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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때 전경 증언...(기본지식으로알아두면좋아요)
게시물ID : lovestory_101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1
추천 : 12
조회수 : 51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04/02/15 03:28:23
우연히 인터넷을검색하다 이런건 알아두면 좋을꺼같아올립니다



증 언 자 : 박시훈(가명, 남) 

생년월일 : 1956.(당시 나이 24세) 

직 업 : 의무전경(현재 대학원생) 

조사일시 : 1989. 11 


개 요 

당시 의무전경(기동대)으로서 광주항쟁에 진압을 나온 박시훈(가명) 씨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진압과정에서 목격한 사실들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민중항쟁의 또 다른 피해자로서 그 심적 갈등을 토로한 내용이다. 


기동대에 배치받고 시위진압을 나가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를 광주에서 마쳤다. 대학 3학년때 순수문학에 심취하여 실존의 문제들을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문학도의 길을 걷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그러던 1979년 1월 13일, 입대를 하게 되고, 대학 재학생이 70퍼센트가 넘는 전경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동대에 배치받았다. 얼마 되지 않아 10.26으로 박정희가 죽자 기동대에서는 충격과 함께 일부는 긍정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면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고, 곧 기동대도 출동할 것이라는 말들이 은연중 나돌았다. 

1980년 3월 기동대는 공설운동장에서 전남지역 장정들(스타들)을 모시고 시위진압훈련 시범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굳이 이런 훈련을 하는 이유가 무얼까 하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4월과 5월에 기동대는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의 시위로 인하여 매일 출동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그 때문에 외출, 외박도 못 하는 대원들은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5월 10일 이후부터 학생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하고 도청 앞 집회 역시 경찰들과의 타협 속에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5, 16일 시위시에는 경찰이 시위대를 보호하듯 함께 돌아다녔고 시위행렬에 있는 친구나 후배들을 볼 수도 있었다. 


외박과 외출의 꿈은 깨지고 다시 출동 

5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확대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일단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마음에도 없는 생활을 버티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로서는 이제 계엄이 확대되어 당분간은 편해질거라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18일 아침, 모두가 들뜬 기분으로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시위진압으로 인해 허용되지 않았던 외출이나 외박을 보내준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시위진압을 하느라 스트레스가 무척 많이 쌓여 있었는데 뜻밖의 외출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고 대원들은 외박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9시 50분쯤 비상벨이 울렸다. 외박과 외출의 꿈은 무너지고 다시 지긋지긋한 출동이 시작된 것이다. 모두들 불만에 가득 차 투덜거리면서 진압 차림을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진압복, 가스탄, 플라스틱 방패, 방석모 50센티미터 정도의 곤봉으로 무장하고 1백80여 명의 1중대가 진압을 나갔다. 

나는 기동대내에서 내무반장을 맡고 있었다. 내무반장의 역할은 부대 안에서 소대원을 통제하고, 진압과정에서는 소대장의 지시를 받고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었다. 

전남대를 향해서 가는 도중 "시위대가 공원으로 가고 있다, 공원에서 금남로로 가고 있다"는 무전연락을 받고 방향을 바꾸어 가톨릭센터 앞으로 출동을 했다.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10시 30분이었다. 

이미 가톨릭센터 앞에서는 2백여 명의 학생들이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났다. 기동대는 그 광경을 지그시 지켜보며 서서히 진압준비를 했다. 처음 진압은 소대장과 분대장의 지휘체계를 갖고 신중하면서도 강력하게 진압해야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5-6분의 시간이 흐르고 소대장으로부터 사과탄 투척 명령을 받고 소대의 절반은 체포조, 나머지 절반은 투척조로 나누어 일단은 시위대 해산에 주력했다. 대원들은 일시에 방독면을 쓰고 방망이를 빼들었다. 

'사과탄 투척', '체포조 앞으로' 

하는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시위대를 향해 무섭게 쫓아갔다. 대원들은 데모하는 너희들 때문에 외박도 못 나가고 애인도 만나지 못했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방망이를 휘두르며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시켰다. 시위대는 동아극장 골목 등으로 피해 갔고, 나는 그들을 쫓아가는 대원들에게 때리지 말라고 말렸다. 삽시간에 시위대는 달아나고 우리 눈앞에는 잠시 시위대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위대가 다시 시야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위대와 기동대는 대치장소만 가톨릭센터 앞에서 광주은행 본점 앞 사거리로 바뀌었을 뿐 학생들은 오히려 시민들과 합세하여 '계엄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시위대가 밀려오면 기동대는 가스탄을 뿌리면서 해산시키려고 애를 썼고, 그러면 그럴수록 시위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시위의 양상도 투석전에서 그치지 않고 화염병이 나오는 등 격렬해져 갔다. 


