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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원(圓)
언제부터인가 눈앞에서 작은 점 하나가 꿈틀거렸다.
최무정은 익숙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또 시작이군.”
비문증. 병원에 가보니 흔히 나이가 들어 눈이 퇴화하면서 보이는 날파리같고, 지저분한 점들이다.
근데 이게 다가 아니다. 최무정에게 보이는 것은 분명 화살표였다. 누가봐도 정교하게 만들어졌을 형태의 도형이다.
“오늘은 또 뭐야.”
지저분한 모텔방 한구석에서 야한영화를 보던 최무정은 귀찮지만 어쩔수없다는 듯 바지를 급하게 끌어올리고 화살표 방향으로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걷던 최무정은 오토바이로 소매치기를 당하는 여자를 발견한다.
오토바이는 어느새 그의 눈앞까지 다가온다.
“어이쿠!”
최무정의 단련된 몸과 반사능력이라면 순간적으로 발차기를 하여 오토바이를 멈출 수 있었지만 그럴 의리따위는 없다. 잠시 도와줄까 우물쭈물했지만, 가뿐히 몸을 피했다.
‘오늘은 싱거운데? 이거였나?’
생각을 마칠 무렵
소매치기 일당을 쫓던 여인이 미친 듯이 자신의 쪽으로 뛰어왔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화살표가 엄청나게 빠르고 긴박하게 왼쪽을 가리켰다.
뭔진 몰라도 본능적으로 이거다 싶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왼쪽으로 틀며 움크리고, 머리를 감싼 채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차량이 끼익, 그리고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감싸앉은 최무정의 눈앞에는 등 뒤로부터 아까 그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피묻은 구두가 날라왔다.
‘휴우 살았네.’
피해간 건 세 번째였다. 아니, 네 번째였을지도.
화살표는 몇 년에 한 번씩 나타났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는 행운.
세 번째부터는 신의 뜻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다 그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심지어 기대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랬다.
늘 화살표가 움직일 때 자신이 죽을뻔한 상황에서 목숨을 건질수있었다.
“하하하...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나 보지. 이런 하류 인생한테도 이런 게 오다니, 웃긴 세상이군. x발! 로또번호나 보여주지.”
혼잣말을 가볍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몇 년은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안심이 조금은 되었다. 그는 길가에 침을 뱉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 젠장맞을 동아줄 같은 것. 내 목에 감기기 전까진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해. 난 끝까지 살아 남겠어. 빌어먹을 하늘새끼야.’
모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공사장 앞을 지나고 있었다.
눈앞의 화살은 이번엔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좌우로 급격하게 변하더니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뭐야?’
이젠 자성을 잃은 나침반처럼 미친 듯이 돌기 시작했다.
최무정은 혼란스러웠다. 재빨리 주변의 차량을 확인했고 뾰족하거나 위험해보이는 것들을 둘러보았다.
‘하루에 두 번이라고? 미친...’
그때였다.
화살표는 커다란 원이 되어 그의 한쪽 눈을 완전히 삼켰다.
한쪽 눈이 거의 안보이자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뭐야..이건 어디로 피해야해?’
건너편 소년 하나가 떨리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낯익은 인상.
피부색, 이마선, 저 나이때 볼 수 없는 건장한 체격까지.
“너...”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십여 년 전, 가지고 놀다 버린 여자.
원하지 않았던 임신.
지워버리라 했던 그 날, 매몰차게 버렸던 그녀.
울며 매달렸던 그녀의 모습과 최무정의 젊은 날의 얼굴이, 마치 미농지처럼 겹쳐 보였다.
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채 위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원이었구나. x발!!!”
무언가 깨달은 최무정이 위를 쳐다보자마자
쿵.
철제 구조물은 최무정 사이의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빠직하는 짧은 소리와 이내 고요함만이 남았다.
고통이 닿는 시점에도, 시야는 서서히 희미해질 때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새겨넣고싶었다.
소년은 다가오지 않았다. 와서 날 살릴 수도 있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눈앞에서 몇 번 망설이더니,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무정은 깨달았다.
그 아이도 자신을 닮았다.
어쩌면 앞으로 무정하고 비열할지도. 지금처럼 겁 많고, 우물쭈물하다 모든 걸 놓쳐버리는.
뼈가 으스러지고 피가 터지는 와중에도,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했다.
지금껏 수없이 살기 위해 움직였지만,
처음으로 죽는 게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그 아이가 자신처럼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정도...
마침내 눈 앞의 원은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