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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죽은 지 백일 하고도 여드레가 지났다.
사람들은 여우를 미워했지만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여우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새끼를 감싸다 죽었다. 사람들은 그런 여우를 때려죽인 다음, 새끼를 잡아 황제에게 바쳤다.
하찮은 미물에게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지만, 지고지순한 만물의 영장에게 그런 것은 한낱 하찮은 일일 뿐이었다.
“어허,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여기가 어디인줄 알고 앉아서 버티는 것이냐.”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나졸이 내리는 불호령에도 여우는 꿈쩍 않고 자리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갈 수 없습니다.”
“어허, 참말로 네가 큰 벌을 받아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작은 벌을 내리든, 큰 벌을 내리든 제 소원을 들어줄 때까지 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으니 그리 아십시오.”
“하, 이것 참.”
자기 할 말만 하고서 다시 목 놓아 우는 여우를 눈앞에 둔 채 나졸은 그저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좋은 말로도 달래보고, 험한 말로도 달래 보았지만 여우는 한사코 자신의 소원을 들어 주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졸이 여우를 본지도 벌써 백일 하고도 여드레가 지났으니, 지극정성이라 하면 지극정성이었다.
“네가 지금 들어달라는 소원은 지옥의 규율을 흔드는 일이다. 그 어느 누구도 들어줄 수 없는 일이니 스스로 죄를 무겁게 하지 말고 어서 썩 들어가거라.”
“그 옛날 화과산에 살던 제천대성도 자신의 명을 고쳐 평생을 불로불사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전례도 있는데, 어찌 단 하루의 말미도 저에게 줄 수 없단 말입니까?”
“제천대성이 저 드높은 천상과 이 깊은 지옥의 규율을 어긴 죄로 억 만근 쇳덩이 속에 갇혀 참회한 것을 정령 네가 알고 하는 소리란 말이더냐. 헛소리 하지 말고 어서 네가 가야 할 길을 가거라.”
“절대 못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제 새끼를 다시 보지 않고서는 죽어서도 죽을 수 없고, 편히 누울래야 누울 수도 없습니다. 억 만근 쇳덩이 속에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저 지옥의 업화 속에 뛰어 들라면 뛰어 들 테니, 부디 한 번만 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이미 죽은 몸이었지만 그 슬픔과 괴로움이 사무쳐 여우의 모습은 이미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나졸과 여우의 실랑이는 지옥문을 통과해 육도로 가는 많은 영들의 입을 타고 염라대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오늘이면 포기하겠거니, 내일이면 포기하겠거니 하던 것이 벌써 백일 하고 여드레가 지났다.
지옥의 규율을 어긴 죄가 무거웠으나, 저렇게 한사코 못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염라대왕 역시 그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염라대왕이 직접 여우를 찾아 나섰다. 지엄한 염라대왕의 행차에 성문을 지키는 나졸을 비롯한 모두가 무릎을 꿇었지만, 오직 여우만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통곡을 했다.
염라대왕이 자세히 보니 보통 여우가 아니라, 꼬리가 두 개 달린 여우였다.
“너는 지상의 법도와 천상의 도리를 깨우쳤으면서, 어찌 이렇게 소란스럽게 지옥의 규율을 문란하게 하느냐.”
염라대왕의 목소리에 여우는 꼬리를 가지런히 모아 절을 하며 예를 표했다.
“비록 지상의 법도와 천상의 도리를 깨우쳤으나, 어미로써 남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여기서 이러고 있나이다. 부디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어느새 여우는 하얀 소복을 입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천 년 동안 도를 닦아 저 드높은 천상, 이 깊은 지하의 벼슬을 하고자 하였으나 도중 사랑하는 지아비를 만나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지아비가 같은 인간들에게 살해당한 이후 오로지 남은 것이라고는 새끼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생사를 알지 못하여 죽어서도 죽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부디 단 하루라도 좋으니,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염라대왕은 자신의 발밑에 무릎을 꿇은 채 오열하고 있는 여우를 근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아니 된다.”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눈물이 여우의 눈에서 떨어지고, 지옥문을 지키던 나졸들이 여우를 둘러싸 그 팔과 다리를 움켜잡았다.
“이거 놓으시오. 소원을 들어주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어서 가자. 더 이상은 지체할 시간이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여우를 나졸들이 끌어당겼다.
“제발…, 제발 놓아 주시오. 하루가 안 된다면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제발 나를 놓아 주시오. 제발….”
몸부림치는 여우와 제지하는 나졸들 사이로 염라대왕이 손을 뻗었다. 나졸들이 여우를 바닥에 내려놓자, 염라대왕의 소매에서 금빛 테두리가 달린 주머니가 떨어졌다.
“다시 말하지만, 너의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 허나 너의 청이 너무나 간곡하니, 정 가고 싶거든 스스로 그 방법을 찾도록 하여라.”
여우가 황급히 주머니를 풀자, 그 안에는 검은색으로 빛나는 씨앗이 열두 개 들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천도복숭아의 씨앗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본래 천도복숭아는 천상에서만 자라는 것이다. 또한 아무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허나 네가 이 천도복숭아를 잘 가꾸어서 열매를 맺게 한다면, 너에게 특별히 먹는 것을 허락해 주도록 하겠노라. 죽은 자가 먹는다면 하루, 산자가 백년을 장수할 수 있는 약이니 어디 한번 잘 키워보도록 하거라.”
염라대왕이 사라지자, 여우는 주머니에서 씨앗을 꺼내 지옥문 앞에 정성스레 심었다.
한 달이 지나자 열 두 개의 씨앗 중 아홉 개의 씨앗에서 싹이 올라왔다.