공수부대의 갑작스런 출현을 보고 

오후 2시경 시위대가 밀려났고 기동대는 가스차를 앞세우고 진압을 하던 중 시위대열에서 갑자기 화염병이 날아와 가스차 앞부분이 불길에 휩싸였고, 이에 놀란 기동대원은 가스차 안에서 뛰쳐나왔다. 

3시, 시위대는 화염병 공격을 그치고 불붙은 택시를 밀어붙이는 등 필사적으로 싸웠다. 해산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점점 불어나는 시위대를 본 기동대원들은 진압할 가스탄도 부족할 지경이 되어 겁먹고 상기된 표정으로 있었다. 

4시가 채 못 되어 중앙극장 앞에 처음으로 공수부대가 나타났다. 현대극장 쪽에서 트럭이 오더니 현대극장 입구 금남로 사거리 쪽에서 공수대원들은 민첩한 동작으로 뛰어내렸다. 철모를 쓴 공수대원들은 M16을 등에 메고 대검을 허리춤에 찼으며 야구방망이만한 진압봉을 들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공수대원들은 훈련에서 비롯된 날렵함 외에도 눈빛이 번뜩거렸다. 

기동대원들은 갑작스런 공수부대의 출현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반면 의아스럽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공수대원들의 인상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살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또한 그들은 진압에 나오면서 임전태세를 갖추고 나왔을 것이며 명령에 의해서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훈련 속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공수부대의 모습을 본 시위대는 무서움에 한 순간 모두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은 아마도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방관자나 구경꾼들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도 같은 군인의 입장이었지만 무섭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시민들 역시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공수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진압자세를 취했고, 대장으로 보이는 지휘자는 '시민 여러분, 해산하십시오' 하고 핸드 마이크로 외쳐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대원들은 3-5명씩 무리를 지어 시위대를 향해 쫓아가 불문곡직하고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화발로 차는 등 터무니없는 무력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기동대는 중앙극장 앞에서 방패를 들고 겁먹은 표정으로 공수대원들의 진압과정을 지켜보면서 해도해도 너무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기동대는 목격자가 되어 다소 안정감 속에서 공수부대에게 적의를 느끼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시위를 자극할 뿐이었다. 

공수대원들은 시민들을 무작정 두들겨팬 뒤 기진맥진한 상태의 사람을 질질 끌어다 트럭에 실었다. 트럭에는 더 이상 실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사람들을 트럭에 던져댔고, 공수대원 2명은 트럭 위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을 차 바닥에 바짝 엎드리게 하면서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공수대원은 총을 들고 서서 마치 짐승 다루듯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사람들은 차 바닥에 엎드려 신음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등까지 살이 벗겨졌다. 

트럭은 불과 몇 초 만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잡혀온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트럭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마도 상무대나 31사단으로 옮겼을 거라고 짐작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은 계속되었다. 공수부대가 나타난 이후 기동대는 진압은 하지 않고 쉬면서 공수부대의 진압과정을 임무 수행하듯 지켜보았다. 

8시경 공수부대가 장악한 거리를 뒤로 하고 기동대는 부대로 복귀했다. 통금시간이 당겨진 이유로 9시경 점호를 마치고 바로 잠을 잤다. 

이날의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한 나는 대원들 2명과 함께 죽음의 도시, 칠흑같은 화정동 잿등을 지켜보며 소주를 마셨다. 대원 중 몇명은 너무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고 잠을 못 이루며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들 역시 공포와 분노를 느끼고 공수대원의 강렬한 인상과 참혹했던 진압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 


반항하면 팬티만 입힌 채 기압을 주고 

19일 월요일 아침 8시 기동대는 광주관광호텔 앞으로 출동했다. 금남로는 이미 차량이 통제되고 상가는 모두 철시한 상태였다. 공수대원들은 여전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을 통제, 수색하여 체포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오전 9-10시경 금남로 거리에 상당수 젊은이들이 눕혀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공수대원들은 개별적으로 반항하는 젊은 사람들을 팬티만 입혀서 금남로 바닥에 엎드리게 하고 군대식 기압을 주었다. 그들은 논산훈련소에서 마치 신병들 다루 듯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쪼그려 뛰기' 등을 시키는 것이었다. 

