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군도. 룬테라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은 모두 그곳으로 향한다. 루시안의 아내 세나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다. 영혼들을 사로잡아 자신의 랜턴 속에 가두어 마치 노리개처럼 가지고 노는 영혼의 간수 쓰레쉬. 세나의 영혼은 그곳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가 군도에 속박 된지 몇 년. 루시안은 그림자 군도에게 복수를 위해 학회에 몸을 담갔다.
“역시 이곳은 썩은 내가 진동을 하는군. 언젠가 이곳을 박멸하리라.”
그는 군도의 망령들을 제거하기 위해 섬으로 향했다. 늘 시체에서 풍겨오는 냄새와 매캐한 안개가 섬 전체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날따라 쏟아지는 빗방울이 냄새를 뒤덮었다.
“으... 으워... 어...”
“드디어 나왔군.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가엾은 영혼들. 내가 저세상으로 보내주지.”
고통스러운 소리가 들려오며 땅이 울리더니, 이내 수많은 좀비들이 기어 올라와 그를 공격했다. 루시안은 무릎을 꿇고 잠시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좀비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의 총에서 발사된 빛 덩어리는 좀비의 머리에 명중했고, 썩어 문드러진 그 몸뚱이들은 순식간에 증발하여 사라졌다.
“후우... 후우.”
어느새 좀비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고, 루시안은 다시금 총을 맞대며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Rest in Peace... 네놈들의 영혼은 구원받았다.”
“크워어... 으으으...”
그가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동안, 그동안은 보지 못했던 커다란 좀비. 아니, 시체들이 뭉쳐지고 지저분하게 꿰매어진 덩어리가 그를 덮쳤다.
“제길. 아직 또 남아 있었ㄴ... 크억!”
좀비를 향해 총을 겨누려던 그는, 그것의 공격에 손을 쓰지 못하고 나뒹굴었다.
“하아... 하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내 불찰이군. 으윽!”
커다란 좀비를 제거하기 위해 일어서려던 그는, 오른쪽 가슴을 부여잡고는 무릎을 꿇었다.
“뼈가 부러진 건가. 이래선 재대로 싸울 수 없겠어. 일단 피해야겠군.”
“그어어어... 주... 여... 워...”
커다란 군체에서 울리는 소리. 마치 자신을 죽여 달라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것을 느낀 것인지 루시안은 부러진 곳을 움켜쥐고는 그것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하아... 하. 구원받길 원하는가. 좋다. 내가 해주지.”
탕
그의 총에서 뿜어진 빛 덩어리는 군체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명중시키지 못하고 흐트러진 것이다.
“이제... 끝인가 보군. 세나. 내가 곧 그쪽으로 갈지도 모르겠어.”
모든 것을 단념한 그는 총을 내려두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커다란 주먹이 그에게 향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창이 날아와 군체의 머리를 꿰뚫었다.
잠시 후 이상함을 느낀 루시안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수많은 창이 군체의 몸 곳곳에 박혀있는 모습이었다. 군체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찔리는 창 때문인지 그저 움찔거릴 뿐이었다.
“영혼의 창... 저것은 설마.”
그가 눈치 챘을 쯤. 창들은 순식간에 뽑혀 나와 한곳으로 향했다. 군체는 비틀거리는 듯하더니 그의 눈앞에서 소멸했다. 그것을 보며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루시안은 정신을 잃었다.
“으... 여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를 무렵. 눈을 뜬 그는 시체와 뼈로 뒤덮인 곳이 아닌 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안에 누워있었다. 한쪽 구석엔 에메랄드 빛 창 한 자루가 놓여 있었으며, 머리맡엔 반쯤 갈려진 약초가 있었다.
“그 창... 설마 그녀석인가. 크윽!”
몸을 일으켜 일어나려던 순간. 고통스러움에 털썩 하며 다시 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래. 그때 뼈가 부러졌지. 당분간 움직이지도 못하겠군.”
잠시 숨을 돌리며 뼈가 부러진 곳을 만져봤다. 부러진 뼈에 찔려 상처가 났어야할 자신의 몸이 아닌 붕대가 감겨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그 자’가 치료해 줬으리라 생각한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안다. 당장 나와라.”
