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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요전쟁 - 5. 이걸로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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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1
조회수 : 145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5/05/26 20: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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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성종과 청 태종 홍타이지. 둘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릅니다. 둘 다 친정했고 수도를 노린 점은 같지만, 그 양상은 전혀 달랐죠. 후에 대몽항쟁까지 생각하면, 홍타이지는 고려의 역사를 정말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왜 요는 실패했고 원은 성공했는가, 그리고 자신의 상황이 어디랑 더 닮았는가 등을 봤겠죠. 호란 당시 청의 상황은 요와 더 닮았습니다. 몽골은 이 둘에 비하면 정말 여유로운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홍타이지는 최고의 방법을 찾아냈고, 도박에 가까운 시도를 했지만 결국 성공했습니다. 인조는 조선은 물론 우리 역사상 처음인, 왕이 상대의 왕에게 무릎 끓는 굴욕을 겪었죠. 

문제는, 당시의 조선은 여요전쟁 당시의 고려보다 대몽항쟁 당시의 고려와 비슷하다는 것이겠죠.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 이 점에 회의적이긴 하지만, 최소한 다르더라도 배워야 된다는 건 확실합니다. 아마 둘 다 배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 배운 걸 현재에 얼마나 제대로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는 거겠죠.

대몽항쟁 얘기하면서 더 자세히 얘기하겠습니다. 우선은 여요전쟁 때로 돌아가 보죠.

1.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다
거란군이 강조를 깨뜨린 후 흥화진과 통주를 우회해 남하하던 12월 16일, 양규는 흥화진에서 나옵니다. 정예 기병 700명을 거느린 그는 다음 날 함락된 곽주에 도달해 성을 지키던 거란군을 모두 몰아내고 남녀 7000여명을 통주로 옮깁니다.

요 성종이 정말 20만을 후방에 남겼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점으로 보면 후방에 남긴 군사는 극소수고 "호왈" 20만이라는 거겠죠. 뭐 기습이라는 측면에서 가능하긴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요 성종은 곽주에 6000의 병력을 남겼는데, 겨우 700으로 이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성 내에서의 호응도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그 때 거란군은 서경을 결국 포기하고 우회하던 중이었습니다.

거란군 다수가 개경에 머무르다가 결국 후퇴를 결정한 1월 11일 이후, 양규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양규 뿐만이 아니었죠. 숨죽여 있던 귀주의 병력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대장은 귀주 별장 김숙흥이었죠.

"귀주 별장 김숙흥이 거란 군사를 요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거란 군사가 후퇴하였다. 17일(신묘)에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 군사를 쳐서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양규가 거란 군사를 요격하였다. 연일 싸워서 패배시켰다"
"18일(임진)에 양규가 거란 군사를 무로대에서 습격하여 2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된 남녀 3천여 명을 빼앗았다. 19일(계사)에 또 이수 미상 에서 싸워 석령 까지 추격하여 2천 5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 1천여 명을 빼앗았다. 22일(병신)에 또 여리참 에서 싸워 1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 1천여 명을 빼앗았다. 이날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이렇게 흥화진의 양규와 귀주의 김숙흥은 후퇴하는 거란군을 맞아 큰 성과를 거둡니다. 하지만 그 최후의 날이 밝았죠. 1월 28일, 그들은 거란의 주력을 만납니다. 요 성종이 이끄는 병력이었죠. 계속되는 싸움 끝에 1천여 급을 베는 성과를 거뒀지만, 결국 둘 다 전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양규는 외로운 군사로써 만 한 달 동안에 대범 일곱 번 싸웠는데 거란 군사를 매우 많이 죽였고, 포로가 된 3만여 명을 빼앗아왔으며, 낙타ㆍ말ㆍ무기를 얻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앞을 막는 양규와 김숙흥을 물리치고 퇴각하던 요 성종,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진사 정성은 이 뒤를 추격해 또 큰 전과를 거두게 되죠.