관광호텔 앞으로 잡혀온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기합을 받고 있을 무렵 경찰 작전 과장이라는 사람이 10여 명의 젊은이를 풀어주었다. 

"당신이 뭔데 우리가 잡아온 이들을 풀어주느냐." 

하고 공수대원이 항의하여 작전과장을 무색하게 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0시를 전후하여 공수대원들은 금남로 건물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여 젊은이들을 잡아갔다. 기동대원들이 YMCA 앞에 있을 때였다. 공수대원은 젊은 남자 한 명을 양손을 머리 뒤로 올리게 하고 방망이로 후려치면서 끌고 나왔다. 

"나는 주방장이어서 데모를 한 적이 없다." 

"무슨 소리냐, 이놈아." 

젊은 남자는 시위한 사실이 없다고 계속 부정했지만 공수대원의 강요에 못 이겨 파자마 바람으로 끌려나오고 있었다. 

얼마 뒤였다. 출근길의 직장 여성으로 보이는 원피스, 핸드백 차림의 젊은 여자 한 명이 금남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시위와는 전혀 무관한 얌전한 걸음걸이의 아가씨였다. 공수대원은 그 여자를 가만두지 않았다. 

"너는 뭐냐?"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길바닥에 그대로 때려눕히는 것이었다.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다 우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뒹굴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본 나는 광주의 동생들이 생각났고, 저놈들이 정말 사람이냐 싶을 만큼 분노가 일었다. 

거의 비슷한 시간이었다. 가톨릭센터 앞에서 도청 쪽으로 신사복 차림의 남자 한 명과 양장 차림의 여자가 걸어오는데 내가 보기엔 부부 같았다. 그들을 본 공수대원들은 여지없이 군화발로 걷어찼다. 남자의 이마가 터지고 피가 낭자했다. 여자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피를 닦아주고 부축했다. 그러자 공수대원은 여자에게도 발길질을 했다. 그 여자는 갑작스런 공수대원의 공격을 받고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들은 공수대원들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공수부대는 그 위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횡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랐다. 


무조건 잡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판에 배급을 받아 전일빌딩 앞에서 식사를 했다. 오후로 접어들자 공수부대의 진압은 한풀 꺾이고, 시위대는 오히려 공수부대에게 가세하는 상황으로 바뀌면서 금남로는 일시에 전투장으로 변했다. 

이때 기동대는 전면에 있는 공수부대를 보조해 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가스를 살포하는 일을 맡아서 했다. 페퍼포그차와 함께 대원들이 가스를 터뜨리면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면서 달려들었다. 그럴 때면 1개 소대 공수대원들은 관광호텔 옆 길목과 광주 경찰서 입구 길목에 대오를 유지하고 지켜보다가 기동대가 밀리는 듯하면 여지없이 뒤쫓아나와 작전개시를 했다. 그들은 방패도 들지 않고 한 겹의 작업복에 얇은 진압복만을 착용하고 시위대에게 돌진했다. 공수대원들은 군중들 사이로 뛰어들어 곤봉을 휘두르며 무조건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 

페퍼포그차에도 두려워하지 않던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곤봉 세례를 받으며 밀려났다. 잠시 금남로는 텅 빈 도로가 되다가 공수부대가 원위치로 돌아오면 시민들은 다시 애국가를 부르며 모여들었다. 기동대는 다시 가스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왔으며 공수대원들은 '의악' 하는 괴성과 군가를 부르면서 시위대를 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 되었다. 

기동대의 무전기에서는 계속해서 상황보고가 들어왔다. "민간인 2천 명이 체포되었다. 31사단 수용능력이 부족하여 상무대가 넘치고 있다" 등의 내용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자 전혀 미동하지 않던 시위대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에는 시위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기동대는 노동청 삼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시민들을 통제, 주시했고, 밤 8시가 되자 19일의 시위는 끝이 난 듯했다. 공수대원들과 경찰 병력만 보였고 기동대는 곧 복귀했다. 

19일 오후부터 우리들에게도 유언비어처럼 많은 말들이 들려왔다.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린다', '임산부 배를 갈랐다' 등등 살벌한 이야기들이 무전기를 통해서 속속 들어왔다. 나는 그 말들이 거의 사실일거라고 믿어 의심지 않았다. 그것은 이틀간의 목격에서 오는 믿음이었다. 


