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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우물, 97년
게시물ID : panic_1035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21세기인간
추천 : 0
조회수 : 61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5/04/14 21: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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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97년 겨울


성가신 알람 소리


"아잇 진짜..."


찌뿌둥한 표정


"빨리 일어나세요 오늘 스케줄 많잖아요"


지겨운 매니저 목소리.


"톱 탤런트 노릇도 못 해먹겠네, 뭐"


투덜투덜, 잔뜩 뻗은 머리, 그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목에서 알코올이 맴돈다 분주한 부엌, 아내가 부르는 소리, 너저분한 식탁


"이게 뭐야, 죄다 채소밖에 없어?"


아내는 말이 없다.


"...학교는 잘 다니고?"


아들은 말이 없다


"...신문이나 봐야지."


그릇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 윗집 물 샌다고 공사하는 소리, 지저분한 아침 벌써부터 몰려오는 피로. 한숨, 길게 내쉬는


"일하러 갔다 올게."


대답이 없다. 아내는 말이 없다. 아들도 말이 없다, 그저 공사장 소리, 웅 하는 소리, 삐걱대는 현관문


"첫번째는 간편식 광고에요."


매니저는 말이 많다 늘 그렇다.


"커리어우먼이 늘면서 간편식 수요가 늘 거라고 보는 모양이에요."


"남자도 일 못하는 마당에 무슨..."


"아이 참, 비아냥거리지 좀 마세요, 되게 중요한 광고에요."


그녀는 나긋나긋하게 말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 이제 찍겠습니다."


메이크업 머리 손질. 아무도 술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분명 술냄새가 날 것이다 본인조차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술냄새가 브라운관 티비를 뚫진 못한다. 그러니 문제될 게 없다 이 업계는 그런 식이다.


"이야, 이거 지인ㅡ짜 맛있잖아!"


다음 차례는 상대 여배우. 약간 번져진 립스틱으로 보아 분명 뭔가 대단할 걸 하고 온 게 분명하다. 그래, 그 나이엔 원래 다 그렇다.


"그래 이 맛이라니까!"


화목한 가정, 아이들도 동참한다.


"우리 엄마 최고! 우리 아빠 최고!"


이제 하이라이트, 카메라가 모두를 비춘다. 입가에 웃음을 띄운다 눈도 동그랗게 크게 떠준다. 플래시, 눈을 가득 메우는 플래시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점심 맛있게들 해요."


몇 번의 촬영, 끝엔 그럴 듯한 덕담이 오간다. 여배우가 얼굴을 약간 찡그린다, 참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술 냄새가 났겠지. 그치만 묻지 않는다. 그가 립스틱을 묻지 않듯이, 다 그런 식이다.


"여보세요? 어, 민수야. 그...렇단 말이지? 그게 사실... 내가 오늘 좀..."


매니저를 곁눈질하지만


"안돼요. 오늘 정말 바쁘단 말이에요."


역시 눈치 백단이다.


"동창 애들끼리 오랫만에 모였대. 몇 년에 딱 한 번... 있는 일인데 오늘 저녁에 정말 안될까, 촬영장 좀 늦게 도착해도 뭐라 안 그러잖아, 내가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묵살. "다음은 카드 광고에요. 늘 묵묵하게 일하던 아버지가 대학 가는 아들에게 꿈을 펼치라며 카드를 준다, 뭐 이런 콘셉트에요. 요즘 정부에서도 수요를 진작한다고 카드를..."


.


"음 글쎄... 내 아들은 아직 대학도 안 갔는데 내가 그걸 어찌 알지? 아들 대학 보낸 심정이 대체 뭔데, 난 그런 거 잘 모르겠는데?"


"또 왜 그러세요.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되잖아요. 묵묵한 척 하다가 아들이 뒤로 돌면 입꼬리를 딱 올리세요. 숨겨온 아버지의 진심 뭐 이런 거죠, 아니면 뭐 눈물이라도


저 멀리서 아들이 걸어온다. 유명한 아역배우인 듯하다. 진짜 아들보다 백 배는 더 잘생겼다. 키도 크고 예의도 바르다. 참 듬직하다. 묻는 말에 대답도 잘하고...


"...축하한다, 이제 네 꿈을 펼치렴"


포옹, 이제 입꼬리를 살짝 올린다. 등도 두세 번 토닥여준다. 가장의 전형이다. 설마 술냄새가 나진 않겠지? 괜스레 미안해진다. 이제 아들은 대학 쪽으로 걸어간다. 그래봐야 그린스크린이다. 화면에 나오는 건 죄다 전산으로 그려낸 환상이다. 카메라가 시선을 그에게로 돌린다. 트랙 인, 줌 인, 지금이다, 환하게 얼굴을 구긴다. 눈물도 살짝 쥐어짜낸다. 이 역시 환상이 아니라곤 말 못한다. 카메라가 더욱 다가오고 플래시...


플래시... "수고하셨습니다" "이야 진짜 부자 같네요." 메트로놈을 연상시키는 박수 소리, 하지만 전화벨이


"아 민수야... 진짜 미안해 나도 가고 싶기는 한데..."


"야 그렇게 바쁘다던 영수도 오는데 네가 안 오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아니 저번에는 된다고 해놓고..."


"아 진짜 안된다니까! 아휴... 진짜 미안한데... 아 몰라 끊어!"


한숨, 하지만 매니저는 멀뚱멀뚱 서있다. 눈을 치켜떠도 아무 말이 없다. 표정에 구김 하나 없다, 늘 저런 식이다. 애들 못 본지가 벌써 몇 년인지...


"다음은 어머니 댁에 보일러 갖다 드리는 광고에요."


"...잠시만, 잠깐만..."


뭐지?