“...”
‘그 자’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루시안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칼리스타였다. 그녀는 벽 한편에 기대어 그를 바라봤다.
“꼴이 말이 아니구나 사도여. 산 자는 군도에 발을 들일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닥치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라. 왜 날 구한거지?”
“그것들을 처리하는 건 원래 우리의 임무였다. 본래 네 녀석이 상대할 것이 아니었지.”
“그딴건 관심 없다. 왜 날 치료했는가. 그것이나 답해라.”
여전히 총은 칼리스타를 향하고 있었지만, 루시안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찼다. 군도의 망령이 왜 자신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안전한 곳에서 치료까지 해줬다. 그것을 알아내기 전까진 절대 그녀를 향해 총을 쏠 수가 없었다.
“우리중 하나가 널 구해달라고 애원했다. 그것을 들어줬을 뿐이다.”
망령들의 한데 모여 만들어진 칼리스타. 수많은 영혼들 중 자신을 도와줄 만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세나... 세나인가. 죽어서까지 빚을 지는군.”
루시안은 총을 든 손을 털썩 내려놓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가라.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다.”
“인간 따위에게 보답을 바라진 않는다. 그저 죽어서 우리의 일부가 되기를 기다릴 뿐,”
루시안은 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군도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빚졌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여기라면 그자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움직일 기력이 돌아오거든 당장 이곳을 떠나라.”
칼리스타는 오두막을 나서기 전. 슬쩍 뒤를 돌아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간 후. 루시안의 머릿속엔 온통 세나 생각뿐이었다. 죽어서까지 자신을 걱정하며 군도의 힘을 빌려서나마 목숨을 구해준 그녀. 칼리스타가 그저 둘러대기 위해 그녀를 언급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어쩌면 군도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칠 대로 지친 그의 몸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루시안은 잠에서 깨어났다. 부러진 갈비뼈는 살을 찔러댔지만 나름 견딜 수 있었다. 총을 허리에 매달고 오두막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이 타고 온 배가 보였다. 군도에 발을 들였을 때 오두막은 보이지 않았다. 칼리스타가 이곳까지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루시안은 조용히 배에 올라 데마시아로 향했다. 부러진 뼈와 상처 입은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노를 젓는 것도 시원치 않아 그저 파도에 맡기며 배가 대륙에 닿기만을 기다렸다.
데마시아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데마시아에서 군도로 통하는 항로는 언제나 폭풍우와 거센 파도가 몰아쳐 정신을 잡지 않으면 난파되기 십상이었지만, 그날따라 얌전한 파도 덕인지 해가 뜨기 직전에 대륙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은 후, 병실로 향했다. 원래 챔피언은 학회에서 제공하는 전용 병원을 이용해야 했지만, 우선 일반 병원에 입원한 뒤, 다음 날 학회 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안정을 되찾은 그는 주머니 속 로켓을 꺼내 열어보았다.
세나와 다정히 찍은 사진. 그리고 그녀의 이니셜이 적힌 한 자루의 총만이 그녀를 회상케 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세나... 꼭 당신을 구해주겠어. 조금만 더 기다려줘.”
“루시안님. 학회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문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학회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이 왔다고 알리는 간호사였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백발의 젊은 남성이 자신을 찾아왔다. 선글라스를 끼고 슈트를 입은 모습. 마치 자신을 심문하려고 찾아온 듯한 모습에 조금 경계했다.
남자는 차분히 선글라스를 가슴 포켓에 넣어두고는 루시안에게 다가가 옆에 앉으며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루시안씨! 얼마나 걱정 했다고요! 당신이 중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 했다니까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다니시는 거예요?”
“어... 그게... 미안하게 됐군.”
예상과는 전혀 다른 그의 태도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말을 더듬었다. 백발의 남성은 자신을 알렉스라 칭하며 학회 내 챔피언의 건강을 관리하는 전담 의사라고 소개했다. 챔피언은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리그에 나갈 수 있도록 반드시 전담 의사가 한명씩 붙게 된다. 숨을 돌리며 겨우 진정한 알렉스는 흰머리를 빗어 넘기며 그에게 말을 이었다.