할아버지에서 어린아이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5월 20일 아침 8시, 이날은 노동청 앞으로 배치되었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려서인지 별다른 상황은 없었다. 12시가 넘어 점심식사를 끝내고 나자 시민들은 세력화되어 운집한다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기동대원들은 긴장 속에서 진압준비를 했다. 

곧 공방전이 시작되고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우리는 노동청 앞에서 진압을 하다가 금남로 상황이 좋지 않다는 병력이동 명령을 받고 금남로로 이동했다. 기동대원들은 가스탄을 터뜨리면서 시위진압에 혼신을 다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본능적으로 일체감이 형성되는 듯했다. "광주를 지켜야 한다. 우리 손으로"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사방에서 돌진해 오는 시위대는 할아버지에서 어린아이까지 똘똘 뭉쳐 있었다. 기동대뿐만 아니라 공수부대도 역시 상황이 어려워져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진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도 다소 시민들의 힘에 밀리는 것 같았다. 

오후 6시 30분경 무등경기장과 광주역에서 많은 차량들이 도청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무전기로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한 우리는 긴장감과 초조함으로 불안했다. 

7시, 유동 삼거리 부근에 드디어 차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 앞에는 대형트럭 3-4대가 앞서고 그 뒤를 택시들이 몰려왔다. 시위대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려드는 차량들의 장엄한 순간들을 목격하고 환호와 열광 속에 혼연일체가 되었으며, 차량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어대는 젊은이도 더없이 자랑스럽게 보였다. 

차량의 맨 앞 대열은 관광호텔 앞까지 진출했다. 차량들은 순식간에 가톨릭센터 앞에서 관광호텔 부근까지 몰려들었고 위협을 느낀 우리는 정신 없이 최루탄을 쏘아댔다. 금남로 거리는 온통 안개가 자욱한 것처럼 시야가 가려졌다. 그 사이 공수대원들은 골목 부근에 숨어 예의주시하면서 공격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곳은 살아 있는 지옥 

3대 정도의 대형차량 위에는 젊은 청년 2-3명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무어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우리는 섬뜩하면서도 굉장함을 느꼈다. 기동대원들은 그 순간 방독면을 쓰고도 최루가스에 질식할 것 같았는데 그러한 젊은이들의 의연한 모습은 우리를 새삼 놀라게 했으며, 그것은 곧 예측할 수 없는 절대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시위대는 두려움 없이 차량을 타고 돌진해 왔는데, 그중 택시 한 대가 총알같이 달려와 공수부대를 뚫고 기동대원들 앞으로 왔다. 다행히 다친 대원들은 없었으나 2명의 대원이 너무 놀라 졸도하여 광주경찰서로 후송되고, 택시는 도청 분수대에 부딪치면서 비스듬히 넘어지고 택시에 탔던 사람은 붙잡혔다고 들었다. 

바로 그때 공수부대는 '악' 기합 소리와 함께 금남로를 순식간에 피로 물들였다. 시위대는 저항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공수대원들의 무참한 진압에 밀려났다. 공수대원들은 시야가 가려진 희뿌연 금남로를 헤치고 차는 물론 잡히는 대로, 걸리는 대로 곤봉과 대검을 휘둘렀다. 나는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이곳이 바로 살아 있는 지옥이구나' 하고 느꼈다. 

공수부대가 휩쓸고 난 불과 30여 분의 시간은 군의 물리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시위대는 다시 애국가, 훌라송, 아리랑 등의 노래를 부르며 나타났다. 이에 기동대원들은 진압할 기력을 잃고, 공수부대도 점점 수그러지는 듯 했다. 더욱 무섭게 달려드는 시위대의 모습을 보고 공수부대는 경찰병력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왜, 너희는 진압하지 않느냐?" 

"왜 우리만 진압해야 하느냐?" 

