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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만한 사람이 들려주는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연애 이야기
게시물ID : humorstory_4365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남아프린스
추천 : 6
조회수 : 106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5/20 14:12:13
길고 지루했던 군생활이 끝나고 드디어 학교에 복학을 하게 되었다.
 
말년에 연등까지 해가며,(내 전우들은 동프병장이 드디어 미쳤지만, 그래도 곱게 미쳐서 다행이라고 그랬었다.)
 
토익과 전공서적을 공부하던 나를 중대장님께서 기특하게 보셨는지,
 
전역 전 미리 학교를 복학하게 도와주셨고, 나는 말년휴가를 나와서 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
 
 
전역하고 다시 돌아온 나에게 학교란 행복과 동의어였다.
 
여학생과의 로맨스를 꿈꾸며 중세 암흑기였던 내 캠퍼스라이프가 르네상스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왁자지껄한 합동강의동에 가득 찬 병마용같이 생긴 학우들이 내게는 네버랜드의 인어들로 느껴졌다.
 
내가 듣던 수업 중 제일 좋은 수업은 회계학원리였다.
 
1학년 신입생들도 많고, 여학우도 참 많아서가 아니라 내 전공필수과목이기 때문이었다.
 
 
수업때마다 난 쉬지 않고 질문을 했고, 강의가 끝나면 나는 쉬지않고 알기만 한 여학우들에게 같이 밥먹자고 문자를 날렸다. 
 
 
한 때 유행했던 "울 애긔 오빠랑 밥먹을랭?ㅎㅎ 답장 없으면 과방으로 쳐들어간당? 넝담~"( ͡° ͜ʖ ͡°)
 
...그렇다. 지금 와서야 고백하지만 연서복이 바로 나였다.
 
 
 
뭐....어쨋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고, 생긴 것도 독립투사 김구의 젊은 시절같이 생겨, 공부를 잘하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내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학생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 타 전공하다가 교생실습나가는 4학년 여학생이 있었다.
 
여러 번 강의가 끝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새 서로 이름을 불러주는 꽃...아니 선후배 사이가 되었다.
 
비록 학년은 그녀가 졸업직전이지만, 학번과 나이가 더 높은 내가 오빠가 되었다.
 
친척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오빠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무죄선고를 받는 피고인의 기분이었다.
 
 
버스타고 집에 가면서 문자를 넣어볼까..아 이러다 저쪽에서 나랑 사귀자고 하면 어떡하나...혼자 망상을 하면서 히죽히죽 웃기도 했다.
 
아마 그 때의 내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바나의 발정난 하이에나의 웃음같이 보였으리라....
 
 
때는 흘러흘러 매미소리가 슬슬 들리고 땅에서는 아지랑이가 솟아오르는 더운 날,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택리지에도 인심이 사납고 기후가 나쁘다고 나오는 유서깊은 대구다.
아..오해하지 마라..노래방가면 '내 고향 대구'는 꼭 부르고, 제일 좋아하는 반찬도 대구포고, 영화 거짓말도 배경에 동대구역이 나온다고 해서 봤다.
난 이렇게 애향심이 투철한 사람이다.)
 
 
나는 내 얼굴 반 정도밖에 안되는 쌀집 계산기를 들고 열심히 시험문제를 풀고 있었다.
 
어느덧 시험 문제와 물아일체가 되고 내 정신이 평행세계를 지나 막 득도를 하려고 할 무렵.
 
'딱!'하고 내 뒷통수를 누가 후려 갈겼다.
 
'슬픈 꿈을 꾸었습니다.흐헝헝'하고 울 뻔 했지만, 대한민국 예비역 병장답게 순간적으로 상황파악을 끝내고,
 
시험감독관인 조교에게 '저 컨닝 안했어요. 억울합니다'라는 표정으로 뒤돌아보려는 순간,
 
썸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오빠 뒷통수에 파리가 앉아 있어서.....'
 
어이가 뒷통수와 함께 함몰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면 다 된 연애를 그르칠 수 있겠다는 대국적인 판단으로,
 
난 그저 '씨익' 살인 미소를 흘려 주면서 나오지도 않는 코를 훔쳤다.
 
지금 드는 생각인데 아마 그 여학생은 나의 살인 미소에 살의를 느꼈으리라.
 
 
 시험은 끝나고 이제 종강인데 못봐서 어떡하냐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 썸녀는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험기간이라 자리를 구하기는 본진 미네랄에 SCV가 붙은 모습을 방불케 했다. 다행히 나와 여학생이 앉을만한 자리를 곧 구할 수 있었다.
 
책과 노트를 자리에 세팅하고 나자 여학생이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야레야레.. 당신이 끓여주는 된장국이라면 얼마든지..'라는 개드립을 이성으로 즈려밟고, 학식센터로 발을 옮겼다.
 
밥을 얌전하게 들이키고 나서, 음료수 하나 마시자고 조심스레 제안을 하였다. 이건 나의 치밀하게 계산된 애프터 신청이었다. 
 
역시 여학생은 흔쾌히 대답했고, 난 신이 나서 고급스러운 로코코풍의 데자와 두 개를 따뜻하게 뎁힐 것을 복지관 직원에게 명했다.
 
비록 복지관 직원은 미친 놈 쳐다보듯 날 무시하였지만, 여학생과 차를 마시며 나눈 환담에 나는 더 없이 만족하였다.
 
시간은 흘러흘러 어느덧 10시. 20분만 지나면 막차버스가 끊기는 시간이 다가왔다.
 
난 이제 슬슬 고백해야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당당하게 가서 '애긔야! 사귀자! 내가 잘해줄게!'라는 터프하고 박력있는 A안과
부드럽게 다가가서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거지? 라는 섬세하고 달콤한 B안 사이에서 난 열심히 사다리를 타고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머리를 파묻고 사다리를 타고 있는데, 어느새 썸녀는 공부를 마치고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발랄한 그녀 뒤에 취준생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떡하니 서서 그녀가 가방정리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명석한 두뇌는 금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친오빠가 밤늦게 위험하니 데리러 도서관까지 왔구나. 역시 화기애애한 가족애인걸....
 
이라고 생각하는 찰나,
 
 
"저...오빠...나 남친이 데리러 와서 가는데, 오빠두 낼 시험 잘 보고. 다음에 봐~갈게~~"
 
 
라고 썸녀가 거지에게 적선하듯이 툭 내뱉고 가버렸다.
 
.
.
.
 
잠깐의 정적 후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그리고 난 울었다. 썸이 아니라서 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막차를 놓친 것에 대한 회한이었으리라...
 
그 날 나는 신천대로를 질러 집까지 3시간 동안 걸어갔어야 했다.
 
 
 
 
 
 
아...참고로 회계학원리는 C+을 받았다.
 
 
 
 
 
출처 10년 전 내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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