“루시안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 하셔야겠습니다. 학회에 자료를 제출해야만 전용 병원을 이용할 수 있거든요.”
그는 서류가방에서 차트를 꺼내어 그의 이야기를 적을 준비를 했다. 루시안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는 듯 하더니 군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칼리스타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만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군도의 생명체가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 자체가 수치였으며 그녀 또한 인간을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군도의 좀비들을 소탕하러 갔다가 부상을 입었고, 중상인 몸으로 겨우 빠져나왔다. 이거군요. 알겠습니다. 이거면 충분해요.”
루시안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받아 적은 그는 차트를 다시 서류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이건 전용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에 대한 안내문이에요. 한번쯤 읽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르면 오늘 저녁에 수송단원이 도착할겁니다.”
“그래 잘 알겠네. 그럼 기다리지.”
알렉스는 루시안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병실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침대에 털썩 누우며 안내문을 읽기 시작했다. 안정을 되찾은 그는 자신을 데리고 갈 그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밖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침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 무색해질 만큼 굵은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천둥소리. 마치 그곳에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시안은 한쪽 벽 구석을 향해 총을 겨누며 입을 열었다.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칼리스타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비춰 실루엣만이 보였지만,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군도 녀석들은 전부 음침한 성격인가 보군. 또 무슨 일로 날 찾은 거지?”
“넌 우리의 감시를 받는 자이다. 언제나 지켜봐야 할 존재.”
“하. 웃기는군. 몸만 성했더라면 이 총알은 이미 네 머리를 지나갔을 것이다.”
사실이었다. 진통제를 맞은 탓에 한손으로 총을 들어 올릴 기력조차 없었던 그는 총을 내려두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지? 하기야, 군도의 망령들은 일이라곤 영혼들을 거두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겠군.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라면 잘못 찾았어.”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루시안 널 주시하고 있다.”
“그거 기쁘군. 군도가 날 지켜보고 있다니. 반드시 박멸해주마.”
칼리스타를 노려보는 그의 눈은 군도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차있었다. 칼리스타는 복수심에 불타는 그에게 조금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네 복수심이 보인다. 사도여. 우리라면 네 오랜 숙원을 이뤄줄 수도 있다.”
“내 숙원? 시체인 네녀석의 도움 따윈 필요 없다. 언젠가 네녀석도 처치해주지.”
“약해빠진 네가 우리. 그리고 군도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어림없다.”
칼리스타와 말싸움을 하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욱신거리는지 애써 무시하며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당장 사라져라.”
“우린 언젠가 네 앞에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감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칼리스타는 그림자 속에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병실 문을 열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루시안님.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이송 준비 해주세요.”
“...알겠다. 조금 거들어 주겠나? 진통제 탓인지 몸이 말을 듣질 않는군.”
의사와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식 침대에 몸을 누인 그는 한쪽 손에 세나의 사진이 담긴 로켓을 꽉 쥐며 눈을 감았다. 그가 떠난 병실 한구석엔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창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전용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집중 치료를 받으며 빠르게 회복했다. 퇴원을 마친 그는 학회로 돌아가 알렉스를 찾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안내소를 찾았다.
“어서 오십시요 챔피언 루시안님. 무슨 용무로 찾아 오셨나요?”
“아, 별건 아니네만. 한 가지만 묻지. 여기, 알렉스라는 녀석을 찾고 있네만.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내 전담 의사라고 하는 녀석 말일세.”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알렉스... 알렉스... 여기 찾았네요. 그나저나 이상하군요. 루시안님의 전담 의사는 실비아님인데 말이죠.”
서류를 뒤져보던 안내원은 출장 기록부를 루시안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서류상으로는 10년 전 그림자 군도에 답사를 나간 뒤로 실종됐다고 하네요. 여기 이사람 맞죠? 그런데 이분은 의학 전공이 아닌걸요?”
