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완벽한 미소
“뭐라구요? 저의 지우고 싶은 기억을 삭제해 준다고요?”
남우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조금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서 의문의 남자가 마술적 효과처럼 나타났기 때문이다.
오래된 극장의 커튼처럼 낡고 무거운 코트, 그 자락에서 어쩐지 먼지 대신 무언가 소중한 것들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먼지 낀 골동품 가게에서 방금 나온 사람마냥 고풍스럽고 낯선 분위기를 풍겼다. 남우의 가장 깊은 감정을 꿰뚫는 것만 같은 느낌. 이 날을 오래 기다려왔다는 듯이 침착한 자신감의 음성이 들려왔다.
“삭제란 말이 다소 차갑게 들리셨군요.”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가져가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원치 않는 것들만.”
남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가져간다구요? 뭐를... 어떻게요?”
“기억입니다. 어차피 기억도 잘 안나거나 몇 년이나 흐른 뒤 겨우 생각날 만큼 하찮고 사소한.. 아!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지우고 싶은 기억이지요. 그런건 너무 오래 지니고 있으면, 인간은 그 무게에 마침내 부서진답니다. 저는 그 무게를 대신 들어주는 거죠.”
그 말에 남우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엄청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대부분은 행복한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흐릿하고, 잊고 싶은 장면은 선명했다.
“후우~ 생각보다 좋은 기억은 없네요.”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것만 삭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분명 그것만으로도 행복감이 풍족해지실 겁니다.”
“그렇게도 되나요? 대신 어떤 대가가 있죠?”
좋은 조건이라 의구심이 든 남우를 향해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가는 없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만 있을 뿐. 당신은 앞으로 행복해 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지우라는 것도 아닙니다. 지우고 싶은게 있을 때, 이 명함을 보며 절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남우는 그날 밤, 자신에게 일어난 신비한 일로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늘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 일.
열 살 때, 어떠한 설명도없이 자신을 버리고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졌던 그 일이었다.
한순간에 사라진 존재.
한파가 유독 심했던 그해 겨울, 그는 장판 위에 웅크리고 앉아 엄마의 슬리퍼를 계속 만지작거릴뿐이었다.
“씨x! 그때부터 내 인생이 꼬였을 거야...”
그 기억은 오랫동안 그의 삶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는 그걸 지우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다음 날, 남우는 긴 호흡 끝에 명함을 만지작 거리며 다시 그 남자를 찾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남자가 그를 다시 찾아왔다.
“지우겠습니다.”
남우는 말했다.
“어머니가 떠났던 날의 기억. 더는 안고 살고 싶지 않아요.”
“좋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눈을 감고, 천천히 그날을 떠올리세요. 마지막으로.”
남우는 눈을 감았다.
장판 위의 냉기, 낡은 주전자에서 끓던 물소리,
그리고 방문 틈 사이로 스며들던 외풍.
그 모든 것이 천천히, 무게 없이, 그를 떠났다.
눈을 떴을 때, 그는 마치 오래 앓고 난 뒤처럼 가벼워졌다.
가슴이 텅 빈 듯한 가벼움.
그리고 동시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듯한 기분.
그날 밤, 남우는 오랜만에 푹 잠들었다.
어머니가 왜 떠났는지, 언제였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겨울에 혼자였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막연한 감정만이 남아있었다.
뭔지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편안한 밤이었다.
다음 주, 그는 다시 남자를 찾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첫 번째가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중학교 1학년 때 부터의 일입니다. 어떤일이 있었는데... 괴롭힘이 좀...”
남우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내 뭔가 생각난 듯 팔뚝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 기억 역시, 가져가겠습니다.”
남우는 눈을 감았다.
교실의 냄새, 복도 끝의 창문, 뒷담화처럼 퍼지던 속삭임들.
두려워하던 몇 몇의 얼굴들, 비웃음, 폭행, 무력감.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기억을 하나씩 넘길 때마다 남우는 점점 더 밝아졌다.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그때마다 뭔지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부쩍이나 주변 사람들이 비슷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얼굴이 좋아졌어요.”