그리하여 경찰국장은 공수부대 중령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지시를 받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수습되었는지도 모르게 금남로는 아수라장이 된 채 시민들은 물러가고 해가 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노동청 삼거리에서 버스 한 대가 속력을 내어 달려왔다. 이를 본 기동대원들은 재빨리 버스를 피했는데 앉아서 쉬고 있던 함평경찰서 경찰 몇 명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버스에 깔렸다. 시체를 모포로 덮은 후 상무관으로 옮겼다. 바로 눈앞에서 우리의 동료인 경찰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순간순간마 다 두려움은 더해 갔다. 저녁을 먹기 위해 다른 경찰부대와 임무교대를 하고 노동청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도청 앞은 공수부대와 경찰병력이 노동청 앞까지 여러 겹으로 싸고 있었다. 우리는 경찰들의 시신을 옆에 두고 상무관내에서 저녁을 먹었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우리는 공포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그때까지도 좀체 공수부대의 힘에 밀려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또한 압사한 경찰들을 직접 목격하는 등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일 밤 싸움이 계속되고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보이지 않자 머리 속도 복잡해지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막연했으며 광주에 계시는 부모님 얼굴도 떠오르고 집에 가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와중에도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나는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식구들은 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 

다시 기동대는 노동청과 금남로를 옮겨다니며 진압활동을 벌였다. 얼마 후 시내의 주변에서 불길이 솟았다. MBC 방송국 건물이 불길에 휩싸이고 연이어 노동청 주유소 앞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곧바로 도청 차고가 불탄다는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밤이 되어도 시민들은 무수히 많은 차량으로 도청을 향해 돌격해 왔고 불타버린 차량들의 잔해가 도처에 남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군병력은 시위대를 흩어지게 하기 위해서 도청 앞에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집해 있는 시위대를 향해 계속해서 비추는 작전을 펼쳤다. 밤중에 불빛을 들이대면 시민들은 두려움에 흩어질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흩어지기는커녕 시민들의 함성이 귓청을 때렸고, 도청 뒷담을 뛰어넘으려고 애를 쓰는 시민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새벽이 되었지만 시위대는 끝내 흩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부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새벽 4시까지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시위대와 공방전을 벌였다.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시민들이 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 

새벽 4시가 되자 시민들은 귀가하기 시작했고, 도로를 메웠던 많은 사람들은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잠을 잘 수 있게 되고, 5시경 뿌옇게 날이 밝았다. 

날이 새어 눈을 떠보니 노동청 앞에는 시민들이 악몽같은 얼굴을 하고 벌써부터 모여들고 있었다. 어떤 시민은 돌을 몇 개 던지기도 하고 이상한 짐승 쳐다보듯 충혈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자두자는 생각으로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느새 시민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어 우리들에게 돌을 던져댔다. 그때야 모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21일 아침 조선대에 다니는 후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배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도청 지하실과 분수대에는 시민들의 시체가 얼마나 있죠? 공수부대가 죽였잖아요. 형은 보았으니까 말을 해봐요."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웃었다. 도청 안 지하실은 모르겠지만 분수대는 물도 마른 빈 상태였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또한 그날까지 나는 시민들의 시신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칼, 곡괭이, 낫 등을 든 시위대가 위력시위를 벌이며 우리들 앞에 다가왔고, 10시가 되어갈 무렵에는 군용트럭 등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차량을 탄 시위대는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며 도청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물러가는 등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18일 당당하게 나타나 자랑스러운 듯 진압을 해대던 공수부대도 시민들의 힘에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시민들이 어느새 공수부대의 트럭이나 철모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정시채 부지사가 나와 여자 한 명과 협상을 한다고 했다. 협상과정에서 11시까지는 시민들과 공수부대간에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경찰들과는 장난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 경찰만 믿고 귀가하십시오." 

"너희들이 진정한 광주 시민이라면 경찰복을 벗어던지고 방망이를 공수부대에게 겨누어라." 

시위대와 경찰들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대며 다소 완화된 표정으로 대화를 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다시 쌍방은 대치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협상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이 시작되다 

12시가 되면서 양측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시위대는 주로 차량을 타고 왔다갔다하면서 돌을 던지고 화염병도 간혹 던지는 상황이었다. 공수대원과 경찰병력은 도청 분수대 일부분만을 겨우 지키고 있었고 시위대는 전일빌딩 앞과 전남매일신문사 입구, 노동청 입구까지 접근해 왔다. 시민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 중에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낸 차량 2대도 목격할 수 있었고, 광주의 시민들은 마치 금남로로 집결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시민들 의 숫자가 10만 명에 육박할 거라 생각하며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갑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쏜살같이 분수대 앞 공수대원들의 봉쇄망을 뚫고 수협을 지나 전남매일신문사 쪽으로 통과했다. 바로 그때 공수대원이 장갑 차를 향해 총을 쏘는 것을 보았다. 총격을 받은 장갑차는 구시청 쪽으로 빠져 나갔고, 장갑차에 타고 있던 시민이 총에 맞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장갑차의 기습공격으로 '서서쏴' 자세로 도열해 있던 공수부대 1개 소대가 장갑차에 사격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계속 무차별 총을 쏘았다. 일방적인 공수부대의 총격이었다. 기동대원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두들 노동청 담벽으로 바짝 붙어 지켜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총성에 놀라 다소 후퇴하는 기미가 보였으며 위세를 떨치던 차량시위대의 모습도 줄어들었다. 

