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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2부 - 2. 처인성의 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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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0
조회수 : 70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6/13 14:45:56
살리타는 2차 침공을 벌이기 전에 강화도에서 나오라고 협박합니다. 이에 대한 고려의 답은 참 구구절절하면서도 -_-; 짜증나죠.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아니 내가 진짜 황제께 제대로 충성할라고 하는데 군사로 핍박하시고 백성들도 다 달아나니 우짜겠습니꺼. 일단 나라 꼴 좀 제대로 갖출라고 여기 잠깐 온 겁니더."

이 때 서경 이북은 사실상 비무장지대가 된 상태였습니다. 항전했던 이들은 모두 밖으로 나왔고, 몽고군은 청천강까지 마음대로 놀러다녔죠. 이런 것 때문에 무서워서 간 거다, 핍박 안 하면 제대로 충성 바친다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살리타는 그럼 왕 대신 최우가 나오라고 했지만 그건 더더욱 안 되죠 (...)

고려가 다루가치들을 다 죽였든 안 죽였든 몽고군은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는 1232년 8월이었습니다. 고려 정벌의 명을 받은 그는 9월에 다시 압록강을 건넙니다. 강동 6주부터 서경까지 이어진 방어선은 완전히 무력화 됐고, 굳이 대병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대신 철저한 정예병만 뽑았겠죠.

방침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공성전을 철저히 피하기로 한 것이죠. 청북이야 비무장지대가 됐지만, 황해도부터 개경까지 이런저런 산성들이 남아 있긴 했습니다. 섬으로 피한 이들도 많았지만 이전처럼 산성에서 숨 죽이고 있었죠. 최우가 내린 결정이기도 했고, 사실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몽고군의 뒤를 노릴 정도의 병력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 살리타는 공성을 포기합니다. 

서경에 다다른 살리타, 하지만 그 때 서경은 반란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서경 유수 등 관리들은 쫓겨났고, 백성들은 몽고군이 자기들을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죠. 이런 모습을 본 살리타는 서경에 아무런 적대 행위를 하지 않고 대신 홍복원을 보냅니다. 몽고군에게는 고려를 치는데 1등공신이나 다름 없었죠. 이런 그의 모습은 아들에게도 이어지비다.

10월, 살리타는 개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별 의미가 없었죠. 바다를 건널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에 놓인 살리타는 직접 배를 만든다는 대담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동원된 것은 포로로 잡은 태주(평북 태천)사람 변여였죠. 살리타는 그에게 해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지만, 변여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다라는 게 그냥 건너는 것도 아니고 지역마다 특색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몰랐을 가능성이 크죠. 이에 몽고군은 달군 쇠로 고문하며 물었지만, 변여는 끝내 모른다고 했습니다. 다만 수로가 몹시 험하다고 답했죠. 이후 이 공으로 그는 상장군에 제수됩니다.

나름 기세 좋게 해 보려던 살리타는 포기하고 배를 모조리 불태워 버립니다. 그리고 방침을 아예 바꿔버리죠. 고려 전체를 불태워서 고려왕이 나올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강화도 공격을 포기한 후에 방침을 바꾼 것인지, 애초에 방침이 그것이었고 강화도는 찔러보기였는지는 알 수 없군요. 다만 이미 1000명의 별동대가 방화와 약탈만 일삼으며 빠른 속도로 남진하고 있었고, 살리타 역시 본대를 여러 개로 나누어 남진하며 초토화 작전을 시작한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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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살리타는 차근차근 남진하며 경기도 광주에 도착합니다. 왠만하면 공성을 하지 않으려 했던 그였지만, 요충지였던 광주성만은 지나칠 수 없었죠. 그래도 성 하나쯤인데 하면서 공격했겠습니다만... 광주성은 몇 일간에 걸친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냅니다. 당시 광주성을 지키던 목사 이세화는 1차 침략 당시 경상도 안찰사로 있었는데, 경상도군을 이끌고 몽고군을 잘 막아낸 공으로 광주목사에 임명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임기응변을 발휘하며 성을 지켰고, 살리타는 하릴없이 포위를 풀고 우회합니다. 귀주성의 악몽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 참고로 이 때 몽고군 장수 중에 오야이가 빠져 있습니다. 귀주성 때문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입니다. =_=;

광주를 우회한 살리타는 용인으로 향합니다. 용인에서도 병력과 백성들은 산성으로 피해 있었죠. 몽고군이 지나간 곳은 처인부곡, 천민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 곳에 처인성이 있었죠.

처인성, 그 둘레가 425m도 안 되는 아주 작은 토성입니다. 방어 목적으로 쓰기도 참 애매하죠. 때문에 이게 고려에서 쌓은 게 아닌 백제의 유산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규모와 정규군 및 일반 백성들이 아닌 천민들이 들어갔다는 것을 보면 이들은 그저 살려고 근처에 성 비슷한 곳을 찾아서 들어갔다고 해석해도 되겠죠.

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1&sn1=on&divpage=6&sn=on&ss=off&sc=off&keyword=자이체프&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677

이전에 자이체프님이 직접 답사를 갔다 오신 후 후기를 남기셨죠. 

살리타가 보기에도 이 곳은 참 공격할 필요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일개 천민들이 굳이 그들의 앞길을 막을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는 처인성으로 향합니다. 처인성에 군량 창고가 있었다고 하네요. 

애초에 상대도 안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군사훈련 같은 건 받아보지도 않았을 부곡민들, 딱히 대장도 없는 상황에서 몽고군이, 그것도 살리타가 이끄는 본군이 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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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인성에는 의외의 승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피난 온 입장이었고, 몽고군이 처인성으로 향하자 성 안의 천민들은 그를 대장으로 추대합니다.

출처 pgr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34903&page=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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