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원래 들꽃이 피는 아주 청결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쾌적한 도로 옆 길가였다. 가끔 침을 뱉고 가는 이들은 있었지만 물을 뿌려주는 이도 있었다. 쭈그려 앉아 들꽃을 바라보다 가는 여자아이도 있었고 주변을 배회하는 고양이들에게 사료캔을 주는 남자도 있었다. 고양이가 사료캔을 비우면 그는 늘 그것을 다시 수거해 갔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남은 종이컵을 그곳에 버리고 갔다. 그러자 누군가는 핫도그를 먹고 남은 꼬챙이를 버리고 갔고 또 누군가는 코 푼 휴지를 던지고 가기도 했다. 콧물을 머금은 휴지뭉치는 들꽃 위에 안착했다. 어느 정도 쓰레기가 쌓이자 몇몇 남자아이들은 그곳에 찌그러진 콜라캔을 명중시키는 놀이도 했다. 아이들은 쓰레기들에 깔린 들꽃 앞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들꽃도 무어라 소리를 냈지만 차들의 소음에 묻혔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 담뱃불을 밟았다. 납작해진 담배는 한숨처럼 꺼져갔다.
#2
낯선 이들의 부름에 잠에서 깼다. 커튼새 비치는 햇살이 사람들의 눈빛처럼 따가웠다. 핸드폰을 켜보니 수천 개의 sns 알람이 실시간으로 물밀듯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얼마 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후로 나를 찾는 사람들이 배로 많아졌다. 내가 1위를 달성한 비결은 브래지어를 입지 않고 찍은 사진을 내 sns에 게시한 것이다. 그저 편안함을 추구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런 나를 매우 불편해했다. 아니, 불쾌하고 더럽다며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다. 지금도 그들의 손가락은 부러지거나 잘리지 않고 성실하게 나를 위해 일하고 있다. 나는 문득 열이 솟구쳐올라 내 sns 계정에 접속해 악성 댓글 몇십 개에 일일이 대응을 하다가 그만 진이 빠져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하지만 거의 곧바로 휴대전화가 울렸다. 매니저가 집앞까지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가장 괴로운 것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순간부터 입꼬리를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인형처럼 꾸며진 거울 속 나를 보고 사람들이 연신 칭찬세례를 쏟아부었다. 나는 탐스러운 과일, 인형, 도자기, 귀여운 동물 등에 비유되었다. 그들은 내 속눈썹 하나하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연약한 손톱까지 섬세하게 매만지며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다뤄주었다. 같은 시각 sns에선 사람들이 나를 더러운 걸레나 회생 불가능한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런 나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이제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1
다음날이 되자 길가는 거의 쓰레기장이 되어있었다. 그곳에 들꽃이 피어 있었다는 걸 아는 건 여자아이 한 명과 고양이 두 마리 그리고 cctv 한 대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쓰레기들을 주워 담고분리수거를 해서 들꽃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줄 능력이 없었다. 아이는 꽃밭이 사라졌다며 울상을 지었고 고양이들은 그저 배가 고파 쓰레기 더미를 파헤칠 뿐이었으나 그들이 먹을만한 건 끝내 나오지 않았다. cctv는 눈만 몇 번 껌뻑일 뿐이었다. 곧 사료캔을 든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고양이들이 사료를 먹는 동안 쓰레기더미를 잠시 바라보다가 부피가 큰 박스 몇 개를 빈 사료캔과 함께 가지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쓰레기는 여전히 쌓여갔다. 씹던 껌, 샌드위치 포장지, 아기 기저귀, 꺼진 담배 같은 것들이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다 먹은 컵라면 용기를 뒤집어 아기 기저귀 위에 모자처럼 씌워놓고는 낄낄거리며 자리를 떴다. 들꽃의 향기는 쓰레기 냄새에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2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봤는데 내가 사람이었다. 맞다.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은 걸까'라는 생각이 0.7초쯤 머릿속에 있다가 증발해 버렸다. 의문을 갖는 것도 지겨워져 되도록이면 머릿속은 깨끗하게 비워두는 시스템을 가동 중이기 때문이다. 그냥 두었다간 자칫 내 sns의 댓글창처럼 머릿속이 쓰레기장이 되어버린다. 머릿속은 댓글창보다도 관리하기가 까다롭기에 더욱 신경을 써주고 있다.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는 순간에도 내 sns에는 댓글들이 적히고 있었다. 내가 물을 한 컵 마시는 동안 나를 성적으로 희롱하는 댓글이 6개가 적혔고 아침식사를 하고 햇살을 받으며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나의 죽음을 소망하는 댓글 20개가 더 추가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재미있어하거나 안타까워하거나 동조하거나 분노하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으나 사실 대부분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들만큼 빠른 속도로 댓글들이 달리는 것을 거실 한가운데 가만히 서서 무심히 지켜보는 나만, 그것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었다. 이런, 머릿속 청정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면 이런 일에 생각이 많아질리가 없기 때문이다. 좀 더 당당하고 단단해질 필요가 있었다.