사진에 나와 있는 모습은 얼마 전 병원에서 봤던 것과 하나도 빠짐없이 같았다. 하지만 군도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전혀 믿을 수 없었다. 루시안은 분명 군도가 자신을 농락한 것이라 여기며 학회를 나섰다.
루시안은 의문을 품으며 다시 데마시아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더 망령들을 제거하기 위해 군도로 향할 생각이었다. 해가 지고 깊은 밤이 찾아 올 무렵 데마시아에 도착한 그는 술로 괴로움을 잊으려 주점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자기 맑은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루시안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비를 맞고 있었다.
“또 비인가? 최근 들어 비를 맞는 일이 잦아졌군. 여름이라는 건가?”
피식 웃음을 짓고는 가까운 주점으로 들어가 비를 피할 생각에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골목 깊숙한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안씨! 몸은 좀 어떠세요? 부러진 뼈는 다 나으셨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학회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알렉스라는 자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 살아 있다고 해도 이 세상 것이 아닐게 분명했다. 경계어린 눈초리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렉스... 아니, 넌 이미 10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난 네녀석에게 뼈가 부러졌다고 말한 적 없어.”
“아... 아니. 진료 차트를 대충 훑어봤죠! 그리고 명색이 의사인데 그 정도는 눈으로만 봐도 눈치 챈다고요!”
“거짓말은 정말 서툴구나. 학회의 알렉스라는 녀석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 녀석은 학회의 수색대였지. 네녀석은 누구냐. 군도에서 보낸 거냐?”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며 나긋했던 목소리는 마치 물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 차가워졌다.
“이제야 눈치 챘는가.”
검은 안개가 알렉스를 감싸더니 창백한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의 예상대로 칼리스타였다.
“...역시 역겨운 시체냄새. 네녀석이었나. 왜 자꾸 날 따라다니는 거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넌 우리의 감시를 받는 자. 우리가 아니라면 아무도 네 영혼을 거둘 수 없다.”
“소멸당하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내게 일말의 자비가 남아있을 때 당장 사라져라.”
“사도여. 네 영혼은 이미 산산이 부서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구나.”
탕
루시안의 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칼리스타의 머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원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동정하는 척하지 마라. 아니면 날 조롱하려 드는 것인가? 사랑하는 그녀를 빼앗긴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통쾌한가.”
“우리는 복수를 위해 모여 있는 몸. 네 고통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저 조금이라도 더 빠른 길을 알려주려 찾아오는 것이다.”
복수. 루시안에겐 세나를 앗아간 그림자 군도에게 복수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세나의 영혼을 구속하여 능욕하는 존재 쓰레쉬. 생각만 해도 역겨워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 복수를 이뤄주는 대신 영혼을 가져가는 존재라는 것을 루시안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군도의 존재.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네놈 따위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그런데 왜. 자꾸만 내 곁에서 머무르려 하는 것이지? 절망하는 것이 그렇게도 보고 싶은 것인가?”
“네 영혼을 앗아갈 기회는 수십 번도 더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네녀석은 우리가 지켜봐야 할 존재. 그리고 우리가... 아니 됐다. 네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한다.”
칼리스타는 그를 등지며 연기처럼 사라져 군도가 있는 방향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루시안은 칼리스타가 있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의문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적이 되어야 할 군도의 망령이 늘 자신을 지켜보며 목숨을 지켜주려는 모습이 의아하기만 했다. 어쩌면 세나가 죽어서도 군도에 원한을 갖고 칼리스타의 일부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편했다.
그녀가 사라진 곳엔 병실에 있었던 것과 같은 영혼의 창이 한 자루 놓여 있었으며, 루시안이 그것을 쥐려고 손을 가져가는 순간, 창은 빛을 내며 흩어졌다. 마치 ‘네 복수를 멈추지 마라’라고 말하려는 듯 했다.
“그러니까. 이름은 칼리스타... 라고 했었나? 좋다 네녀석은 가장 마지막에 없애주도록 하지.”
루시안은 창을 집으려 했던 손을 꽉 움켜쥐고는 그 자리에 앉아 짧은 기도를 한 뒤, 주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