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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4개 도시 여행기_로마_첫째 날_오전_Part1
게시물ID : travel_126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비틀즈포세일
추천 : 5
조회수 : 56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11 23:04:17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travel&no=12533&s_no=10272171&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632479 (프롤로그)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travel&no=12572&s_no=10291066&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632479 (출발에서 로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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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도착해 숙소에서 잤으니 사실상 오늘이 로마에서의 첫째 날이다아침에 일어나 여권과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게 단단히 챙기고 길을 나섰다먼저 간 곳은 숙소에서 가까운 테르미니 역이었다여행안내서에서 나온 로마패스(ROMA PASS)를 사기 위해서였다로마패스는 처음 사용 후 72시간 동안 로마의 모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박물관 등 유적지 두 곳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세 번째 부터는 할인, 48시간짜리도 있다고 함)고해서, 이걸 사기 위해 역에 갔는데 도저히 관광안내소를 찾을 수 없었다결국 경찰에게 물어봤는데, 알려달나는 것은 알려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손에 든 카메라와 옆으로 맨 작은 가방을 배낭 안에 넣으라는 지시만했다어쩌면 그것이 이곳 로마에서 그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을 수도 있지만그 이상의 친절은 기대하기 힘들었다이후에도 이탈리아 시민들의 친절함과 관광안내소 및 경찰의 불친절은 대비를 이루며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결국 관광안내소를 찾지 못하고 콜로세움으로 향했다지도만보고 걸어가기로 했다가는 길에 성당이 하나 있었는데관심이 생겨 문 앞에 가보니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다난 들어가 규모와 아름다움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도 그럴 것은 그냥 흔히 있는 동네 성당쯤으로 알고 큰 기대를 안 하고 들어갔기 때문이다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성당은 교황청 직할의 산타 마리아 마조래(S. Maria Maggiore) 성당이었다원래 5세기에 만들어진 성당인데교황 니콜라스 5세가 로마의 도시 재건 사업을 하며 최초로 복원한 성당이라고 하며이후에도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금박으로 장식된 높은 천장과 사이사이의 천장화돔의 그림그리고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들과 소수의 관람객이 만들어낸 성당의 분위기는 당장 나를 압도했다. ‘이래서 이런 큰 성당을 만드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20분 정도를 둘러보고다음을 기약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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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기도 하던 두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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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래 성당  내부의 모습


다시 콜로세움으로 향했다향하다보니 길이 헷갈리기 시작했다마침 지하철역이 있어 그곳에서 위치를 확인하고 한 커플 중 남자에게 길을 물었다커플 중 남자라면 최소한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매몰차게 대할 것 같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예상이 맞아서였는지원래 친절한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는 나에게 아주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그의 안내에 따라 길을 내려가다 왼쪽으로 꺾으니 콜로세움이 보였다콜로세움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줄을 안내하는 사람에게 로마 패스 살 수 있어?”라고 물어보니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뭘 물어보더니 여기에 서라고 말했다줄을 서서 기다리니 표사는 곳이 나왔고거기서 로마패스를 달라고 했다표 파는 사람은 흔쾌히 줄 것처럼 이야기 했지만 잠시 당황하더니 다른 곳에 가서 로마 패스를 찾아왔다.


007-1.JPG
 로마패스의 모습.. 


콜로세움은 로마만큼 유명한 곳이다원래 이곳은 네로가 짓던 황금궁전의 연못 터였다말은 궁전이었지만 네로는 이곳을 일종의 공공장소로 로마시민에게 제공하려고 했다그러나 황금 궁전의 터가 문제였다바로 로마 대화재로 생긴 것이었기 때문이다이로 인해 네로가 일부로 불을 질렀다는 소문도 돌았다이는 사실이 아니다네로는 화재 진압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고이후 로마의 소방법을 정비하기도 했다하지만 소문은 줄어들지 않았다거기에 명망이 높던 스승 세네카와 명장 코르불로를 자살로 내몰기도 했다결국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네로는 자살한다네로 사후 여러 사람이 황제를 칭했는데이를 수습한 사람이 베스파시아누스다그는 네로의 황금궁전 계획을 완전히 백지화하고 새로운 원형 경기장의 건설을 지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콜로세움이다원래의 이름은 베스파시아누스 일족의 이름을 따서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은 원래 이곳에 있던 네로의 거상 콜로서스(colossu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규모는 최소 4만석에서 최대 8만석을 넘었다고 하고밖에서 보면 비슷해 보이는 아치가 삼층으로 이어졌지만각각 다른 양식을 사용해서 단조로움을 피했다고 한다.

