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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2부 - 3. 명중한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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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0
조회수 : 105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13 14: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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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공성전은 피하고 철저히 파괴와 약탈만 하기로 했던 전쟁, 어차피 고려왕은 잡을 수 없지만 고려의 중앙군 역시 없었기에 수월했던 전쟁이었습니다. 무작정 밀고 들어가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청북은 비무장지대였고, 개경까지의 길도 뚫려 있었으며, 미리 보낸 선봉은 착실히 초토화를 진행 중이었죠. 본대는 그저 찬찬히 밀어붙이기만 하면 됐습니다.

이 때의 몽고군은 최대한 분산해서 움직였습니다. 단순히 파괴만 하기엔 이게 좋죠. 반면 아주 철저히 가루만 남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는 3차 침공에서 여실히 드러나죠. 이전에 베트남 전쟁 한국군 학살 관련 글 올릴 때의 주요 근거 중 하나가 그거였죠.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할 생각이 있었느냐의 여부 외에 그럴 능력과 시간이 있었느냐의 문제가 크게 걸렸습니다. 이 때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사방에서 흩어져서 논밭을 불태운다고 해 봐야 완전 초토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이 정도로 하면 고려왕이 알아서 나오지 않겠느냐는 거였죠. 이 부분은 3차 침공 때 제대로 다루겠습니다.

애초에 1차 침공에 비해 적게 데리고 온 상황, 경기도 광주라는 요충지를 뚫지 못 해서 우회했던 것, 그냥 넘길 수도 있는데 군량고가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도 애매했던 처인성, 그리고 그 처인성이 방어의 이점이 없다시피하고 정규군도 일반 주민도 아닌 천민들밖에 없었다는 너무나도 낙관적인 상황, 그렇기에 전황이 어떻게 진행됐든 살리타는 이를 너무나도 만만히 봤고, 저격을 당할 정도로 소수로 너무 깊숙히 들어왔습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이 바로 처인성 전투입니다.

이런 우연에 단 하나의 조건이 합쳐졌죠. 처인성의 천민들이 싸우기로 결심했고, 그 대장으로 김윤후라는 승려를 대장으로 뽑았다는 것이요.

여러 가지 추정이 가능합니다. 자이체프님의 말씀처럼 그냥 군량이라도 좀 가져가려고 왔는데 몽고군이 와 있어서 싸울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고, 갈 데가 없어서 거기라도 가자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죠. 살리타가 처인성을 직접 공격한 건지, 근처에 있다가 저격을 당한 건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그 정도로 대규모 전면전이 아닌 기습 혹은 정찰 단계에서 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김윤후의 행동 역시 철저한 계획 속의 행동이었을지, 어떻게든 싸워야 했기에 매복을 펼쳤는데 적 총대장이라는 대어가 걸린 것일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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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우연 속에 나온 결과라 하더라도 그가, 그리고 처인성의 천민들이 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고려사에서는 고려 조정에서 살리타에게 구구절절 "우리가 절대 몽고에 반항하려는 게 아이고 어쩌고 저쩌고 이러쿵 저러쿵" 이런 얘기만 잔뜩 쌓여 있습니다. 고려사절요에서는 이 부분을 과감하게 스킵했죠. 고려 조정에서는 어찌 할 바를 찾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예고된 공격이었지만, 그들의 생각에도 너무 빨랐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몽고군을 불렀다는 홍복원에 대한 적개심만 크게 나와 있죠.

고려사는 그렇게 오지 말라 살려 달라 오두방정을 떨다가, 고려사절요에서는 몽고가 쳐들어왔다는 간단한 말 한 마디를 한 후에 바로 이 처인성 전투를 다룹니다. 몽고는 물론이고 고려에서도 전혀 예상 못 했던 한 방이었던 것이죠. 원사에서도 이를 크게 다루면서 "눈 먼 화살" (정확히는 유시流矢, 빗나간 화살 내지 난데없이 날아온 화살) 에 맞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몽고군의 별동대는 충청도를 지나 대구에 도달했고, 부인사를 불태워 버립니다. 이 때 초조대장경이 불타죠. 만일 살리타가 무난히 용인을 넘어 충청도에 도달했다면 이런 파괴와 학살의 범위는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로 몽고군은 총퇴각을 시작하죠.

+) 대구에서는 이를 가지고 몽고군이 인해전술로 밀어붙였고 승병과 의병이 맞섰다가 패배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해전술은 아닌 것 같네요. 어떻든 대장경이 보관돼 있던 절이니 항전을 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적당한 방어시설도 없는 상황에서 이기긴 힘들었겠죠. 인명피해보단 이렇게 전쟁 때 지키기 힘든 문화재 피가 훨씬 컸을 겁니다.

이에 대해 동사강목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몽고 군사는 일시에 함께 돌아가지 않고, 혹은 먼저 가기도 하고 혹은 뒤에 떨어지기도 하고, 동으로 갈까 북으로 갈까 망설이면서 그 향할 곳을 알지 못하였다."

살리타의 복수도, 더 이상의 공격도 하지 못한 채 무질서하게 도주했습니다. 꽤나 많은 인원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 하고 낙오된 듯 합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던 어마어마한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김윤후는 한국사에 스나이퍼 아니 호국불교의 첫머리에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법명도 알려지지 않았던 일개 지나가던 승려가 이룬 공이었죠.

+) 지나가던 스님에 대해서는 여기를 (...)

https://namu.wiki/w/%EC%A7%80%EB%82%98%EA%B0%80%EB%8D%98?from=%EC%A7%80%EB%82%98%EA%B0%80%EB%8D%98%20%EC%8A%A4%EB%8B%98

조정에서는 그에게 상장군을 제수하려 했지만, 그는 "그 때 나는 활도 화살도 들고 있지 않다"면서 거부합니다. 이 때문에 처인성 전투에서 그가 정말 활약했는가를 의문삼긴 하지만, 이는 좀 그렇죠 (...) 마치 이순신 장군이 갑옷과 투구를 벗고 싸웠다 해서 정말 벗은 걸로 생각하는 수준이니까요. 대신 그는 섭랑장에 임명됐고, 환속하여 후에도 계속 싸웁니다. 이 전투로만 알려졌지만, 이후에도 그는 큰 공을 한 번 더 세우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미 살리타에게 사망 플래그가 세워져 있었다는 거겠죠.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돼서 같이 들어 온 설신은 한강을 넘으려는 살리타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다른 나라 대관이 남으로 강을 건너면 불길하다고 한다."

그 이전의 역사에 한강을 넘은 외세가 없긴 했지만, 이는 뻥카라고 봐도 될 겁니다. 한강 이남까지 내려가지 말라는 엄포였겠죠. 하지만 그기 실제로 이루어졌구요. 후퇴하던 몽고군은 그에게 지혜가 있다 하여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풀어줬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거짓말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였죠.

이 처인성 전투가 대세를 바꾸지는 못 했습니다. 하지만 연 단위의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대규모 파괴와 학살을 늦춰 주었죠. 문제는 최씨 정권이 그 시간을 살리지 못 했다는 거겠지만요.

이렇게 2차 침공은 끝납니다. 몽고에게는 악몽이었고, 고려에게는 기적이었죠. 하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해 말, 몽고는 동진국을 멸망시키고 포선만노를 붙잡아 처형합니다. 이제 동북면에서도 전쟁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뭔가 아쉬운 1차 침공, 기적 아닌 우연이 일어난 2차 침공에 이어 고려를 초토화시킬 3차 침공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출처 pgr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3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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