얼마 동안의 총성이 계속되다 시위대도 흩어지고 금남로 거리는 전쟁을 방불케하는 분위기였다. 헬기가 보급해 준 주먹밥을 한 덩어리씩 먹고 있는데 도청 앞 광장에는 헬기 2대 정도가 연신 오르내리며 무언가를 옮기고 실어나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헬기의 움직임을 보면서 도청의 중요 서류들을 옮기고 이제 후퇴하는가보다고 생각했다. 

오후 3시경(21일) 잠시 보이지 않던 시민들은 차차 무장을 하고 나타났다.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고 무장을 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와는 달리 카빈으로 맞서 접근해 왔고, 우리는 소리만 듣고도 어느 쪽이 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기동대원들은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누구의 총에 죽을지 알 수 없었다. 공수대원들 역시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과 맨 몸으로 돌진해 오는 시위대의 위력에 점점 밀려나 도청 안으로 몸을 숨기고 벌벌 떨며 콩볶는 듯한 총성을 듣고 있어야 했다. 


살기 위하여 모두 도청을 빠져나가고 

3시가 지나자 승패는 결정지어진 듯했다. 일부 공수부대는 도청 안으로 들어가 장비를 싸는 등 철수할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점점 좁혀오는 시민군의 총성은 공수부대의 M16 총성보다도 더 무섭고 두려움을 주었다. 경찰병력 4천여 명은 몸을 떨며 도청 안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던 중 경찰국장이 혼자서 헬기를 타고 도망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찰의 대장은 도망가고 없는데 우리가 이곳에 남아 죽기밖에 더 하겠냐 싶어 기동대원들도 각자 알아서 해산하고 명령 있을 때까지 은신하도록 암묵적 지시를 받았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보호 본능으로 당시 군의 지휘체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4시쯤 공수대원들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기동대원들도 시민군의 공격을 피해 도청의 담을 넘어 도망쳤다. 약삭빠른 공수대원들은 숙직실에 들어가 트레이닝이나 사복으로 갈아입고 민간인으로 위장했다. 나는 기동대의 내무반장으로서 경찰국장은 물론 중대장까지 도망가고 없어서 소대장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45세의 소대장은 힐끗 한번 뒤돌아보더니 대답도 않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그러나 대원들은 줄을 선 채 아무 말 없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지금의 이런 상황에서 살고 봐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장비를 챙기도록 지시했다. 모두 개별 행동으로 살아남아 다음에 무사히 만나기를 기약하고 광주가 집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2-3명씩 함께 움직이도록 했다. 

기동대원들은 장비를 한 곳에 모아두고 도청의 담을 뛰어넘기 시작했다. 나도 도청 뒷담을 넘어 도망갔다. 그러는 와중에 기동대장이 간장독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60세의 비대한 기동대장은 도망가다 간장독에 빠진 것 같았다. 

나는 무조건 도청 뒤 민간인 집으로 들어갔다. 대부분 집들은 사람들이 대피하고 비어 있었다. 이미 장농 등은 헤쳐져 내가 입을 만한 옷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상한 바지에 와이셔츠, 여자 트레이닝을 걸치고 함께 있던 졸병 한 명(강원도 고향)은 여자 스웨터를 입고 구두에 가방까지 들고 기막힌 변장으로 골목을 빠져 나왔다. 


용기 있는 기동대원의 동료를 보고 부끄러움을 

현재 대성학원 부근으로 나와 보니 도망가는 경찰들 외에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 도로만을 무사히 통과하면 살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와 죽을지도 모르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어떤 경찰들은 포복으로 도로를 지나가거나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기도 했다. 우리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의외로 시민들이 없었다. 나는 대원 한 명을 데리고 친구집을 거쳐 집까지 도착했다.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자유롭게 시내를 활보할 수 있었다. 군의 위치에서 조금은 벗어나 광주 시민으로서 도청 앞 궐기대회에 동참하기도 하고 상무관에 널려진 시체들을 보기도 했다. 진압과정에서는 보지 못했던 시신들을 직접 보게 되면서 나는 매일 고통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밤이면 술을 마셨다. 