11월 중순부터 시작된 두 달이 채 못 되는 기간의 전쟁, 2차 여요전쟁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1차의 서희와 3차의 강감찬에 가려진 2차 여요전쟁의 영웅 양규는 크게 알려지지 못 합니다. 아마 1차와 3차의 성과 자체에 비해 개경까지 함락된 2차를 최대한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겠죠. 하지만 2차 전쟁 당시 고려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려 주고, 강동 6주의 진정한 의미를 고려와 거란 양국에 제대로 알린 자는 바로 이 양규일 겁니다. 그의 전과는 단지 한 사람의 무공이 아니라 3차 여요전쟁의 추이를 결정지었구요. 그래도 어찌된 게 초상화 하나 없는 건지 모르겠네요.

한편 -_-; 현종은 나주에 있다가 광주 - 전주 - 공주로 올라오면서 새로 김은부의 딸을 왕비로 맞습니다. 원성 왕후입니다. (...) 후에 그의 둘째와 셋째 딸 역시 왕비로 맞구요. 이거 원;

2. 전쟁의 결과
수도가 함락된 이상, 고려의 피해는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양규 등이 구출한 고려인이 3만호나 된다는 것은, 애초에 끌려간 사람들의 수가 상당하고 양규가 구출하지 못 한 사람들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죠. 이 수가 얼마나 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송환할 생각을 전혀 하지 못 했습니다. 했을진 모르겠습니다만 기록에는 남지 않았죠. 왜란, 호란에서 어떻게든 끌려간 사람들을 구해 오려 했던 조선과의 차이입니다. 특히 대몽항쟁 부분으로 가면... 뭐 스포일러는 하지 않기로 하죠.

거란에서도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자치통감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1월에 거란주가 요양으로부터 직접 고려를 정벌하다가 고려에게 크게 패배당하여 부족의 병거 중에 제대로 돌아간 수가 얼마 안 되었다. 관속 중에 전몰된 자가 태반이었으므로 곧 유주와 계주에 영을 내려 사인을 뽑아 그 결원을 보충하게 하였다"

문헌통고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죠.

"그래서 고려는 이때부터 군사를 보내어 이 여섯 성을 지키게 되었고 여진과 함께 합력하여 거란을 요격해서 거의 살륙시켰다"

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의 피해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을 말 해 줍니다. 오죽하면 관리가 줄어 글을 읽을 줄 알면 무조건 특채해야 되는 상황이었죠. 왕이 친조(직접 입조)하겠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린 것 자체가 거란의 역량이 고려를 점령할 수 있을 정도는 안 되었다는 것이니까요. 

내적으로 보면 고려의 승리였습니다. 어쨌든 적을 몰아냈으니까요. 그래도 초토화된 지역이 비교적 적었구요. -_-; 하지만 이건 상처투성이 승리일 뿐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거란의 승리였습니다. 어찌됐든 고려왕의 친조라는 약속을 받아 냈고, 이후 여진족은 확실히 거란으로 돌아서게 됐으니까요. 

이 전쟁은 정말 우연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강조가 그리 쉽게 패할 줄은 고려에서 예상 못 했을 것이고, 서경이 저항할 줄은 거란에서 예상 못 했을 것입니다. 정말 구사일생으로 현종이 도망갈 수 있었고, 거란에서 고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았다면 양상은 달라졌겠죠. 뭐 그렇다 하더라도 나주까지 현종을 쫓을 순 없었겠습니다만. 이 해에 초조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40년 걸렸다랑 70년 걸렸다는 설이 있지만, -_-a 이것이 팔만대장경의 시작이었죠. 부처님의 은덕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정신으로 만든 것입니다만, 어찌 보면 고려인 스스로도 이번 전쟁이 정말 운빨이었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

여기서 중요하게 부각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압록강을 확실히 장악해야 된다는 것, 이후 두 국가는 압록강을 중심으로 외교전과 소규모 교전을 지속합니다. 이게 해결되지 않아서 벌어진 것이 3차 여요전쟁이었죠.

다른 한편으로는 여진족의 역할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여진족이 거란으로 돌아선 것이었고, 이 전쟁까지는 많은 여진족이 고려 편을 들었지만 시나브로 거란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들이 누구 편을 드느냐, 이것이 최고의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거란은 겨울에만 기동할 수 있는 압록강이라는 천혜의 방어선과 강동 6주의 우주 방어를 어떻게 뚫느냐, 고려는 2차 전쟁을 통해 톡톡히 겪은 거란의 주력군을 어떻게 상대하느냐, 이것이 3차 전쟁의 향방을 가르게 되었습니다. 3차 여요전쟁까지 앞으로 6년, 하지만 그건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양국의 준비가 낳은 결과에 불과했습니다.