뭔가 빠트리고 온 듯한 느낌, 에어컨을 안 끄고 왔다거나 비오는데 창문을 열고 왔다거나 그런


"...우리 아버지 기일이 언제였지?"


"형님, 그게 글쎄..." 세 번의 시도, 끝에 연결된 전화


"...그나저나 오늘은 며칠이더라?"


"...글쎄요 어찌 됐든 이맘때 즈음에..."


"있었으면 아내가 얘기했겠지? 아이 참, 뭔가 찝찝해서 그래. 어, 그래, 쉬고. 응, 응. 어, 그래..."


보글보글 된장찌개, 요란하게 끓는 된장찌개. 적갈색의 행복이 번진다. 그래봤자 몇 시간째 끓이고 있는 맹탕일 뿐. 그래도 그럴듯한 낡은 주택, 하얀 굴뚝 연기, 앳된 시골 풍경. 해는 뉘엿뉘엿 진 밤, 정장 차림 빠른 걸음


"엄마!"


"민수야!"


민수는 친구 이름이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컷 사인은 들리지 않는다. 프로는 역시 다르다는 눈빛뿐이다. 어차피 웃음은 웃음일 뿐이다. 이 업계는 그런 식이다, 정말로 그렇다, 정말로


"뭐 이런 걸 다 사왔어" 국민 엄마의 따스한 웃음, 동그랗게 뜬 눈. 질세라 그도 동그랗게 떠줘야 한다. 싱글벙글 웃어줘야 한다. 민수를 생각하며 웃는다. 민수의 뻐드렁니를 생각한다. 어차피 아무도 모를 것이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 먹지도 못할 찌개가


"좀 무리긴 하죠?" 웃음, 매니저의 웃음


"...이제 와서?" 투정부릴 힘도 없다


"사실... 나름 좋은 소식이 있어요 새벽 촬영이 취소되었다고 해서요. 그 아까 친구분들..."


"참나, 못 간다고 이미 다 해놨는데!" 갑자기 힘이 솟는다. 투정부릴 힘이 솟는다.


화를 내고 있지만 내는 게 아니다. 빨리 달려가서 소주 한 잔이라도 걸쳐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 전역 이후로 못 본 영수도 온다고 그랬다. 아 참, 민수도 온다고 그랬지, 엄마 보러 고향 갔다던 민수가


"데려다드릴까요?"


"뭐, 그러던지..."


찌뿌둥한 표정, 하지만 분풀이일 뿐이다. 거절 없는 분풀이는 미완의 승낙이다. 마음 한 칸은 한없는 기쁨으로 가득 찬다. 분명 아내한테는 스케줄이라고 말해놨겠지, 그럼 뭘 하든 스케줄일 뿐이다, 몇 잔을 걸치든 그렇다. 이 업계는 그런 식이다, 가정도 그런 식이다. 전화기를 들고 더듬더듬


"아 진짜? 아, 미리 말을 하지! 우리 지금 막 나가는 중인데! 그 저기 곱창집 있잖아, 아 그 왜 그 10년 전에 경민이 만난 데. 응, 응응 그래 빨리 와."


매니저는 여전히 나긋나긋하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잇 진짜, 이러다 늦겠어, 어? 뭐? 여기서 그냥 내리라고? 에이 참 그래, 뭐 그러지 뭐"


바로 건너편에 곱창집이 앉아있다. 예전과는 달리 간판에 네온사인이 달려있다. 돼지가 찡긋 웃는다, 두 발을 들고 웃는다, 입꼬리... 돼지 입꼬리... 싱글벙글... 아내... 찾아야 한다 사람들을 살핀다. 민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민수 얼굴은 아는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여기가 아닌가? 돼지 입꼬리, 플래시... 창가에서는 중년 남성들끼리 맥주 한잔 마신다. 회사 사람들인가 보다, 정장 차림. 뒤편에는 젊은 남녀, 참 뜨겁게 마신다, 그래 그 나이엔 원래 다 그렇다. 원래 다 그렇다... 아내... 돼지 입꼬리... 하얀 피부에 붉은 자국... 민수 얼굴은 암만 봐도 보이질 않는다 빵빵, 전조등 플래시... 풀어헤친 넥타이, 돼지 입꼬리... 갑자기 모든 게 보글보글 끓어 넘친다, 먹지도 못할 찌개가 전화벨, 야 민수야 너 어디


...........


....여보세요? 야 청온아!


......너 오고 있는 거야? 아 그 한우곱창집 오라니까 뭐하는 거야! 어딘지 알지?


...너 혹시 또 뭐 낮술했냐? 아 이 새끼 진짜


.....


.......혹시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예?


........


.....


...어제 저녁 8시, 탤런트 김청온 씨가 교통사고로 쓰러졌습니다 평소처럼 활동을 이어오던 김청온 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광고하기도 했던


...모든 순간이 스쳐 지나간다


........


오늘 하루.... 정말 행복했어. 아내가 만들어준 아침, 아이들 웃음소리, 흔들리는 초록 풍경... 보글보글 끓는 찌개 아 밤이구나 땅거미 진 시골, 고즈넉한 식사, 돼지 입꼬리... 싱글벙글 엄마! 엄마! 웃음소리... 이거 지인ㅡ짜 맛있다! 따스한 엄마 품, 엄마... 대학 들어가는 아들 플래시... 아들 몰래 지은 웃음, 붉은 립스틱... 내 입에도 묻어있는 붉은 자국... 꽃향기... 부딪히는 술잔, 풀어진 넥타이, 술잔 떨어트리고 이 새끼 취했네... 아 이 새끼 진짜... 플래시... 돼지는 두 발을 들고 싱글벙글... 끓어 넘친다. 모든 것이... 이 모든 것이...


.....


오늘 하루 정말 행복했어...


오늘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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