댓글창을 닫고 문을 열어 호기롭게 밖을 나섰다. 사람들은 평화로워 보였다. 핫도그를 먹으며 길을 걷거나 봄햇살 아래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기르는 개가 길가에 싼 똥을 치우고 있었다. 대부분은 자신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표정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무심한. 이 와중에도 내 sns엔 수천 개의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고 있었다.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두고 함께 싸우고 헐뜯고 희롱하고 있었다. 그들도 때로 길에서 핫도그를 먹고 봄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겠지. 문득 메스꺼움을 느껴 잠시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사람들 몇몇이 나를 알아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누군가 뒤를 따라붙는 느낌이 들어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의 모든 cctv와 사람들의 눈동자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아 숨통이 조여왔다.
#1
인간들은 이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에 쓰레기를 투척했다. 무엇을 담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색 봉지들이 늘어났고 악취는 쓰레기더미 주위를 포위했다. 남자아이들은 코를 쥐어막고 쓰레기장 옆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한 아이가 뛰다 말고 되돌아와 주머니에서 바스락거리던 초콜릿 껍질을 던져버리고 후련한 표정으로 다시 아이들을 따라갔다. 여자아이는 들꽃을 걱정했으나 소생시킬 방법을 몰랐다. 근처 편의점 점장이 인상을 쓴 채 쓰레기더미에 다가와 사진을 찍고 사라졌다. 사진 속엔 고양이 두 마리도 함께 찍혔다. cctv는 여전히 눈만 몇 번 껌뻑일 뿐이었다. 사료캔을 든 남자는 쓰레기더미를 약 2초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사료캔만 착실하게 수거해 갔다.
이곳은 쓰레기를 버리는 곳이라고 아무도 그렇게 정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다. 쓰레기를 쓰레기장에 버리는 일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는 간단하고 무심하고 조금은 유쾌한 일이었다.
#2
나를 향한 루머들이 진실의 가면을 쓰고 일파만파 퍼져갔다. 아니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사람들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끊임없이 나를 관찰하고 입에서 더운 숨을 내뱉으며 들리는 목소리로 수군댈 뿐이었다. 이제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일이 없으면 집 밖에 잘 나서지 못했다. 24시간 cctv로 감시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방에만 처박혀 있어도 벽지를 빈틈없이 채우도록 수만 개의 눈알들이 달라붙어 온종일 데굴데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심지어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언제나 도마 위에 올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도마 위의 나를 잘게 토막 내어 가공식품으로 만든 뒤 요란한 포장지에 감싸 끊임없이 제공했고 사람들은 마치 간식을 먹듯 무심하게 나를 잘근잘근 씹어먹었다.