3. 강동 영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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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뭐 -_-a 병아리라 하기엔 요 성종 쪽이 더 나이가 많겠지만요.

2월 23일, 현종은 초토화된 개경으로 돌아옵니다. 그 기분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무엇을 결심했을지는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당연히 논공행상이었죠. 그 다음 전후 복구를 시작합니다. 일단 뭔가 큰 공사가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피해가 초토화 수준은 아니었거나 무리하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하긴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죠. -_-; 일단 거란에 군사를 물려줘서 고맙다고 인사치레를 한 후, 피해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고 영빈관과 회선관을 설치하는 등 외교 쪽에도 힘을 썼죠. 이 두 관은 여러 나라 사신과 상인들이 몰리는 상업, 외교 중심지가 됐다는군요.

일단 거란도 큰 피해를 입은 마당이라 두 나라의 관계는 회복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건 둘 다 알고 있었죠. 12월, 거란에서 탈출하려던 하공진이 죽습니다. 몰래 빠져나가려던 것이 들켜서 국문하니 그는 이렇게 말 했죠.

"신이 본국에 대해서는 감히 배반할 마음을 가질 수 없사오니, 살아서 대조를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 차례 달래던 요 성종은 결국 포기하고 그를 죽여 심장과 간을 나누어 먹었다고 합니다. 항복하지 않고 후방에서 적을 끊은 양규, 현종을 직접 호위한 지채문, 그리고 스스로 희생양이 된 하공진까지... 이 셋이 없었다면 현종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겠죠.

양 국이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한 1012년, 갈등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012년 4월 - 요 성종의 입조 요구 : 대답 - 병 걸렸슈 ㅡㅡa
6월 - 강동 6주 반환 요구 : 쌩 (...)

1013년 3월, 7월 - 강동 6주 반환 요구 
1014년 9월 - 또 요구 -_-; 

이쯤 되면 열 받을 만 하죠. 왕의 입조도, 강동 6주 반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 2차 여요전쟁에서 요가 얻은 건 없는 거나 다름 없거든요. 고려에서도 이를 예상했고, 송과 다시 친교를 회복합니다. 이 때 요를 칠 것을 요구했지만 송에서는 거부했죠. 뭐 -_-; 이 두나라는 서로 요랑 분쟁 생길 때마다 서로에게 요구했고 거절하고를 반복합니다. 

1014년 10월, 거란은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거란이 변방을 침범하니, 장군 정신용이 이를 쳐서 패배시켰다."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그를 요격하여 7백 명의 머리를 베었고, 강물에 빠져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거란에게는 압록아이 너무도 컸습니다. 강물이 어는 겨울이 아니면 공격해올 수 없었거든요. 이에 그들은 압록강을 넘어 성을 쌓으려 했습니다. 현재의 의주 지역이었죠. 이미 압록강 사이의 섬에 쌓은 내원성을 이용해 배다리를 연결합니다. 고려군이 이를 요격하려 했지만 실패했죠. 거란은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 또 강을 건너왔고, 흥화진이 포위되지만 막아냅니다. 하지만 성을 쌓는 걸 막는 데는 실패했죠. 이 성은 내원성과 배다리로 연결돼 있어서 고립시키기도 어려웠고, 꽤나 공들여 쌓았는지 결국 힘으로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보주와 내원성, 이 두 성은 3차 전쟁은 물론 전쟁이 끝난 후에도 두 국가의 가장 치열한 분쟁 지역이 되었습니다.

최전방에서는 이를 최대한 방어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조정에서는 여기에 신경쓸 수 없었을 겁니다. 고려 내부에서 또 일이 터졌거든요. 뒤에 쓰도록 하죠. 

1015년 1월 성을 쌓기 시작한 거란군은 그 달 흥화진을 공격하고 3월에 용주를 공격하면서 다시 사신을 보냅니다. 뭐 똑같았죠. 6주 내 놔라 -_-; 이에 현종은..........

사신 야율행평을 감금합니다. (...) 이 때 현종은 위에서 말한 일을 끝내고 서경에서 유유히 개경으로 돌아오던 중이었죠. 고려사에서는 이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다고 쓰고 있습니다.

