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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펌]울다가 울다가… 딸 따라간 아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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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잇힝언니
추천 : 10
조회수 : 456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04/10/20 13:24:45
울다가 울다가… 딸 따라간 아빠들
성수대교 붕괴 10년 '사회적 살인' 그 상처

[조선일보 김봉기, 장상진 기자]
“사랑하는 아빠 보세요. 아빠, 저는 요즘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아빠가 저를 때리셨을 때 제 마음보다 100배, 1000배나 더 마음 아프실 아빠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빠! 저를 때리신 것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제 속에 있던 나쁜 것들을 때려서 물리치신 거라 생각하세요. …아빠, 저를 위해 한번 더 마음을 풀어주시지 않겠어요?”
1994년 10월 21일. 가장(家長) 이식천(당시 46세)씨는 하늘나라에서 보낸 딸의 편지를 받았다. 딸 연수(당시 16세·무학여고2)가 아침 등교 도중 성수대교와 함께 추락한 16번 시내버스 안에서 숨을 거뒀다는 비보(悲報)를 들은 지 몇 시간 뒤. 빗물과 강물에 젖은 채 돌아온 가방 안에는 소소한 잘못으로 아빠에게 매를 맞고 눈물로 쓴 편지가 고이 접혀 있었다. 딸을 잃은 후 자책할 아빠를 안쓰러워하듯이, 편지는 “아빠도 파이팅! 이에요?! 94년 10월 20일 아빠를 사랑하는 연수가 드려요”로 끝을 맺었다. 이날 아빠는 딸아이 가방을 가슴에 품고 엉엉 울었다. 그후 10년….
수소문해 찾아간 아파트에는 연수 가족은 없었다. 이웃들은 사고 이듬해인 95년 서둘러 이사를 했다고 전했다.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아파트 창문에서는 새로 단장한 왕복 8차로의 화려한 성수대교가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때는 허리가 잘린, 그리고 딸을 삼킨 흉물스런 다리였을 것이다.


불과 몇 백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사한 집은 한강이 보이지 않는 아파트였다. 어머니(52)는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성수대교 사고 직후 굴지의 대기업 이사로 스카우트될 만큼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했지만 2년 후 힘없이 숨을 거뒀다고 했다. 착한 딸 연수의 ‘파이팅’ 당부를 들어주지 못한 회한을 남기고. “(연수 아빠는) 아침에 일어나면 멍하니 눈물을 흘리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울고, 회사에서도 남 몰래 울었어요. 밥을 먹다가도 통곡을 하고, 잠이 안 와서 뒤척이는가 보다 하고 바라보면 훌쩍훌쩍 울고 있고…. 그렇게 2년을 살다 중병에 걸려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는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묘지 딸 연수의 묘지 인근에 안장됐다.








▲ 아빠에게 편지 남긴 이연수양 무학여고 교정에서 찍은 사고 전 이연수양의 사진. ‘14가지 소원’을 남기고 간 승영씨와 함께 연수양은 성수대교 상판 위에 떨어진 16번 시내버스 속에서숨을 거뒀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사망한 희생자는 32명. 이 가운데 9명이 시내버스로 등교하던 10대 중반 무학여중고(서울 성동구 행당동) 학생들이었다. 세상은 망각을 통해 아픔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가족을 가슴에 묻은 유족들의 상처는 시간이 갈수록 곪아들어갔고,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연수양과 함께 16번 시내버스 속에서 숨을 거둔 장세미(당시18세·무학여고3)양. 무학여고는 사고 이듬해인 95년 2월 세미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취업반’에 들어간 세미였다. 졸업식날 딸 대신 명예졸업장을 받은 아버지 장영남(성수대교 사고 당시 49세)씨는 “나중에 야간대학에 들어가 교사의 꿈을 이루겠다고 했는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4년 후인 99년 8월 18일. 성수대교 북단에 세워진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등졌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본 희생자 위령비에는 딸 ‘장세미’ 이름이 20여㎝ 크기로 새겨져 있었다. 그는 유서도, 가족에게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가족들은 어떻게든 세상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세미양 오빠(34)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누구나 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것이고 세미는 좋은 곳에 갔을 것이다. …낙담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 근황을 묻자 “어머니의 평정심을 건드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기자도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평정심’은 삶을 지탱하는 팽팽한 끈과 같으니까. 아버지 시신은 세미가 그랬듯 화장(火葬)됐지만 뿌려진 자리는 달랐다. 오빠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목수였던 강용남(당시 52세)씨. 경기도에서 서울 강북으로 출근하던 중 성수대교 붕괴로 목숨을 잃었다. 부인(62)은 지난 82년 장만한 15평짜리 아파트를 지키고 있었다. 사고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딸은 이제 대학 4학년생이다. 부인은 “사고 후 6~7년간 딸아이와 남편 이야기를 한번도 안 했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남편과 함께 자던 안방에서 잠 잔 적이 없고, 전철을 타고 한강다리를 건널 때 성수대교가 안 보이도록 고개를 돌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탁자 위에 남편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상하게도 딸 아이가 장성한 최근 사진이었다. “아, 이거요? 작년에 찍은 우리 모녀 사진에다 딸이 아버지 생전 사진을 합성(合成)해서 만든 것이지요.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아빠가 그리웠나 봅니다….”
(김봉기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knight.chosun.com])
(장상진기자 [블로그 바로가기 jhin.chosun.com])








▲ 새벽 거리를 청소하다 거리에 주저앉은 고(故) 황선정양의 아버지. 그는 10년 전 사고가 남긴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이덕훈 기자 (블러그)leedh.chosun.com






"그놈의 8학군 때문에..." 자책의 눈물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숨진 황선정(당시 16세·무학여고1)양은 가족이 강남구 일원동 근로자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성수대교를 건너 통학했었다. 환경미화원인 아버지(50)는 기자와 만나 “‘8학군’ 욕심에 이사를 갔다가 그렇게 됐어. 부모 잘못 만나서…”라며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10년이 지나도 부모는 당시의 작은 기억까지 모두 상처로 품고 있었다.

“죽는 순간 얼마나 억울했을까. 버스 떨어지는 순간…. 우리 아이가 맨 나중에 발견됐어.(선정양은 사고 당시 16번 시내버스에서 다른 무학여고 학생들과 함께 사망) 너무 억울해. 내 목이 터지는 거 같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아. 그날(사건 당일) 비가 왔어. 선정이가 그때 자기 우산을 가져가지 않고 다른 가족 우산을 가져갔어. 지금도 아내가 그래. ‘그때 아이를 붙잡고 우산을 바꿔줬어도, 단 1초만 지연시켰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울음) 1초만 빨랐으면, 1초만 늦었으면, 그놈의 시간이 왜 그렇게 원망스럽냐.”

그는 다시 자책했다. “내가 그때 그놈의 강남 근로자아파트 딱지만 받지 않았어도(울음). 난 비록 청소부지만, 똑똑한 내 딸을 위해 8학군이네 뭐네로 이사갔어. 근데 이사간 기간이 짧아 배정을 못 받고 성수대교 건너가게 된 건데….”(정부는 성수대교 사건 이후 강남북 거주 학생의 ‘교차 배정’을 중단했다.) 선정이 아버지는 자신이 “위암 초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죽어도 상관없어 병원 안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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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먹고 와서 암 생각없이 보는데 눈물이 흐르네여..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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