일 년이 지나자 아홉 개의 싹 중에서 여섯 개가 묘목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나자 여섯 개의 묘목 중 세 개가 새파란 잎을 활짝 펼쳤다.
여우는 밤낮 할 것 없이 남은 세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돌보는데 힘을 썼다. 매일같이 삼도천에서 길어온 물을 나무에 주었고, 혹여 문제가 생길까 나뭇잎 하나하나 정성스레 돌봤다. 육 년이 지나자 세 그루의 나무에 각각 하나의 천도복숭아 열매가 맺혔다. 하지만 금세 천도복숭아 두 개가 시들어버렸다. 금방이라도 새끼를 볼 수 있다는 마음에 너무 들뜬 나머지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여우가 너무 심하게 자책한 나머지, 나졸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여우는 남은 하나의 천도복숭아를 애지중지 돌봤다. 물을 길으러 삼도천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잠도 자지 않은 채 천도복숭아만 바라보았다.
나무를 심은 지 십이 년째 되던 날 언제까지나 파랗기만 하던 복숭아가 붉은빛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다. 여우는 뛸 듯이 기뻤지만, 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쁜 마음을 감추고 정성스레 나무를 돌봤다. 그리고 나무를 심은 지 십팔 년이 되던 어느 날 천도복숭아가 완전히 새빨갛게 익었다.
여우는 기나긴 세월의 인고를 함께한 나졸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들에게 천도복숭아 돌보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인사를 끝내고 여우가 천도복숭아를 먹으려는 순간, 영들의 무리 속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다가왔다.
“그 천도복숭아를 내게 주시면 안 되겠소.”
젊은 여자는 여우를 보자마자 대뜸 그렇게 말했다.
“안 되오. 이건 줄 수 없소.”
여우는 천도복숭아를 감추듯 소복 속으로 집어넣었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내게 그 천도복숭아를 줄 수 없겠소?”
“사정이 있든 없든 이건 줄 수 없소.”
여우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젊은 여자가 한걸음 다가왔다.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럼 당신의 사정을 한 번 말해 주시오. 나는 지금 죽어가는 지아비를 살리기 위해 천도복숭아를 찾아 여기까지 찾아왔소. 당신의 사정은 잘 모르나, 나보다 딱하지 않다면 그 복숭아를 양보해 줄 수 없겠소?”
“그쪽의 사정이 딱한 것은 알겠으나, 이 복숭아는 내가 십팔 년을 걸려 키워낸 것이오. 그러니 절대 줄 수 없소. 어서 돌아가시오.”
“그럴 수 없소. 염치가 없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있는 지아비의 목숨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오? 부탁이니 제발 그 천도복숭아를 내게 양보해 주시오.”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소.”
여우가 젊은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고 지옥문을 지키던 나졸이 달려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몽둥이를 휘둘렀다.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인줄 알고 아직 죽지도 않은 자가 들어 온 것이냐? 썩 나가지 못할까?”
나졸의 몽둥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 뒹굴었다. 하지만 젊은 여자는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나졸에게 대들었다.
“그럴 수 없소.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지아비를 구하기 위해 백일 하고도 여드레를 걸려 이곳에 왔소. 약을 받기 전까지는 절대 여기서 떠날 수 없소.”
“아직 네놈이 덜 맞은 모양이로구나.”
나졸이 여자를 향해 몽둥이를 치켜들자, 여자는 머리를 움츠리며 몸을 숙였다. 두려움에 정신을 잃은 나머지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쫑긋 솟은 여우귀가 보였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몽둥이를 치켜든 나졸 앞을 여우가 가로막았다. 나졸은 몽둥이를 들고 여우에게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녀석. 지금까지 염라대왕의 은혜를 받았으면 곱게 지상에 내려갈 것이지, 왜 다시 지옥의 규율을 어지럽히는 것이냐.”
“잠깐이면 되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여우의 고집을 잘 아는 나졸은 몽둥이를 들었다 다시 내려놓았다. 여우는 쓰러진 여자를 붙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그 변신술은 어디서 배웠소?”
여우의 질문에 여자는 머리카락으로 솟아나온 귀를 감추듯 덮었다. 자세히 보니 치마 끝자락으로 풍성한 꼬리가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말하기 싫소.”
“말을 하지 않으면 이 천도복숭아를 주지 않을 것이오.”
여우가 천도복숭아를 들어 집어 던지는 시늉을 하자, 젊은 여자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마…, 말 하겠소. 아주 어릴 적 부모님한테 배웠소.”
“부모님은?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소.”
“그건 나도 모르오. 내가 아주 어릴 적 다 돌아가셨다고만 알고 있소.”
그 말을 들은 여우는 젊은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슬픔의 감정인지 기쁨의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아주 희미한 정도였지만, 젊은 여자에게서 여우와 비슷한 표정이 느껴졌다.
뒤에서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나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자신이 있던 위치로 돌아갔다.
“이걸 가지고 얼른 돌아가시오.”
여우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품에서 천도복숭아를 꺼내 젊은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아니 이렇게 줘버리면….”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가지고 내려가시오.”
여우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서 나졸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아니 적어도 어떤 사연 때문에 천도복숭아가 필요했는지는 알려줘야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아니오.”
“당신의 사연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이야기요. 신경 쓸 필요 없소.”
젊은 여자는 나졸을 향해 걸어가는 여우의 뒷모습에서 살랑거리는 두 개의 꼬리를 보았다. 젊은 여자가 뒤늦게 소리를 쳤지만, 여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여우는 이미 나졸과 함께 지옥문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