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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자살 / 진중권
게시물ID : sisa_1017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이나믹솔로
추천 : 12
조회수 : 84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4/12 08:55:22
이른바 ‘영재’ 또는 ‘수재’라 불리며 입시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만 모인 곳. 그렇잖아도 경쟁이 치열하고, 그에 따라 학생들이 받는 심리적 압박도 남달랐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징벌적 등록금제’라는 것을 만들어 사정없이 몰아대니, 압박에 시달리던 토끼들이 고압의 스트레스를 분출하다가 그만 자기 파괴에 이른 것이리라.

물론 그 와중에도 네 명을 뺀 나머지 수천의 학생들은 아직 살아있다. 세번째 자살에도 총장이 여전히 학생들의 박약한 의지를 탓했던 것은 그 때문일 게다. 하지만 토끼가 죽었다고, 곧바로 사람들까지 죽는 것은 아니다. 토끼가 죽은 다음에도 사람들은 꽤 오랫동안 버틴다. 사회 속에 산소가 부족한데도 그럭저럭 살아가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잠수함의 토끼가 죽었다면, 적어도 그 사회가 상당히 위험한 상태라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물론 이것이 서남표 총장만의 책임은 아니다. 그가 이른바 ‘개혁’이라는 것을 추진할 때 대부분의 언론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를 칭찬했다. 심지어 카이스트에도 총장의 개혁이 왜 문제냐고 묻는 학생들이 꽤 많다고 들었다. 총장의 정책은 이 사회에 팽배한 어떤 일반적 광기의 극단적 표현일 뿐이다. 가령 ‘징벌적 등록금제’나 ‘전 과목 영어강의’를 생각해 보자. 해괴하기 그지없는 이 몰상식이 졸지에 정책으로 집행되고, 심지어 ‘개혁’으로 칭송을 받아왔다. 그것은 이 사회에 서남표라는 ‘씨’가 뿌리내릴 비옥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게 문제다.

사실 카이스트에서 벌어진 사태는 한국의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의 하이라이트일 뿐이다. 대학은 이미 오래전에 시장이라는 이름의 인당수에 몸을 던져 버렸다. 그게 다 ‘신자유주의’라는 법명을 가진 벽안의 스님이 그게 아버지 조국을 구하는 길이라 귀띔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공양미 300석으로 대학은 최신형 건물을 지어 양복점을 열었다.

듣자 하니 이른바 ‘인재’를 맞춰 드리는 곳이란다. 여기서는 학생이라는 옷감에 자로 줄을 그어 불필요한 부분들은 싹둑 잘라내고 딱 고객에게 맞는 사이즈로 재단해 기업에 납품한다. 이 괴상한 양복점의 경영원칙은 그들이 신봉하는 시장경제의 상식마저 초월한다. 재단비용을 수익자인 기업이 아니라, 옷감인 학생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게 시장의 논리에라도 제대로 맞는 짓일까? 그 잘난 자본주의 시장도 21세기는 ‘베스트’가 아니라 ‘유니크’의 시대라고 말한다. 사실 ‘베스트’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냥 100명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면, 매 시험마다 적어도 한 명의 베스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어진 ‘베스트’들 중에 ‘유니크’가 존재한다는 보장은 없다.

경쟁은 필요하다. 하지만 과도한 경쟁은 승자를 뽑는 그 ‘기준’에 맞춰 참가자들을 획일화한다. ‘유니크’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경쟁에 외려 장애가 된다. 나아가 과도한 경쟁은 낙오의 공포를 일으킨다.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선 당연히 창의적인 생각이 나올 수 없다. 거리의 사람들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면 일단 같이 뛰고 보라. 그게 안전하다.

대학이 이렇게 미쳐 돌아가자, 중앙대 학생들이 항의하러 크레인에 올라갔다. 중앙대는 이 학생들을 그저 몹쓸 옷감이라 여긴 모양이다. 퇴학당한 학생들이 법원에서 퇴학처분 무효 판결을 이끌어내자, 몇몇 교수들이 회의를 하여 다시 무기정학을 내린다. 심지어 학생들을 상대로 영업 방해했다고 2000만원 손해배상 소송까지 냈단다. 다들 약 먹은 모양이다.

대학은 자살했다. 바닷속에서 용왕님 만나 계열사가 되려고. 

기사등록 : 2011-04-11 오후 08:14:48
ⓒ 한겨레 (http://www.hani.co.kr)

기사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7245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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