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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1부 - 1.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고...
게시물ID : history_210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7
조회수 : 130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5/29 18: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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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나누자면 1216년 하반기부터 1217년 1~2월까지의 전투를 거란 유민의 1차 침략, 3월 이후를 2차 침략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둘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1차의 경우 그래도 강동 6주, 청천강 북쪽에 제한돼 있었습니다. 청천강을 건너려는 적의 시도를 막았고, 관군도 강동 6주 지역에서 활동했죠. 다만 그들이 이리저리 분산해 약탈했다는 점이나 개경 근처까지 적이 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들에서 보면 제법 여기저기 퍼지긴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주요 전장터는 강동 6주였습니다.

하지만 2차 침략은 다릅니다. 고려의 주력군부터가 현 안주, 개천이라는 청천강 방어선으로 물러난 상태에서 싸웠고, 적이 청천강은 물론 대동강까지 건너는 걸 허용해 버렸죠. 어쩌면 고려의 패배가 누락된 부분이 많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2차 침략은 거의 청천강 남쪽에서 이루어졌거든요.

거란 최고의 명군이라는 요 성종 때도 참 악착같이 막아내던 고려, 200년만의 거란의 침략에는 그 대응이 너무나도 달랐죠.

1. 돌아온 적
"천구성(유성 혹은 혜성)이 오군영에 떨어졌다."
"이 달에 또 붉은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달포(한 달 쯤)가 되도록 흩어지지 않았고, 흰 무지개가 북두성을 꿰었다"

날이 조금 풀리자 거란군의 공세는 다시 시작됩니다. 그들은 삽시간에 정주를 약탈하고 안주에 이르렀죠. 당시 고려군은 노원순이 이끌던 삼군과 조충, 김중귀의 원군을 포함해 오군으로 재편한 상태였습니다. 다만 김중귀는 도공역에서 후퇴하는 거란군과 맞서다가 패해서 5군 중 하나는 없다시피 했죠.

+) 문제는 이 도공역을 현재의 남양주로 비정하더군요. 제법 많은 게 누락된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누락됐다 하더라도 경기도까지 들이친 건 소수일건데 그거에 5군 중 1군이 패한 거예요 -_-; 이미 이 시기 강동 6주, 청천강 북쪽의 성들이 점령됐거나 외롭게 항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그 이후의 상황들을 보면 어차피 적도 약탈이 주 목적이었던만큼 성들이 많이 함락되거나 하진 않았을 걸로 보입니다.

고려의 오군은 태조탄, 현 안주와 박천의 사이에 이르렀습니다. 이 날 비가 내려 그냥 숙영을 했죠. 고려 장수들은 비도 오는데 설마 적이 올까 해서 술을 마시고 놀았다고 합니다. 이게 치명적이었죠. 갑자기 백마를 탄 사람이 진으로 들어와서 깃발을 흔들자 적의 대군이 오군을 포위했다고 합니다. 전군이 무너지고 중군이 무너지고 좌군마저 무너지며 고려군은 패주합니다.

이 때 김취려는 문비 등과 외로이 항거하다가 온 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대장군 이의유, 백수정, 장군 이희주 등이 전사했으니 얼마나 많은 병사가 전사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려의 주력군은 소멸합니다.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바뀌었죠.

3월 12일, 거란군은 임진강에 이릅니다. 최충헌은 급히 신선주 등 5명의 장군에게 군대를 보내 저지하게 했지만 19일에 그들은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아무리 봐도 1차 침략 때부터 적이 경기도까지 들어온 것 같긴 하지만, 이 때에 이르러 전장은 경기도와 강원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나마 본진인 개경은 건드리지 않은 것 같지만요.

2. 아수라장
4월, 최충헌은 다시 오군을 편성합니다. 총대장은 상장군 오응부, 그 휘하에는 최원세, 공천원, 오인영, 유돈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잘난 인물은 못 됐습니다. 그는 빨리 적을 깨뜨리러 가지 않고 시간만 끌고 있었죠. 어느새 5월이 되었습니다. 최충헌은 오응부를 파면하고 최원세로 중군을 거느리게 한 후, 김취려를 재기용합니다. 

당시 거란군은 경기도 연천군까지 내려와 있었고, 곧 동주, 지금의 철원을 공격합니다. 고려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북계는 이미 쑥대밭이 됐고, 서해도를 지나 동계에 이르게 된 것이죠. 동계방수장군 오수기가 패하면서 철원이 함락됩니다. 이쯤되면 최충헌도 속이 탈 만 하죠. 거란군은 기세등등하여 다시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내기에 이릅니다.

이제 주력을 맡게 된 최원세, 그는 오군을 이끌고 풍양현(남양주 동북부)으로 진격했고, 좌군이 패하는 상황에서 분전해 결국 승리를 거둡니다. 최충헌은 둘째 치고 정말 귀한 승리였죠. 다만 부상당해 개경에 돌아온 안팽조의 보고가 마음에 걸립니다.