그럼에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몸속에 침투한 세균과 싸우는 백혈구처럼 지친 나를 대신해 그들과 싸워주기도 했지만 루머라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속도를 따라잡진 못했다. 이제 그들에게 진실 같은 건 그리 중요한 게 아닌 듯 보였다. 내가 오늘은 셔츠 속에 속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내 뱃속에 들어있는 게 아기인지 피자인지, 내가 만나는 남자가 변태인지 괴물인지, 모두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저 흥미롭다는 것만이 진실이라면 그걸로 충분한 듯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틀어박혀 숨을 쉬는 것 밖에 없었다. 짧은 들숨을 마시고 긴 한숨을 내뱉을 때마다 내 안이 계속해서 비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브래지어를 입지 않아도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밤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 벽지에 박힌 눈알들을 마주 보고 있는데 친구들이 피자와 맥주를 사들고 집에 찾아왔다. 집안의 불을 모두 켜니 눈알들이 눈을 감았고 그다음 사라졌다. 나는 냉장고에서 반쯤 먹다 남은 양주를 꺼내 맥주에 섞어 함께 들이켰다. 친구들과 피자와 술은 나를 즐겁게 했다. 웃게 했고 잠시 잊게 했다. 친구들은 모두가 나를 비웃어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나는 과즙을 터뜨리듯 웃어 보였다. 집에 있던 모든 술을 다 비운 후 우리는 함께 소파에서 혼절하듯 잠들었다. 꿈속에 입장하니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식탁에 놓여있었다. 과도로 반을 갈랐더니 속에서 온갖 벌레들이 우글우글 튀어나왔다. 벌레들은 내 몸에 기어올라와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내가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나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나 화장실 변기에 속을 모두 게워냈다. 친구들도, 피자도, 술도, 결국 그 무엇도 나를 채워주지 못했다. 몸을 일으켜 거울을 보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이었다. 행복한 척 입을 찢어 웃어보았으나 어딘지 불안하고 어색해 보였다. 이번엔 울어보려 했다. 하지만 꽉 막힌 하수구처럼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동공이 떨어뜨린 구슬처럼 흔들렸다. 나는 내 안의 시스템들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손쓸 수 없이.
#1
민원이 제기되어 쓰레기더미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지만 악취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제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사람은 줄었지만 들꽃은 살아나지 않았고 여자아이는 들꽃을 잊었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거리를 배회했고 사료캔을 든 남자는 빈 사료캔을 착실히 수거해 갔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쓰레기장의 위치가 바뀌어갔을 뿐이었다.
#2
소속사에서 유독 끈질긴 사람들 몇 명을 고소했고 승소했지만 그것은 나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스텝들은 여전히 나를 정성스레 꾸며주며 찬양했고 카메라 렌즈들은 언제나 뚫어져라 나를 바라봤고 대중들은 나를 희롱하거나 외면했고 기자들은 내 몸뚱이가 어떤 행동이라도 취하길, 내 입술이 무슨 말이라도 뱉어내길 바랐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서 원하는 부위만 골라내 토막 내고 양념을 치고 포장해서 대중에게 내놓기 위해 화면 너머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고 있었고, 사람들은 삼킨 나를 되새김질하며 더 자극적인 맛이 나는 내가 출시되길 눈을 반짝이며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망가져 한껏 우스꽝스러워진 나를 보란 듯이 내보이거나 며칠 동안 집 밖에서 나가지 않았다. 친구들과 음식과 술은 소화되지 못하고 자꾸 게워져 나왔다.
나는 나를 잃어갔다. 좋아하는 음식, 색깔, 취미, 취향이 무엇이었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그렇다고 특별히 싫은 것도 없었다. 그저 숨을 쉬는 모든 순간이 불편하고 답답할 뿐이었다. 잠을 자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편안한 시간이었지만 요즘 들어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에 그마저도 내게 휴식이 아니게 되었다. 내 안의 청정 시스템은 완전히 망가졌고 나는 나의 사고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미지의 어둠 속으로 걸어가려는 나를 막을 의지가 사라졌다. 자꾸 비어가는 가는 나를 다시 무언가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조차 더 이상 들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편안하고 싶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1
들꽃이 시들어 썩어갔던 자리에 새로운 들꽃이 피어났다. 그들은 종이 같아 인간들은 둘의 차이를 딱히 구별하지 않았다. 아리라는 이름의 개가 들꽃에 다리를 들어 오줌을 쌌다. 개는 떠났고 들꽃은 그 자리에 남았다. 인간들은 여전히 길가에 침을 뱉었고 쓰레기를 버렸고 누군가는 그것을 치우기를 반복했지만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들꽃의 안위를 걱정하는 인간은 이후로도 거의 없었다. 구름만이 햇빛과 비를 번갈아 내리며 꽃을 지켰고 인간들은 그저 잠시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고 무심히 꺾거나 무심히 떠나갈 뿐이었다.
#2
나는 어릴 때처럼 계속해서 사랑만 받고 싶었다. 그저 다른 이들처럼 평범한 사람이고 싶었다. 헛된 꿈을 꾸었나 보다. 어느 때보다 깊은 잠을 청했다. 더 이상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