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떠난 곳이라 그런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모두 생소할 뿐.
하루종일 무엇을 경험해도 새롭다는 건
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학창시절엔 새학기가 되면 묘한 기대감이 생기지 않습니까.
누가 새로운 친구가 될까? 어떤 인연이 기다릴까?
어떤 선생님을 만날 것이며, 또 무엇을 배우게 될까.
처음으로 가나다 대신에 알파벳을 배우고,
처음으로 덧샘과 곱셈 대신에 미분을 해보며
처음으로 크래파스 대신 수채물감을 다루고,
처음으로 송진을 묻혀서 바이올린을 켜보던,
정말 날것같은 처음의 느낌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직장생활이야 사원때는 배우는 맛으로 다니지만
대리를 넘어서고부터는 자기반복, 매너리즘, 요령과 눈치 사이에서
일상은 컨트롤 브이의 반복에 수렴하지요.
가끔 회사를 옮기게 되면, 새로운 기분이 들지만
정말로 새롭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도 핸드폰 사진으로
그때만 바라보면 배시시 되곤 합니다.
하나하나 반추해서 기록할까 하다가,
시국이 시국인지라 나만 너무 한가한가 싶어서
그냥 여행에 관한 생각들만 공유하고 싶네요.
2.
여행은 사실 떠나기 전이 제일 흥분되지요.
동선을 짜고, 숙소를 예약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볼지 일정을 짤때가 제일 즐겁습니다.
막상 떠나게 되면 변수도 생기고,
동행과 다툼도 있을 수 있고,
저질체력에 피곤할 수도 있지요.
원래는 여행하기 전에
꼼꼼하게 알아보는 스타일이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계획없이
그저 JR청춘18티켓 포스터만 바라보다가 떠났습니다.
여행의 설램을 살리기에는
이만한 포스터가 없으니까요.
3.
청춘 18티켓은 일본JR이 발행하는 무제한 철도 탑승권입니다.
우리나라 내일로 티켓과 비슷하지만
이름과는 다르게 연령제한이 없습니다.
그냥 18살 청춘시절로 돌아가 마구마구 여행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 같습니다.
열차가격이 상당한 일본에서, 하루 무제한 티켓이라니
그 효용성은 상당하겠죠.
그렇다고 신칸센이나 특급열차까지 해당되지 않고
보통열차나 쾌속열차에만 해당됩니다.
사실 고생을 동반하기는 하지요.
그래서 그런지
청춘18티켓 광고포스터로
요 고생스런 여행을 상당히 낭만적으로 포장하곤 합니다.
4.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을
사람들은 평생 잊지 못한다
첫사랑, 첫키스, 첫눈처럼
여행도 처음일때의 흥분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나봅니다.
혼자 떠난 처음 여행은 아니었지만
혼자 떠난 장거리 여행은 처음이었기에
저 역시 아련하고 애잔하기만 합니다.
그러고보니 평생 잊지못할거란
말을 여행중 만난 인연에게 말하기도 했네요.
5.
여름방학은 늦잠이 제일 아깝다
방학때 늦잠자는게 꿀잠이라구요?
천만의 말씀!
해뜰때부터 해질때까지 실컷 돌아다니라고
여름낮은 길고 여름밤은 짧은 겁니다.
저녁10시까지 해가 지지않는 다는것이
그렇게 매력적인줄 처음 알았네요.
6.
벌써 3일째 TV를 보지않고 있습니다.
내가 하는 여행이
진짜 무한도전이고
내가 먹는 세끼가
진짜 삼시세끼인데
TV따위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ㅋ
7.
"우정은 영원한거다"
라는 말대신에 모두 함께 여행을 떠났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정말 재밌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로드무비는 완성되지요.
김어준씨는 말하더군요.
결혼전에 커플끼리 여행을 떠나보라고.
여행에서 생기는 수많은 '예상치 못한 변수'
그 변수에 대응하는 상대방을 봐야만
정말이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구요.
여행에서 동행과 다투기도 하지만
코드가 맞다면 그렇게 즐거운 여행은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결혼생활도 여행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8.
우리들이 내린 종착역은
누군가의 여행의 시작역이기도 하다.
거기서 내리실건가요?
누군가는 거기서 시작할지도 모르는데요?
저희 집안도
IMF때 부도를 맞이해서 상가건물에 빨간딱지가 붙고
난리가 났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은 거기서 다시 시작하셔서
몇 년 후 다시 상가건물을 구입하셨습니다.
(참 존경스럽지요.)
아직은 내리지 맙시다.
끝날때까진 끝난게 아니지요.
9.
천천히 가니까 볼 수 있는 것들.
사실 청춘18티켓은 특급을 이용못하니까
느리고, 시간도 오래걸립니다. 약점이지요.
광고라고 뭐 낭만적인 얘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결국은 마케팅이지요.
느림을 강점으로 말합니다.
고속열차는 너무 차창 밖 풍경이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폰카로 찍어도 안 이쁘구요.
느리니까 볼 수 있는 것들,
분명히 있습니다.
늦은 취업, 늦은 승진, 늦은 결혼에
너무 전전긍긍하지 맙시다 ㅎ
10.
어른들에게는
좋은 휴가를 보내야하는 숙제가 있다.
그냥 이 포스터 보고
짐 쌌습니다. ㅋ
이토록 즐거운 숙제라니요!
11.
이번의 여행의 끝나면
다음의 내가 시작된다.
여행이란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것,
X축과 Y축의 좌표가 변했으니
내 위치도 변해있겠죠?
그 포인트에서
시작되는 나는
전과 다를 수 밖에 없겠지요.
12.
멈추거나 뒤돌아보거나,
그래서야 만날 수 있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선택지에서 만나게 되는 흔한말
다른 길로 가라.
하지만 우리가 언제 다른 길로
가본적이 있겠습니까?
어제 다녔던 회사,
그냥 어제 갔던 길로
가는거지요.
여행은 다릅니다.
정말로 다른 길로 가거나
옆길로 새긴 힘들지라도
가던 길이라도
멈추거나 뒤돌아볼때
다른 모습들이 보이니까요.
마이 웨이도 좋지만
뒤도 돌아봅시다.
분명,
볼 수 없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3.
자신의 방에서
감히 인생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나의 생명은
하나의 우주요
그 개별적 존엄성은
아득하고 위대하기만 합니다.
그러한 인생의 주인인
내가
고작 20평 30평 안에서
인생을 생각하다니요.
그냥 떠납시다.
수평선쯤은 팔베게로 내려다 보이고
지평선쯤은 꼰 다리 사이로 갇혀 보일때
뭔가 큰 그림도 그려지지 않겠습니까ㅋ
14.
쓰다보니 새삼
인생과 여행은 무척 닮아있습니다.
매일 가던 길이야
지름길이 있겠지만은
여행에 지름길이 어딨습니까.
인생도 그렇구요.
떠날 때엔 설래다가도
예상치못한 변수에 계획은 흔들리고
잘못들어선 길에 헤매기도 하겠지요.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그러면 다른 길을 찾을 수 밖에요.
그게 여행과 인생의 묘미니까요.
갔던 길 매번 반복해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셔틀버스 탄 것 같은 인생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