날이 새기가 무섭게 도청 앞으로 나갔고, 건물 벽에 붙은 대자보, 사진 등을 자세히 보고 상무관에서 시체를 관리하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러한 모든 일들은 나로 하여금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자아냈다. 

23일경 우연히 기동대원 동기 한 명을 만났다. 그는 18일 금남로 진압시 허리를 다쳐 19일부터 기동대에 남아 있었던 대원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만나 반가웠지만 내가 더욱 부끄럽게 생각되었던 것은 그가 시위를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부터였다. 

그는 각목을 들고 시민군과 합류하여 공수대원들과 직접 싸웠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의무전경임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하고 다녔다는 그의 용기에 한 순간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24-25일경 기동대가 궁금하여 화정동으로 가기 위해 광천동 공단 입구까지 걸어갔다. 공단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는 가운데 화정동 쪽으로는 보병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시민들의 통행은 자유로웠다. 나도 바리케이드를 넘어 기동대로 갔다. 기동대내는 한가했고 오랫동안 공수부대가 주둔한 흔적이 보였다. 사물함의 담배, 책, 볼펜, 커피 등의 물건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피묻은 메트리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기동대에서 나와 화정동 친구집으로 갔다. 나는 친구집에서 커튼이 뚫린 3발의 총알 흔적을 보았다. 그날의 일은 22일경 공수부대가 화정동 일대에서 총을 난사하여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친구로부터 들었다. 


진압을 나갔던 기동대원들도 피해자다 

27일 새벽이었다. 월산동 부근에서 여자 음성의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는 방송을 듣고 나는 계엄군이 다시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알았다. 라디오를 통해서 도청이 계엄군들에게 탈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아침 무렵 전 군인들은 부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을 들었다. 

29일쯤 기동대원들은 모두들 무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난 대원들은 그동안 보고 들었던 사실들을 이야기하면서 조금은 안도감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느슨하고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광주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애도해 하기도 했다. 일부 대원들은 상당한 죄의식을 느껴 고민했고, 나 또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위로감과 동시에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나는 강원도가 고향인 대원과 시위했던 대원 셋이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애도의 뜻으로 상장을 달자고 의견을 모으고 교복 안감을 뜯어 검은 리본을 만들었다. 나는 그것만이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고 도리라고 생각하고 대원들에게 나누어주려 했지만 분대장이 이를 막았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세 명만 가슴에 상장을 달았다. 

얼마 후 대장이 불렀다. 기동대 신분으로 가지고 시민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동은 결국 시민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이적행위라고 꾸짖고 방자하다고 나무랐다.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떼어내야 했지만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검은 리본을 보관하고 있다. 

대원들의 의식구조는 결국 지금의 백골단이 가질 수 있는 의식이 지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시위의 현장을 진압해야 하는 절대적인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많은 대원들은 회의하고 괴로워했다. 그 중의 한 대원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피해를 입고 부대로 복귀했다. 

그는 경상도 출신으로 경북대를 다니다 기동대로 배치받은 친구였다. 21일 도청에서 공수부대와 경찰들이 철수할 때 그는 증심사 쪽으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22일) 학운동 배고픈다리 부근에서 시민군한테 경상도 말씨와 육군 팬티, 양말 때문에 공수대원으로 오인을 받아 잡혔다고 했다. 

기동대 출신의 전경이라고 사정을 했는데도 시민군은 그를 도청으로 인계하였고 도청에서 그는 갖은 수난을 겪고 전남대 모교수의 도움으로 풀려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경험으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게 사고가 바뀌어 있었다. 그는 눈빛부터가 전과 달랐다. 

나는 그해 11월 13일 제대하였지만 5월의 후유증으로 방황하다 결국 1년간을 휴학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극적 경험을 통해 나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법칙들이 현실 속에 어떻게 적용되어지는가를 여실히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자 점점 마음이 안정되어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재 대학원을 다니고 있지만 1980년 5월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동안의 기동대원들이 겪은 갈등을 통해 5·18은 명백하고 올바르게 밝혀져야 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죽이고 위협했던 군인들 역시도 5·18의 피해자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조사.정리 안은정) 


------------------------------------------------------http://my.dreamwiz.com/pgstop/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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