 출발 시간이 딱 10분 남았다. 미리 끊어둔 차표를 포기할까 망설이는 순간 마침 바로 앞에 택시가 와 선다. 그래? 내친 김에 한번 내질러나 보자. 택시 기사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괜찮을까? 에라,모르겠다. 일단 타고 보자. 다짜고짜 10분 안에 터미널에 도착하면 요금을 두 배로 주겠다며 손가락 두 개를 뽑아 흔들었다. 녹색 레이 밴 선글라스가 잠깐 멈칫하더니 차갑게 씨익 웃는다.
“가봅시다.”
아,글쎄 이 기사가 그때부터 밟아대는데 난 진짜로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신호등이고 횡단보도고 중앙선이고 교통순경이고 깡그리 무시하고,앞 뒤 옆 차 자전거 오토바이 상관 없이 무작정 밀어붙이는데,이건 벌집 쑤신 정도가 아니라 대책 없이 날뛰는 코뿔소를 올라탄 모양,도무지 무섭고 기가 막혀 이리저리 내다 쏠리는 몸을 가누느라 무릎이 뻣뻣하고 등판이 진득거리며 죽어라 움켜쥔 손잡이가 다 미끈거렸다.
“하이고,이거 오늘 실수했나보다.”
그 와중에도 자기는 월남에서 비밀특수부대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베트콩을 수도 없이 잡아 죽였으며 지금도 웬만한 젊은이 두엇은 전혀 문제 없다고,이 사진 좀 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안 볼 수가 없다. 그 때도 지금과 똑같은 레이 밴 선글라스를 끼고 동료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찍었는데,다들 고만고만한 키에 비슷비슷한 머리에 울퉁불퉁한 광대뼈에 까무잡잡하게 그을려 누가 누군지 전혀 구분이 안 간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김을 뺄 순 없다.
“화,어쩐지”라고 한 번 추어주었더니 그냥 휘이익 중앙선을 넘는다. 한 번 더 추어주면 우린 같이 죽는다. 교통순경이 깜짝 놀라 손가락질을 하며 호각을 불려다 말고 으다다다 비켜난다. ‘아니,저저저….’ 욕이 날아오는 게 보이지만 차가 더 빠르다. 순경이 수첩을 꺼내기도 전에 택시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무리 ‘미치광이 람보’에 ‘신성한 임무’라도 그렇지,하마터면 백주대로에서 교통순경을 칠 뻔했잖은가. 그래도 솜씨는 솜씨다. ‘위반’은 했어도 사고는 없었다. 왕년의 열대밀림 대신 오늘은 서울시내를 누빈다. 월남에서 어떻게 일했는지 대략 알겠다. 혹시 월남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미쳐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시간은 점점 더 빨리 흐른다. “초조하다.” 한 마디 했더니 즉시 중앙선을 넘는다. 마주 오는 차들이 놀라 일제히 번쩍거리고 빵빵거린다.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싸악 번지는가 싶더니 끼이이익,영화에서처럼 휘청거리며 제 차선으로 들어온다.
이렇게까지…한 몇 분 빨리 가려다가… 햐,이거 오늘 완전 벌집 쑤셨나보네. 어떡하지. 지금 와서 세우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도 설마 죽기야 하겠나. 나도 사나이다. 무서워도 입 꾹 다물고 참자.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니야,이런 차를 타고 무서워 벌벌 떨면서도 사나이라고,오로지 사나이라고,그저 입 꾹 다물고 참다가 꼼짝없이 함께 죽은 치들도 꽤 있을 거야. 누구든 하나만 나서서 말리면 되는데,누구라도 아무 말이나 한 마디만 했으면 됐는데,끝내 끝끝내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진짜로 문제가 생긴 경우도 당연히 있었을 거야. 그럼,그럼. 그런 상황에서 사나이가 입을 연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고말고. 어쨌든 이번에 살아서 터미널까지만 간다면 내 다시는…. 오만 불길하고 재수 없고 터무니없는 생각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차는 진짜 10분 안에 도착했다. 정말로 도착할 수 있구나. 살았다. 드디어 지옥탈출. ‘고맙습니다,아저씨’ 하는 기분이다. 요금을 두 배에다 더 얹어 주고 나는 뛰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화아,다시는 미리 차표 끊지 말아야지. 아냐,다시는 요금 두 배 소리 안 해야지. 아니,미치광이 총알택시를 타면 안 돼. 아예 택시를 타지 마? 이렇게 짜릿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