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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의 세월호 관련 독일일간지 기고문
게시물ID : sewol_457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prs21
추천 : 10
조회수 : 41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6/16 00: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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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와 <피로사회>의 저자인 재독 철학자 한병철 베를린예술대학교 교수가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가 빚어낸 비인간화에 따른 참극이라는 진단을 담은 글을 26일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기고했다. ‘우리 모두의 배’라는 제목의 기고글에서 한 교수는 “돈이 지배하는 구조적 폭력 비인간적인 사회로 만들”었다며 “진짜 살인자는 선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블로거 ‘곰’님이 번역한 기고글 전문이다.

 

<우리 모두의 배> 한병철

한국 근해에서 일어난 여객선 참사는 오로지 승무원들의 책임 소홀이나 자격 미달로 인해 발생했거나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는 사고로 넘겨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자체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드러낸다. 세월호는 시대의 징후로, 아니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사회의 은유로도 해석할 수 있다.

사방에서 오직 선장에게만 여객선 사고의 책임을 전가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선장을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 사고는 무엇보다도 현대 경영자 출신의 전임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책임이 있다.

보통 선박의 수명은 20년이다. 그러나 2009년 친기업적인 정부는 해운법 시행규칙을 개정하여 30년으로 연장했다. 이 법률 개정은 당시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이던 신자유주의 차원의 규제 완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20년 규정이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한국 선박회사는 일본에서 퇴역을 얼마 안 남기고 있던 18년이나 된 배를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윤 추구에만 매달리는 기업의 방침은 사고 위험성을 크게 높인다.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라는 신자유주의의 금언은 인간의 삶과 가치를 희생시킨다.

한국에서는 해난 구조 작업도 과거에 부분적으로 민영화되었다. 해난 구조 작업의 민영화는 비용을 절감한다지만 위험성이 있다. 세월호의 경우처럼 해군 잠수대원까지 승객 구조에 참여했을 때 혼선이 빚어질 수 있고 그것은 구조 작업의 지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운항 승무원들은 또 대부분 비정규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단기 고용 계약을 맺었다. 선장부터가 아주 박봉에 겨우 1년 계약을 맺었다. 이름만 선장이지 아무 권한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취업 조건에서는 주인 의식도 배와의 결속감도 책임감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 나부터 구하고 본다. 진짜 살인자는 선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다. 그런 참사를 유발하는 체계적 폭력이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정규직은 아주 드물다. 노동 시장은 점점 비정규직으로 채워진다. 만연된 임시직은 사기를 떨어뜨린다. 한국에서 정규직은 아시아 금융 위기 때 IMF의 압력으로 관철된 신자유주의 조치들로 인해 정리되었다. 그 전에는 노동자의 신분이 안정되어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를 지배한 이후로 한국의 사회 분위기는 대단히 거칠고 비인간화되었다. 모두가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의 생존만 생각한다. 공동체의식은 무너진다.

한국 정치인들은 자기를 알리려고 서둘러 사고 현장에 갔다. 그곳에서 무엇보다도 사진을 찍었다. 한국의 여자 대통령은 갓 구조되었을지도 모르는 다섯 살 난 여아와 사고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다가 비판을 받았다. 정치인이 자신의 차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정치적 활동이나 행동은 오늘날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희귀하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방을 에워싼 체계적 제약 속에서 대안을 상실했다는 우리가 사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단면이다. 여기서는 대안을 제시하려는 정치는 불가능하다. 사방을 에워싼 체계적 제약은 과단성 있는 정치적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더 많은 이윤과 효율성을 위해 노동을 유연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일반화하는 추세다. 이제 사람들은 자주 프로젝트 단위로만 채용된다. 그러다 보니 회사와에 대한 강한 소속감이 생기지 않는다. 경영자들조차도 회사와의 일체감은 몹시 약하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그들은 회사가 침몰하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회사를 떠난다. 신자유주의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반적 결속과 신뢰를 무너뜨린다.

한국인 선장의 행동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인 노동 정책의 결과다. 그런 노동 정책에서는 선장에게 도덕적 책임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을 “내 배”라는 의식이 생겨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20년 전에 일어난 이와 유사한 끔찍한 선박 사고에서 승무원들의 행동은 전혀 달랐다. 운항 승무원 중 생존자는 전무했다.