이곳은 검투사끼리의 경기검투사와 죄인들 간의 경기검투사와 맹수와의 경기맹수와 포로들 간의 경기오페라연극 등 각종 잔인하고 아름다운 볼거리가 넘쳐나는 곳이었다그 덕분에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탄압할 때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콜로세움에서 잔인하게 죽였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만들어지기도 했다콜로세움은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원형극장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어 후대에 많은 영감을 줬다각종 영화의 배경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굳이 이렇게 쓰지않아도 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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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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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 찍어본다는 콜로세움 외부


콜로세움에 들어가자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인지엄청난 감동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던 곳이라고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그러나 천천히 돌아보고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옛 모습이 복원되기 시작했다이곳을 가득 메운 사람들중앙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검투사들정치적 목적과 쾌락을 위해 이미 죽을 운명을 알고 맹수를 기다리는 포로들 등등햇볕이 강할 때에는 이곳을 장막으로 덥기도 했고횃불로 야간 경기(?)를 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그 잔인하고 열광적이고 화려한 이곳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볕이 좋은 곳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문득 정신 차리고 주위를 보니 사람이 꽤 많이 들어왔다그 중 상당수가 프랑스 학생들로 추정됐는데이상한 동양인이 바닥에 앉아 노트에 글을 쓰고 있으니 신기한 듯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돈이라도 던져 줄 것 같아 얼른 일어났다다른 곳도 가봐야 했고멍 때리느라 생각보다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나 있었다.

 

콜로세움은 팔라티노언덕포로로마노와 가까운 곳에 연결되어 있다팔라티노언덕은 로마를 세웠다고 알려진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와 함께 발견된 곳이라고 전하는 곳이고 후에 로마의 첫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왕궁을 지은 곳이다포로로마노는 로마 정치의 중심지로 카이사르가 만든 율리우스 포룸트라야누스가 만든 트라야누스 포룸원로원 등이 위치했던 명실상부한 제국 로마의 중심지였다콜로세움은 그런 로마의 한 복판에 만들어진 기념비적인 기념물이었던 것이다.

 

콜로세움 안에서 앞으로 갈 팔라티노 언덕과 포로로마노를 바라보면 그 사이에 엄청나게 큰 개선문이 하나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이다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지위를 자신이 획득하면서 황제에 올랐다. 3세기의 위기라고 불리던 로마는 당시 주변 민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다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한 것은 로마제국의 지방에서 태어난 무장 출신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그는 로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1명의 황제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4두 정치였다그의 사두 정치는 동방과 서방에 각각 한 명의 정제(正帝 : Augustus)를 두고 그 밑에 각각 부제(副帝 : Caesar)를 두는 체제를 고안했다각각의 황제가 자신이 맡은 지역의 군사권을 갖고 방위를 담당하는 체제였다이 제도는 권력을 넷으로 나눈 것 같지만 군사적인 것이었을 뿐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정치외교 등의 권리를 완벽하게 독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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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에서 바라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는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는 이때 서방의 부제로 임명됐다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또 다른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와 은퇴하자 콘스탄티누스 콜로루스는 정제에 자리에 올랐는데아쉽게 곧 병사한다이때 콘스탄티누스 콜로루스 휘하의 병사들이 그의 아들을 황제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다그는 바로 정제의 자리를 이어 받지 못하고 일단 부제에 지위에 오른다하지만 이때 로마는 초기 4황제와 그 아들들의 권력 다툼으로 다시 심한 혼란에 빠진다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정제에서 은퇴했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다른 황제들을 연이어 격파하였던 것이다이를 혼란을 극복한 것은 역시 콘스탄티누스였다그는 예수그리스도가 계시를 내렸다는 막센티우스와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고 서방의 유일한 황제가 되며이후 동방의 황제였던 리키니우스까지 물리치면서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콜로세움 앞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바로 이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으로 향했다그 앞에는 프랑스 학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가 앉아 개선문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었다난 그 옆에 모른 척 앉아 개선문을 감상했다그의 개선문에는 전시대의 황제인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마르쿠스 아우델리우스 등 오현제 시대의 작품들을 일부 가져와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는데나중에 알고 보니 조금 잘 만들었다 싶은 것은 그 당시 것이었다오현제 시대는 로마제국 1,000년의 역사에서도 가장 전성기였고그 전성기에는 문화·예술도 포함되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제도를 정비한 재능 있는 황제임은 분명하지만혼란한 시대의 제국은 전성기 제국의 예술 역량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예술은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보며 새삼 느꼈다이렇게 조용히 감상 중인데프랑스 학생(?)들 중 일부가 날 힐끔힐끔 쳐다봤다처음엔 괜히 나 혼자 느끼는 거겠지..’ 싶었는데아무래도 자기네 옆에 앉아 있으니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다시 일어나 개선문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팔라티노언덕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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