9월, 다시 통주와 영주가 공격받았고, 공을 세웠던 정신용, 고적여가 전사합니다. 이 때 거란군은 현 안주인 영주까지 들어왔다가 물러났죠. 어떻게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고려가 밀리는 형국이었죠. 그 틈을 탄 11월, 거란은 축성을 완료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의 선화진과 정원진을 빼앗아 성을 쌓았다고 돼 있는데, 이를 현재의 선천과 정주로 비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면 너무나도 안쪽이죠. 주변의 성들이 함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성들을 쌓았다는 것을 보면 그냥 현재의 의주로 비정하는 게 맞는 것 같네요. 요서에서도 보주라고 돼 있구요. 다시 말하면, 거란의 알박기가 성공한 것이죠. (...)

1016년 1월, 다시 거란이 공격해 왔고, 곽주에서 아군이 패해 죽은 수가 수만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성이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물자를 약탈하고 돌아간 듯 합니다. 때린 다음에 손 내미는 격으로 거란이 사신을 보내는데, 열 받은 현종은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 하게 합니다. -_-;

이렇게 전쟁 후에도 분쟁은 계속됐고, 처음에는 막아내던 고려도 은근히 밀려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 압록강 남쪽의 축성을 허용해 버렸죠. 일단 뻗대고는 있지만 또 대규모 침공이 오면 어찌 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016년 이후, 상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하죠.

1016년 말, 고려는 다시 송의 연호를 쓰며 요에 확실히 적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요의 대응은 1017년 8월 흥화진을 공격한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4. 여진족의 행보
1011년 5월 - 동북 여진 저을두 조공
8월 - 동여진의 해적이 경주 침공
1012년 2월 - 여진 30성(姓) 조공
1012년 5월 - 청하현, 영일현, 장기현 침공 - 격퇴
10월 - 모알라 등 30성이 조공
1013년 5월 - 여진이 거란군 이끌고 압록강 건너는 걸 격퇴
1015년 3월 - 20척으로 구두포 침공, 격퇴

...
조공을 바치러 오는 것도 없진 않지만, 이 정도면 여진이 확실히 고려를 적대했다고 보면 되겠죠. 거기다 여진 해적들의 공격이 심했습니다. 12년 5월의 세 현은 경주 공격의 연장으로 보이는데, 전쟁과 별 관련 없던 경상도, 특히 신라의 수도로 동경의 이름을 계속 가지고 있던 경주 지방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 같습니다. 동경에서 경주로 격하된 게 이 때였거든요. 이후 경주는 다시 京이라는 명칭을 얻지 못 합니다. 대신 서울이 남경이 됐죠. 

흥미로운 건 1018년 11월의 기록입니다.

"우산국에 농기구를 하사하였다. 이때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략을 입어 농사를 폐하였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농기구를 내려 주고 노략질을 당하여 쫓기어 온 민가를 모두 돌려보냈다."

....................... 울릉도까지? -_-;;;;;;

아마 울릉도의 우산국이 공격받은 시기는 여진 해적이 한창 날뛰던 시기일 겁니다. 저 기사를 보면 시달리다 못 한 우산국 백성들이 아예 고려로 도망 왔고, 저 때에야 농기구를 주며 돌려보낸 것 같죠.

모든 여진족이 반기를 들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송에 사신을 보낼 때 여진족도 "거란 땜에 못 살겠어요 ㅠㅠ"라고 징징거리고 있었거든요. 어차피 하나의 구심점이 없던 여진족이었구요. 하지만 1018년 때의 기록들을 보면 고려에 적대하거나 정말 친한 몇몇을 제외하면 숨 죽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랬던 여진족들도 1017년이 되면서 태도를 바꿉니다.

5. 내우
거란의 침입도 침입이지만, 고려 내부에서도 일이 터집니다. -_-; 상장군 김훈과 최질이었죠. 최질은 통주에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던 인물이고, 김훈은 강조의 패전 후 거란에 한 차례 역습을 가 했던 인물입니다. 양규 등에 비할 순 없겠지만, 역시 전쟁 영웅이었고 둘 다 상장군까지 올랐죠.