“예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세요.”
“좋은 일 있는거야? 로또라도 된거아냐? 하하하”
남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작 무엇이 바뀌었는지 설명할 순 없었다.
감정이 사라지고, 설명이 사라지고, 무뎌지고 있었지만
분명 ‘좋다’는 감각만이 남아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진심으로 ‘행복’이라 믿었다.
‘그래. 사람들이 다 갖고있는 행복. 이게 바로 그거야.’
그 후로도 남우는 그를 여러 번 불렀다.
지우고 싶은 기억은 끝이 없었고, 지워질수록 마음은 가벼워졌다.
감정은 점점 옅어졌지만, 그가 생각하는 행복감은 짙어졌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남우는 친구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서로의 추억을 나누던 중이었다.
“야, 너 기억나? 우리 그때 졸업여행 가서~”
“아, 그 사건! 남우가 제일 흥분해서~”
모두가 웃었지만, 남우는 웃지 못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장면조차도.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아니었는지도 불확실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그날 밤, 그는 혼잣말을 했다.
“왜 이리 허전하지...”
그 다음 날, 누군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습관처럼 명함을 자꾸 쓸어내렸다.
“오랜만이군요. 오늘은 어떤 기억입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
“에? 누구...세요?”
남우는 물었고, 남자는 웃었다.
“저는 억령(憶靈)입니다. 기억을 먹고 자라는 존재. 잊힌 것들의 그늘
근데 사람들은 흔히 저를 악귀라고도 부르지요.
하지만 저는 그저... 원한과 괴로움, 죄책감, 후회 같은 것들을 먹으며 살아갈 뿐이에요.”
“악귀라면 사람들의 질투나 욕심, 분노등을 먹고 그런사람들에게 빙의나 하는 그런 존재 아닌가요? 근데 왜… 왜 저에게…”
“당신이 저를 불렀으니까요.
지우고 싶다고 말한 순간, 문이 열렸죠.
이제보니 저마저 잊을정도가 되었군요.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그런 저급한 악귀들이랑 비교하진 말아주세요. 하하하”
억령(憶靈)은 기괴한 웃음을 띄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감정이었다.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지만,
그 감정이 슬픔인지, 분노인지, 혹은 막연한 불안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제 삶에 뭔가 빠진 느낌입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나요?”
억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불행하십니까?”
“아니요. 좋은 일들뿐이예요.”
“그럼 뭐가 문제지요? 지금 이렇게나 멋진 미소를 짓고계시는데”
남우는 분명 미소짓고있었다.
“뭔지 모르겠어요. 분명 행복감에 절로 미소는 지어지는데...그게...웃고는 있는데, 왜인지... 어딘가 허전한데, 분명 허전한데.. 그게 어떤 감정인지조차 모르는 느낌이에요. 감정이 미소를 따라오질 않아요.”
억령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기억은 흔히 사람을 구성하는 뼈대같은 겁니다.
그걸 잃으니 점점 비워질뿐.
기억 없는 인간은 허상일 뿐이지요. 하지만 괜찮을 겁니다. 허상은 항상 진실보다 덜 아프니까요.”
“하지만... 나에겐 행복한 기억이 남아있는데... 나 분명 행복한데...”
“행복이란 건 고통과 함께 있을 때만 의미가 있죠.
당신은 이제 그 차이를 느낄 수 없어요.
당신의 표정은 이제 뭐랄까... 아니요. 됐습니다. 딱 좋아요.”
순간, 남우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남우는 웃고 있었고,
진짜 남우는 그 웃음을 흉내 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거울 속 남우가 말했다.
“이제 괜찮아. 그동안 수고 많았어. 이제 넌 쉴 준비가 된거야.
보이지? 나의 미소가... 곧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어.”
다음날 아침.
남우는 평소처럼 양복을 입고, 커피를 마시고, 출근했다.
동료들은 반갑게 인사했고, 그는 웃으며 화답했다.
말끔하고 침착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를 이루던 기억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그는 웃었다.
고요하게...
남우는 다시 웃었다.
그것이 진짜 남우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미소는... 정말 완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