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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미디어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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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늙은도령
추천 : 6
조회수 : 48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5/28 15:17:00

문제는 텔레비전이 오락물을 전달한다는 점이 아니라 모든 전달하는 내용이 오락적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ㅡ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에서 인용




모든 정치학자들은 언론‧방송학자들과 같이 텔레비전이 정치에 미친 영향이 측정불가능할 만큼 크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너무나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해 다루었기에 이에 대한 근거를 대는 것은 필요없으리라 봅니다(특히 닐 포스트만의 《죽도록 즐기기》, 커트와 글래디스의 《텔레비전과 정치》, 제이미슨의 《대통령만들기》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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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신자유주의적인 나라, 미국과 한국에서는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정치행위의 상당 부분이 돌아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닐 포스트만의 주장처럼 텔레비전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의 정수여서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한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데 국민의 의식수준을 형편없이 떨어뜨린다고 해서 ‘바보상자’로 불리는 텔레비전이 처음 도입됐을 때, 정치인과 언론학자들은 전혀 다른 예상을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리처드 생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를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주니어(대통령의 아들) : 텔레비전이 정치를 집안으로 가져옴으로써 ‘국가정책을 이끄는 사람들과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나라 전체에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유권자에게 더 지적이고 일치단결된 행동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은‧‧‧스스로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오린 던랩(최초의 뉴욕타임스 텔레비전 기자) : 카메라가 ‘정치의 빛과 그림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술책을 부리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 어느 때보다 말과 얼굴 표정의 진정성이 중요해졌고, 정치 지도자들 또한 우리는 투명하고 지적인 정치가 열리는 순간을 앞두고 있다. 정치 후보들이 ’과거 정치인들이 역사를 바꾸고 만들어낸 호텔밀실이 아니라 국민의 앞에서 지명될 것이다.


토마스 듀이(1944년 194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 텔레비전은 엑스레이다. 정부의 사업을 모르고 있다면 그 날카로운 광선과 극명한 사실성을 오래 버틸 수 없다. 정치 운동에서 건설적인 진보를 이뤄낼 것이다.


제조업체 : 최초의 텔레비전 출시를 알리는 신문광고 중에는, 텔레비전이 보통 사람들에게 정치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상품의 이점으로 강조한 광고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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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잘못된 예측 때문에 정치와 텔레비전의 결혼은 무서울 정도로 진행됐습니다. 텔레비전 시청자가 정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어느 누구라도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한다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싶다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나름의 업적을 세우려면 텔레비전과 함께 가야 했습니다.



시청자인 국민은 그렇게 정당(계급과 계층적 이익을 대변하는, 즉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는)으로부터 멀어져갔고, 국민은 기꺼이 방과 거실에 고립된 유권자로 변질됐습니다. 루스벨트부터 케네디와 레이건을 거쳐 부시와 오바마까지 1930년대 이후의 대통령들은 텔레비전과 이혼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정당의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도, 스스로 자신을 알려야 하는 무소속 후보도 정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시청자를 향해 뜨거운 구애를 해야 했습니다. 정치는 이제 현장이 아닌, 시청자의 방과 거실에서 결정되는 경향이 강해졌고, 최선의 경우에도 여론조사를 통해 사후 추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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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텔레비전이 일방적이고 즉각적인 이미지 전달을 통해 생각하는 능력을 갉아먹는 ‘바보상자’라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자본과 권력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텔레비전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무지하고 우둔하고 멍청한’ 국민들을 양산했습니다. 정치조작과 상징조작, 정보와 이미지 왜곡에 쉽게 넘어가는 그런 국민 말입니다.   