"거란병이 사살된 것은 다만 2사람뿐이고 그 나머지 죽은 자는 모두 아군이다"

대승과는 전혀 상반된 보고, 고려사를 지은 이는 이것까지 기록해 놓고도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동사강목의 안정복도 마찬가지네요. 진실은 저 멀리에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거란군은 현 경기도에서 벗어났는데, 안팽조의 보고가 사실이라 한다면 그냥 장소를 옮긴 것일 뿐이고, 거짓이라면 패해서 달아난 거겠죠. 

그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남진해 강원도 원주에 이릅니다. 원주에서는 관민이 합동으로 한 차례 막아냈고, 적은 후퇴해 현 춘천을 휩쓸어 버립니다. 다시 원주로 향한 거란군, 원주는 아홉 차례의 공격을 버티고 열 번째의 도끼질에 결국 함락됩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그냥 작전상 후퇴 정도였을 뿐 풍양현에서 관군이 승리한 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3. 1218년까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서경에서 관군을 지원하러 보낸 최유공, 김성의 병력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죠. 병사였다는 최광수가 병사들을 선동하니 최유공은 대응을 못 했고 김성은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최광수는 서경에 틀어박혀 "고구려 홍복병마사"를 자칭합니다. -_-; 고려에서 일어난, 고구려 부흥 운동이었습니다. 다행히 최광수가 알던 사이인 정준유가 귀부하는 척 하다가 죽입니다. 

한편, 최원세는 김취려와 의논하며 독점에 이릅니다. 김취려와 의논 끝에 그는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눠 진격해 승리하고 추격해서 섬멸시키니 이 곳이 제주입니다. 어디냐구요? 충북 제천이요. 울고 넘는 박달재까지 쫓아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승리한 후 고려군은 김취려의 주장에 따라 고개 위에 진을 쳤고, 다음 날 적이 공격해오자 필사적으로 반격해 물리칩니다. 고려군은 이들을 추격해서.......... 대관령에 이릅니다. 일단 장수와 사졸들이 겁약(검색하지 마세염)해서 후퇴하는 사이 그들은 이미 대관령을 넘습니다. 다음 타겟은 명주, 현재의 강릉이었습니다.

고려군은 이를 쫓아 대관령을 넘었고, 현 평창 지방인 모로현에서 동계 올림픽을... 아니 전투를 벌여 승리합니다. 명주를 포위한 적도 싸워 이겨 등주(함경남도 안변)까지 추격했다가 오수정이 전사하죠. 그들은 고려와 여진의 경계를 넘었고, 닭 쫓던 개 꼴이 된 김취려는 3겹으로 방어 진지를 구축하며 대치합니다. 이 때 고려에 큰 불행이 있었으니... 김취려의 병이 심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하들의 권유에도 끝까지 남으려다 왕명으로 귀환합니다. 그 사이 동북에서는 다시 전투가 있었는데, 고려군이 패하여 예주, 현 함경남도 정평이 함락됩니다.

한편, 서북면에는 태조탄 전투에서 패전했던 조충이 다시 올라옵니다. 아마 간을 아주 씹어먹고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여기서 그는 새로운 적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며 그 실력을 입증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밑에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서북면에서는 청천강을 경계로, 동북면에서는 현 함흥, 정평 일대를 경계로 치고박고 하는 사이 최충헌은 문한경을 중심으로 한 삼군을 재창설합니다. 어느새 또 해는 흘러 1218년이 되었습니다. 동북면에서 놀던 거란군도 서북면으로 합류한 상황이었죠. 최충헌은 김군유를 서북면 병마사로 삼고 기존의 병마사였던 조충을 개경으로 불러들입니다. 

4. 적은 강동성으로
"만 리를 달리던 준마의 단 한 번 실수로 / 비명 소리에 시절이 바뀐 줄 몰랐네
혹 조보(주나라 때 말 잘 부리던 사람)로 하여금 채찍을 가하게 하면 / 백사장 짓이겨 밟으며 오랑캐를 꺾으리라"

조충이 태조탄 전투에서 패한 후 지었다는 시입니다. 패배에 대한 분노와 명예 회복을 위한 의지가 깊게 담겨 있죠. 재기용된 후에 그는 이를 씻어낼 만한 공을 세우긴 합니다. 하지만... 후에 일을 얘기함에 있어서는 너무 사소했죠. 

1218년 3월, 고종은 최충헌에게 궤장을 하사합니다. 조선에도 이어진, 나이 든 신하에게 내리는 최고의 예우였죠. 최충헌은 나이가 들었으니 그만 물러가겠다 했고 고종은 그걸 만류하면서 내린 것입니다만... 그렇게 보이나요? -_-; 고려사에도 최충헌이 거짓으로 은퇴하겠다 했고 그걸 안 고종이 했다고 하는데요 뭐. 하긴 그렇게 고려를 막장으로 만든 게 최충헌과 그 이전의 무신 정권들이었지만 지금 고려에서 최충헌이 없으면 또 안 됐으니까요.

4월, 최충헌은 삼군의 대장으로 삼은 문한경을 귀양 보냅니다. 적이 계속 오는데도 막지 않고 머뭇거리기만 했다는 이유였죠. 조충을 개경으로 불러 온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최충헌이 사람 보는 눈만은 탁월했던 것 같기는 합니다. 