일반적으로 선장은 자기 배와의 일체감이 강하다. 그래서 배와 운명을 함께 한다. 그것은 명예의 문제다. 타이타닉호 선장 존 에드워드 스미스는 물이 차오르던 마지막 순간까지 선교를 지켰다. 가까운 곳에 구명 보트가 있는 것을 보고서도 그는 구조받기를 거부했다.

그런 기풍은 오늘날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중해에서 침몰한 코스타콘코르디아호의 선장 역시 자시의 생존부터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의 사회 자체가 생존의 사회다. 모두가 자신의 생존만 챙기는 데에 몰두한다.

신자유주의는 독일의 경제학자 알렉산데르 뤼스토브가 창안한 개념이다. 뤼스토브는 사회를 시장에만 맡겨두면 사회는 비인간화되고 경직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연대, 공동체의식, 형제애를 낳는 “생명의 정치”를 요구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형식은 생명의 정치가 아니라 더 요란한 에고, 자기만의 기업가를 만들어낸다.

로스토브에 따르면 경쟁은 시장 경제 영역의 중심 원리지만 그런 경쟁 원리 위에다 사회 전체를 쌓아올릴 수는 없다. 도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경쟁은 결속의 원리라기보다는 와해의 원리에 가깝다. 지금의 전면 경쟁 체제는 사회 붕괴를 낳고 인간 관계의 파괴로 이어진다.

한국인 선장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선 자신의 생존부터 챙기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가 자기만의 사업가라고들 한다. 그러니 우선 자기부터 구하고 남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정도다. 신자유주의는 우리를 원자화한다. 모두가 오로지 자신의 생존에만 골몰한다. 그렇게 보면 세월호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축소판이다. 공동체의식이 무너질 때 우리 사회도 침몰 위기에 놓인다.

선박 사고 앞에서 정치인들은 사고를 야기한 과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명성과 감독을 강화하도록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더 투명성과 감독의 강화 요구는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투명성과 감독의 제고는 신뢰도 공동 의식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잃어버린 도덕은 돌아오지 않는다.

신뢰는 한 사회를 지탱하는 접착제다. 서로를 믿을 수 있다는 느낌은 사회를 안정시킨다. 그런 신뢰가 지금은 투명성과 감독으로 대체된다. 투명성이 신뢰를 다시 만들어내리라고 흔히들 말한다. 실제로는 투명성을 소리 높여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신뢰가 급격히 줄어든다. 투명성 지상주의는 신뢰 사회의 종식을 가리킨다.

신뢰는 믿음의 행위다. 어떤 조직이나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가 눈앞에 있을 때 신뢰는 불필요해진다. 신뢰는 <모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앎이 모자란 처지에서도 사람이 남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때 신뢰가 생긴다. 반면에 연대감과 공동의식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모두가 자기 이익부터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부패가 자리잡는다. 투명성과 감독은 부패를 막을 수는 있지만 공동의식과 신뢰감을 다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부패는 더 깊이 자리잡은 원인의 징후다. 투명성은 징후만 제거한다. 근본 원인, 다시 말해서 줄어드는 공동체의식과 늘어나는 이기주의는 그대로 남는다.

세월호의 침몰은 위기의 표현이다. 세월호는 사라지는 공동체의식, 늘어나는 이기주의, 신자유주의적인 영리지상주의, 신뢰의 위기, 도덕의 추락처럼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의 다발이다.

세월호의 세는 세상 세, 월은 넘을 월이다. 세월호는 더 넓은 세계로 넘어가는 배라는 뜻으로 선주가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배에 한글로 적힌 “세월”이라는 이름을 보면서 그런 뜻을 떠올리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한국어 세월은 시간의 덧없음, 항구성의 결여, 무상함을 뜻한다. 그것은 지속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의 생활 감각과 시대 의식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인간의 삶이 지금처럼 부평초 같았던 적은 없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생존하기에 급급하지만 좋은 삶을 함께 염려하는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 지속성과 항구성을 약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가라앉는 것은 쉴 곳이 없어서다. 아마 이 시대의 근본 정서가 그런가보다.

출처 * 1차 출처 : http://www.faz.net/aktuell/feuilleton/unglueck-vor-suedkorea-das-schiff-sind-wir-alle-12911567.html
* 2차 출처 : http://worknworld.kctu.org/news/articleView.html?idxno=24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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