문제는 현종의 방침이었습니다. 전쟁 후 현종은 병력을 최대한 늘립니다. 헌데 이렇게 되니 녹봉이 부족하게 됐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뺀 것이... 경(京)군의 영업전이었죠. -_-; 군인, 그것도 수도를 지키는 군인들의 월급을 빼서 문관들에게 준 거예요. (...) 전쟁에서 죽기로 싸운 이들의 반대야 당연했고, 이들은 아예 대궐로 쳐들어가서 현종에게 요구합니다.

"등이 우리의 전지를 빼앗은 것은 실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 것이지 공가의 이익은 절대 아닙니다. 만약 발뒤꿈치를 잘라서 신에 맞게 한다면 몸이 어찌 되겠습니까. 모든 군사가 흉흉하여 분함과 원망을 견디지 못하니, 청컨대 나라의 좀을 제거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주소서"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장연우 등을 귀양 보냈고,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5품 이상의 무관은 문관을 겸하게 해 달라는 요구도 들어줍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요구들도 들어주죠.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죠? 예, 강조에 이은 무신정권의 시초나 다름 없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이 쳐들어오고 있었으니 신경 쓸 수 있었겠어요 -_-;

어쨌건 정변은 정변이지만, 위에 옮긴 그들의 말은 절대 흘러 들을 수 없는 말입니다. 어찌 잘 풀리긴 했지만, 이는 고려라는 나라의 근본적인 문제였죠. 고려에는 3품 이상의 무관 품계에 전시과가 누락돼 있습니다. =_= 그저 명목상일 뿐... 무관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는 정 3품, 상장군 뿐이었죠. 거기다 이 무관계 관직은 보통 무관이 아닌 탐라나 여진족의 유력자, 향리들에게 주었구요. 전쟁을 겪으면서 좀 달라졌겠지만, 고려에서 무관의 지위는 겨우 이 정도였던 겁니다. -_-; 문관을 겸하게 해 달라는 요구가 이해가 가죠. 

그랬던 고려는 정작 많은 전쟁을 겪은 국가였고, 그에 대비해 무관의 입김이 커지는 건 당연했죠. 하지만 문관의 절대 우위는 계속 됐고, 평소 때라면 모를까 전쟁으로 공을 세운 무관들의 불만은 커지고, 그걸 더 억누르게 되면서 마침내 터지게 되죠. 이게 제대로 터진 게 한국 역사에 전무후무한 막부, 무신 정권의 탄생이었습니다. 

조선은 최소한 무과는 있었고, (고려의 무과는 동북 9성 때 딱 한 번 뿐이었죠) 무관이더라도 공을 세우면 높은 품계에 오를 순 있었습니다. 아마 고려 그대로 갔다면 이순신은 수사가 되지 못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뭐 어쨌건 이런 중요한 때 왕의 권력이 흔들리는 걸 볼 순 없죠. 다음 해인 1015년 3월, 현종은 서경에 행차해 김훈, 최질 등의 장수들을 불러 잔치를 베풉니다. 그냥 잔치가 아니었죠. 

"이때 무신이 권세를 부려 문관까지 겸임하니 정사가 여러 곳에서 나와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였다"

이런 죄목으로 최질, 김훈을 비롯한 19명이 죽고 왕권은 정상화 됩니다. 

일단 해결은 했습니다. 잘못했으면 무신정권이 이 때 탄생하거나 거란과의 싸움에서 제대로 대응을 못 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그 불씨가 남아 있는 이상 일이 또 언제 터질지는 알 수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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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만족스럽든 아니든 1017년도 가고 1018년이 밝았죠. 강동 6주를 둘러싼 거란과의 대립은 극에 달했고, 송과 여진과의 연계도 끝이 났습니다. 어찌됐든 내부의 문제도 해결했구요. 이제 오랜 전쟁의 끝장을 볼 때가 되었죠. 

손자병법에서는 이렇게 말 하고 있죠.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이기고서,나중에 싸우는 것이다 是故勝兵先勝 而後求 戰 "
"나를 알고 적을 알면,백전도 위태롭지 않다 知己知彼 百戰不殆"

고려가 그 동안 해 왔던 준비들이 평가받을 때가 온 것입니다.
출처 지금은 눈시BBver.3 아니 눈시BBand 시던가요? PGR21의 작성 당시에는 눈시BBver.2 님의 글입니다, 글쓴이 님의 허락이 없는 관계로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34555#120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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