그 이유는 “텔레비전의 지각방식이 인쇄를 통한 지각방식에 철저하게 적대적이고, 텔레비전을 통한 의사소통은 모순과 하찮음을 조장하고, '진지한 텔레비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은 오직 한 가지 소리(오락의 소리)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즉, 텔레비전은 시청자가 생각하지 않도록 만듬으로써 그들의 지배력을 높입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린 시청자란 있을 수 없고, 텔레비전 없이 지내야 할 정도로 열악한 빈곤도 존재하지 않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고 변질되지 않은 수준 높은 교육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우리 모두는 카메라가 잡은 제한된 각도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브라운관에 비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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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텔레비전 시청자들에게는 보는 것이 곧 믿는 것과 동일시됐으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우리의 속담처럼 국민은 스크린의 포로가 됐습니다. 시청자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의 표정과 동작, 말과 호흡까지 지켜봤기 때문에 그가 본 정치인이 그 정치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최근에는 교활하고 사악한 이명박 정부에 의해 지상파3사 외에 4개의 종편과 2개의 보도채널이 더해짐에 따라 시청자는 자신의 기호에 맞는 방송을 시청하는 비율이 높아졌습니다. 특정 정당과 이념 및 자본에 편향된 방송들의 사실 왜곡과 호도가 더욱 쉬워졌고, 시청시간이 늘어날수록 인식의 편향성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한 방송만 꾸준히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정치적 편향성의 정도는 민주적인 토론이 불가능할 정도에 이르렀고, 괴벨스를 방불케 하는 선동정치가 통용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정치적 지식이 부족하고 다른 매체를 통해 교차확인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시청자가 많을수록 선동정치의 가능성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정치적 지식이 형편없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며,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넘쳐나는 정보들에 비해 해독능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시기에 맞춰 민주주의는 양적인 확장을 거듭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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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것이 1인1표로 대표되는 직접‧보통‧비밀‧평등선거의 등장입니다. 투표권의 확대와 정치적 평등의 강화는 민주주의의 발전의 결과였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이 투표하면 극단은 상쇄되고 다수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란 믿음이 바탕이 된 인류 문명의 발전이었고 필연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국민에게 정치적 권한(후보 선택에서 정책 결정과 집행, 결과에 대한 책임 추궁까지)이 넘어가도록 만든 테크놀로지가 텔레비전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특정 사안과 이슈에 대한 국민의 생각을 정부와 정당에 알려주는 것에서, 국민을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여론조사입니다.



기술발전이 불러온 여론조사의 활용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대중이 대단히 무지하고 비합리적이며 우리 정치가 신화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는 증거가 축적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정치 시스템은 과거 어느 때보다 대중에게 직접적인 지배권을 주는 방향으로 재편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단 여론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아무도 그것이 파악해야 하는 것인지 당위를 묻지 않았”고, “여론조사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됐습니다. 최근에는 대중을 넘어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두려워하고 바라는지를” 알기 위해 매주 다양한 여론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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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면 정치인들은 그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 정치적 자살행위에 다름없었습니다. 여론조사는 특정 사안과 이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명확한 의견이 없어 주어진 질문에 따라 유도된 반응을 보이는 국민에게 절대적 권한을 넘겨주었습니다.



조작의 수단이 되기 일쑤인 여론조사를 권위의 원천이자 시청자를 조정하는 핵심 수단으로 장착한 텔레비전은 정치의 수준을 갈수록 하향평준화시켰습니다. 모든 것을 오락화하는 텔레비전은 사람들을 더 멍청하게 만들지 똑똑하거나 현명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론조사와 텔레비전 때문에 “국민들이 권한을 책임 있게 행사할 가능성이 적어진 바로 그 시점에,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권한이 국민들”에게 넘어갔습니다. 민주주주의란 국민이 모든 권력의 원천이고 국가의 주인인 까닭에 이런 진행을 저지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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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토크빌의 성찰처럼 “국민이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는 것처럼, 미디어 또한 수준에 맞는 미디어만 가길 수 있”게 됐습니다. “만약 대중이 정치인들이 유포하는 신화를 기꺼이 수용하는 미디어를 원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런 미디어를 가질 수 있”으며, 종편의 등장이 바로 그러합니다.



민주주의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최상의 체제로 굳어진 현실에서 국민에게 제대로 된 정보와 사실(진실)이 전달되면 최상의 선택을 할 것이라는 국민신화에 도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해서 국민에게 왜곡된 정보와 사실(진실)을 전달하는 방송의 일탈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인터넷과 SNS가 정치적 영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고 집단적 결정을 이루는 하위정치의 공간이자 민주주의의 학습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치적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들의 감정적 배설과 폭력의 수단으로 변질된다면 민주주의는 작동불능의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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