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소재인 화 성살인 사건의 현실세계 주인공은 경기경찰청 하승균(57·경정) 강력계장이다. 그는 여성피살자의 참혹하게 훼손된 시신과 피냄 새, 울부짖는듯한 눈망울을 지금도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는 사건 당시 현장 팀장이었다.
지난 5월 29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연무동 경기지방경찰청 한쪽 에서 하 계장과 문화일보 사회2부 김형운(45) 기자가 두꺼운 신 문스크랩과 사건기록을 놓고 얼굴을 마주했다. 국내 언론과 영화 관계자 등의 빗발치는 인터뷰 요청을 완강히 거절해온 그가 김 기자에게 천근같은 입을 처음 여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 87년 당시 온 나라를 들끓게 했던 ‘화성 연쇄살 인’ 6차 사건 현장에서 마흔살의 일선 경찰서 형사계장(경위)과 스물 여덟살의 수습기자로 인연을 맺은 사이. 그는 영화 ‘살인 의 추억’을 남몰래 혼자 자동차극장에서 보며 내내 울었다고 했 다. 얼굴도 모르는 범인에게 아직도 편지를 쓴다고도 했다. “? ?반드시 내손에 잡힌다”고.^ 김 기자도 이젠 나하고 같이 늙어가네. 이 사람아 내 걱정말고 자네 흰머리나 걱정해. 난 아직도 뽀얗고 풋풋하던 자네의 수습 기자시절 모습이 눈에 선한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 그땐 ‘보이 면 얄밉고 안보이면 궁금한’ 그런 사이 아니었나. 그러면서 고 운정 미운정이 다 든거지.
참 근데 자네 예나 지금이나 질겨. 후배하고 번갈아 가며 떼를 쓰니 이젠 더이상 인터뷰 안한다는 소리 하기가 미안해 이렇게 나왔어.
근데 김 기자. 형사는 말이야 범인 못잡으면 할말이 없는거야. 1 0명의 여성이 무참하게 살해됐고 그 가족들은 지금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내 부하들이 구속되고 뇌출혈로 쓰러져 불구가 됐어. 그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도 결국 난 범인을 잡지 못했잖아. 근데 무슨 할말이 있겠어. 난 죄인이야.
영화 봤냐구. 처음엔 안볼 작정이었지. 살인의 추억, 추억이 뭐 야. 추억이라는 말이 맘에 안들었어. 근데 자꾸 영화 얘기들을 하니까 궁금해서 봤지. 범인도 못잡은 놈이 일반 극장에 가자니 남들 이목도 있고 해서 혼자 조용히 자동차 극장엘 갔지.
어땠냐구. 내내 차안에서 울었어. 물론 영화 대부분은 사실과 다 르게 각색 됐지만 자꾸 그때가 생각나 눈물이 멈추질 않는거야. 참 내.
수사는 말야. 특히 화성 사건같은 건 미치지 않고서는 못하는 거 야. 김 기자도 그때 우릴 봤잖아. 그게 어디 사람 몰골이야. 몇 달씩 집에도 못가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다니는 거야. 밥을 먹어 도 화장실엘 가도 길을 걷다가도 그 생각만 하는 거야. 그래 오 냐 넌 내가 잡는다. 반드시 잡는다.
내가 수사를 한 건 10개 사건중 7건이야. 1, 2차 사건이 발생한 뒤인 86년 12월 그러니까 수원경찰서 형사계장을 하고 있을 때 6 개 수사팀중 하나를 맡아 투입됐지. 그후에 경기경찰국 강력주임 이 돼서도 9차 사건까지 맡았으니 4년이 넘도록 화성에 매달렸네 . 7건중 4건은 내가 직접 시신을 수습했고.
처음엔 금방 잡을줄 알았지. 범인 잡을 때까지 집에 안간다고 아 예 동네에 방을 하나 얻었으니까. 그런데 환장하겠는게 영화에선 ‘삘(feel)’이라고 하던데, 물론 과학수사가 가장 중요하지만 형사한테는 육감이 있거든. 그 ‘삘’이 안오는 거야. 수사본부 에는 매일같이 용의자들이 불려오는데 증거로 보나 내 육감으로 보나 진짜 범인은 하나도 없었어.
이러다간 안되겠다 싶어서 동네마다 다니며 농사일도 거들고 못 마시는 술도 한잔씩 나누면서 주민 한사람 한사람으로부터 정보 가 될만한 얘기는 모두 듣고 기록했어. 속이 타니까 담배도 배우 고. 레슬링선수로 크리스찬으로 술, 담배는 입에도 못댔는데.
그런데도 일이 안풀려. 참 답답한 노릇이지. 그러고 있는데 88년 초에 수원경찰서 내 부하들이 수원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화성 과 관련지어 무리하게 조사하다 용의자가 숨졌어. 담당 형사 3명 은 구속되고 나도 직위해제가 됐지. 참 난감하데.
3개월을 노니까 윗분들이 ‘저놈을 놀려선 안된다’고 하시면서 경기경찰국 강력주임으로 발령을 내주데. 곧바로 다시 화성으로 돌아갔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그해 가을엔 내가 가장 아끼던 부하가 뇌출혈로 쓰러진거야. 과로였지. 그 사람 아직도 불구로 있는데 난 평생 죄인이지 뭐.
그렇지만 그렇게 주저 앉을 순 없잖아. 이 자식, 이대로 질 내가 아니다. 대학노트에 작성한 수사 일지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 범인, 난 너를 알고 있다. 넌 반드시 내손에 잡힌다….
난 한 사람의 범인이 10개 사건을 모두 저질렀다고 보지는 않아. 그중엔 수법상 다른 점들이 있었으니까 2~3명이 될수도 있지. 그렇지만 몇명이냐를 떠나서 난 범인과 대화를 하려고 해. 지금 도 혼자 운전을 할 때, 특히 화성지역을 지날 땐 반드시 그놈에 게 얘길 하지. 그래 난 널 알고 있다. 넌 내손에 잡힌다….
김 기자. ‘어찌보면 지난 일…’ 아니냐구 물었지. 형사에겐 말 야 딱 두 가지 경우만 존재하지. 잡았느냐 못잡았느냐. 형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잡으면 잘한거고 못잡으면 못한거야. 그럼 못잡았으면 어떻게 해야겠어. 잡아야지.
난 잡아야 해. 그런데 어떻게 그게 내게 지난일이 되겠어. 난 지 금도 성폭행 범죄가 나면 그놈부터 생각해. 그리곤 유심히 보지. 혹시….
김 기자. 난 형사야. 그렇기 때문에 잡는 것만 생각해. 범인은 분명히 살아서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어. 난 반드시 그놈을 잡 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