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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노무현의 리더십은 다르다1
게시물ID : sisa_5938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늙은도령
추천 : 10
조회수 : 54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5/22 01:44:28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퍼부어지던 일방적인 비난이 문재인 의원에게 가해지고 있습니다. 혹자는 계파정치를 일삼는 친노의 수장이라며 비난하고, 혹자는 노무현 같은 파괴력이 없다며 비난하고, 혹자는 좌고우면한다며 비난하고, 혹자는 대선패배와 보궐선거패배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비난하고, 혹자는 지난 대선을 부정하지 않았고 개표부정에 대해 침묵했다며 비난하고, 박지원 같은 동교동계에게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을 통치행위로 보지 않았다며 비난하며, 친노 패권주의를 추구한다고 비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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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의 근거가 무엇이던 간에, 박근혜 정부가 통진당 해산청구소성의 핵심 요지로 들었고, 헌재가 8 : 1 대로 수용했던 '진보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상달 무페가 주장한 민주주의(독일에서 시작돼 미국에서 완성된 자유민주주의와 헤게모니적 경쟁을 벌이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다르듯이 노무현 리더십과 문재인 리더십은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듯이 문재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재인을 비난하는 내용이 다른 것도 그래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는 문재인의 친구’라고 말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2인자였던 문재인 의원을 따로 떼놓고 볼 수 없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신을 향한 어떤 비난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문재인의 운명이라 그것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좋으나 싫으나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공과를 어깨에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으며, 그 무게에 짓눌려 정치인으로서 실패할 수도 있고, 무게를 소화해내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현실정치인 문재인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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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문재인의 리더십을 이렇게 본다’와 ‘문재인의 착각이 국정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면’, ‘문재인, 바닥까지 내려와 새정연을 바라보기를’ 등등의 글들을 통해 문재인을 비판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런 글들을 쓸 수 있었던 처음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서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명의 통일성이 전적으로 생명을 시간 위의 길에서 앞으로 밀어주는 약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경우에, 조화는 전면에 있지 않고 후면에 있다. 통일은 배후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그 통일성은 맨 처음에 추진력 역할을 하는 것이지, 마지막에 위치하여 끌어당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베르그송은 종으로의 진화란 ‘생명의 통일성’을 유지한 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유기체에서 가장 복잡한 유기체로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종으로 분화된 유기체의 진화가 조화(=생명의 통일성)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진화의 종착점에서 끌어당기는 견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에서의 적응과 셀 수도 없는 변이의 과정 속에서도 출발할 당시의 추진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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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가 미래의 견인력에 이끌려가는 수동적인 것이라면 적응과 변이의 매 단계마다 어떤 자유의지도 작동할 수 없습니다. 이럴 경우 ‘생명의 통일성’이란 조화를 이루어내는 힘은 시간적으로 미래인 전면에 있기 때문에 모든 진화는 직선적인 발전만 보여줄 것입니다. 여기에는 반전(방향전환)도 예기치 못한 방해도, 선택을 하는 책임지는 자유인 의지의 발현도 없습니다. 



반면에 가장 단순한 유기체들이 다양한 형태의 적응과 예측 불가능한 변이를 통해 복잡한 유기체로 진화하는 중에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출발 당시의 추진력, 즉 배후의 힘에 있다면 종으로서의 진화는 지속되는 추진력에 힘입어 미래를 향한 매 단계마다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 단계마다 새롭게 처하게 되는 환경에 대한 적응과 변이가 약동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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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노무현에게 적용한다면, 진화를 추동해온 출발점의 추진력은 민주화운동에 투신할 때의 ‘노무현이 파악한 시대정신’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정치에 뛰어든 다음의 적응과 변이를 거쳐 '노무현의 정신'이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화의 운동으로 대변되는 지속(경향,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이란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 진화를 멈춘 ‘노무현의 정신’이 될 수 있을 터이구요.



보다 쉽게 설명할 수 없는 필자의 이해와 능력에 불만을 표하며, 「창조적 진화」에 나오는 다음의 인용문으로 ‘노무현의 정신’이 진화하는 다음 단계를 설명해볼까 합니다. 이는 노무현과 문재인을 하나로 보는 것에서 둘로 나뉘는 분리가 이루어지는 출발점이면서도, 생명의 통일성(=진보적 자유주의)이라는 조화가 적응과 변이에서도 유지됨을 말해줍니다.



“어떤 점에서 상호보완되는 사항들 간의 조화는 도중에 서로 적응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조화는 출발점에서만 완전무결하다. 그것은 근원의 동일성에서 비롯된다. 진화 과정 가운데 처음에는 상호보완적이어서 하나로 융합되었던 여러 사항이 동시에 성장하면서 멀어지는 데에서 조화는 온다.”



문재인이 현실정치인으로 첫 출발을 결심했을 때 ‘문재인의 운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서 당시의 문재인은 노무현의 운명에 완전히 갇혀 있는 자신을 말했습니다. 노무현의 운명이 문재인의 운명이 된 것인데 이는 ‘조화는 출발점에서만 완전무결’하다는 위의 인용문이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러서 '문재인의 운명'이 된 것까지 적합하다 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의 정신(=진보적 자유주의)이 ‘근원의 동일성’을 말하며, 당연히 ‘처음에는 상호보완적이어서 하나로 융합’돼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출발한 문재인은 진화의 과정(단기적으로는 국회의원 당선과 중기적으로는 야권의 대선후보)은 ‘근원의 동일성’을 이루며 융합돼 있던 여러 사항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멀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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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과정은 ‘근원의 동일성(=생명의 통일성)’에서 나오는 추진력을 지속하기 때문에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가장 단순한 유기체(국회의원 출마)에서 제법 복잡해진 유기체(야권의 대선후보)로 진화해 문재인만의 리더십을 구축해갔지만, 출발점의 추진력인 ‘노무현 정신(=진보적 자유주의)’과의 조화는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대선 패배 이후 문재인이 보여주었던 모습들은 그 호불호와 정치적 결과를 넘어 출발점의 추진력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정치 환경에서의 적응과 변이가 이루어진 것을 말해줍니다. 이는 문재인에게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재인은 지금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는 당대표 도전이 지리멸렬해진 당을 수권정당으로 혁신하기 위함이며, 이것이 대선 도전의 포기와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한 데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리더십이 '노무현의 정신'에서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책임정치에 들어선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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