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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종군 위안부
게시물ID : lovestory_10151짧은주소 복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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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 18
조회수 : 76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04/02/15 20:51:20
북한의 종군 위안부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그 실태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전후세대이지만 일본이 아시아 여러나라에서 행한 침략의 실태를 일본사회에 알리는 것이 일본인 사진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십수년간에 걸쳐 아시아 여러나라를 방문해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와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 600여명을 찾아가 취재했다. 그런데 취재하지 못하고 공백으로 남아 있던 곳이 북한이었다. 취재교섭을 시작한 것은 1990년. 그것이 올해 4월 겨우 허가가 났다. 일본인 저널리스트의 단독취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수년 만의 일이라 한다. 니가타에서 승선한 배는 5월17일 원산항에 입항했고, 나는 약 80kg의 촬영기재를 둘러메고 부두에 내렸다. 19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던 바를 거의 다 취재할 수 있었다. 전 일본군 위안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강제연행돼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 (중략.....) 임신하자 낙태시킨다고 자궁 들어내 북한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취재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더욱이 남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차별과 여성차별 위에 일본군이 만들어낸 종군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 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곳 남아 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의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씨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하고 말하고 그때부터는 내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李京生, 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정씨는 그때 피살된 여성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한사람씩 짚어나갔다. 중도에서 헛갈리면 다시 처음부터 세어나갔는데 아무리 해도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몹시 서운해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은 ‘니시하라’, 중대장은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이었다고 했다. 매독감염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너무나 지독한 일본군의 잔학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질문도 못하고 한숨만 내뿜었다.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廣東)에 도착, 이듬해 6월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주마”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되풀이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위를 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의 입 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다. 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토 다카시(伊藤孝司) 1952년생. 포토저널리스트로 과거에 일본이 행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 일본이 저지르는 지구환경파괴 현황을 아시아 각지에서 널리 취재하고 있다. 아시아의 피해자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8권, 한국에서 3권(눈빛출판사에서 <종군위안부> <사할린 아리랑> 등), 환경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2권 출판했다. 일본, 미국, 유럽에서 수십차례의 사진전을 열었으며 96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도 사진전 ‘깨어진 침묵-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을 열었다. 일본 우익들의 테러 위험에 대한 본인의 우려에 따라 얼굴 사진을 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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