7월, 권토중래를 꿈꾸던 조충, 여기에 병이 회복된 김취려가 가세하면서 고려군은 반격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백면서생이라 무시했던 장수들도 그가 좀 제대로 명령을 내리고 군기를 잡자 무시하지 못 한 모양입니다. 조충은 우선 4군을 이끌고 동주,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에서 적을 대파한 후 원군을 기다립니다. 

+) 이 때 병력이 꽤나 부족했는지 유생들을 모아 시험을 친 후 합격한 80명 빼고는 전부 군대로 보냅니다.

9월에 안찰사 이적의 경상도 병력이 도착합니다. 원군이 온 걸 안 거란군은 둘 사이를 차단했죠. 그들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조충군을 치니 오히려 조충은 좌우군을 벌려 길게 늘어선 후 북을 치며 차근차근 전진합니다. 한편 이적은 자기에게 피하라고 하는 이돈수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아가면 오직 적을 못 만날까 걱정인데, 적을 만나 피한다면 용맹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며 이적은 돌격했고, 조충과 이적에 의해 거란군은 대패합니다.

+) 고려사 본기에는 이적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조충과 이적의 열전에 각기 내용이 다릅니다. 조충의 경우 이돈수는 지원군으로 간 것이었고, 그가 가서 병력이 빠진 틈을 타서 거란군이 공격해 온 것이죠. 반면 이적의 열전에는 조충이 이돈수를 시켜 적을 피하라고 타이르랬다고 합니다. 어쩌면 조충이 이적을 시험해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전장은 각기 달라도 적의 주력은 조충을 친 것으로 보이며 이 둘이 각기 승리한 것 같습니다.

패한 거란군은 이번에는 고려의 보급로를 끊으려 하지만 마침 지원 온 이적과 수송을 맡던 박의린에 의해 독산에서 또 다시 패합니다. 한편 서북면 병마사 김군수는 현 숙천에서 적을 대파하고 퇴로를 끊어 버립니다. 조충은 탈라 등이 이끄는 적의 주력을 다시 또 대파하니 금산 왕자는 강동성으로 후퇴했고, 서북면에 남아 있는 아군과의 연결도 끊겨 버렸죠.

1216년에 시작된 전쟁은 1218년 9월이 되어서야 끝날 기미가 보였습니다. 하지만 강동성의 수비는 막강했고, 쉽게 공격할 수 없었죠. 그 안에 있는 거란인만 5만이나 되었습니다. 고려로 들어온 거란의 거의 전부였죠. 

하지만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렸습니다.

5. 새로운 적, 혹은 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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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도적떼 토벌이 아니라 전면전으로 나라가 개판 된 수준

만주에서는 금이 약해진 틈을 타 여진족이 분열, 여러 세력이 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제일 잘 나간 건 역시 몽고의 후원을 받는 동진의 포선만노였죠. 그 외에도 압록강 건너편에 우가하와 황기자 가유 등이 있었습니다. 

가유는 황색 깃발을 들고 다닌다 해서 황기자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1217년 9월부터 거란과 손을 잡고 북계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거란군으로서도 그들의 지원이 급했습니다. 이 해 4월에 위화도로 비정되는 대부영, 고려로 들어온 입구가 동진국에 의해 함락됐거든요. 이 때 동진국은 고려로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고려와 괜히 척 질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우선 압록강을 넘어 온 황기자의 병력은 조충이 이깁니다. 이걸로 그나마 명예회복을 했죠. 이어 1218년 6월, 분계 북도장군 정공수는 황기자를 사로잡습니다. 이것도 여진이 잔당인 우가하의 요청이었죠. 황기자와 세력다툼을 하던 그는 이기지 못 하고 압록강을 건너 와 살려주길 빕니다. -_-; 이에 대부영에 있던 황기자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로잡아 버리죠.

이런 상황 속에 거란의 유민의 의미가 너무 커졌습니다. 고려로 보면 단지 살려고 들어 온 도적들일 뿐이었지만, 이들은 몽고와 동진에 있어서도 눈엣가시였죠. 동진을 지원할 몽고군이 도착하자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1218년 12월, 대규모의 병력이 고려로 들어옵니다. 동북에서는 동진의 2만 병력이 들어와 화주, 현 함경 영흥군을 함락시켰고, 서북에서는 몽고군 1만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순식간에 거란이 점령하고 있던 맹주, 순주, 덕주(맹산군, 순천군, 덕천군)을 함락시키고 거란군이 웅거하고 있던 강동성으로 향했습니다.

고려에 미리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3만이나 되는 외국군이 고려를 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상황은 국지전에서 국제전으로 바뀝니다.

몽고군은 삽시간에 강동성으로 내려왔고, 강동성을 공격하던 조충은 여기서 그들과 첫 조우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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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때 조충과 김취려의 심정은 이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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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 몰아오지 말라고 이 거란 찌끄레기들아 ㅡㅡ"


출처 작성 당시 기준으로 눈시BBver.2님의 글입니다.

http://pgr21.co.kr/pb/pb.php?id=freedom&no=34670&page=3&divpage=6&sn=on&keyword=%EB%88%88%EC%8B%9C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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