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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2부 - 5. 우리는 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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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10
조회수 : 67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21 09: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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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돈과 파괴

1235년 7월, 몽고군이 동진국의 병력을 동원해 안변에 들어옵니다. 그 어떤 경고도 요구도 없이 그냥 들어온 것이었죠. 조정에서는 긴장하며 남경, 현 서울과 경기도 광주의 백성들을 강화도로 오게 합니다. 

2차 침공 때까지 주요 전장은 서쪽이었습니다. 동북면은 심심할 때마다 (몽고와의 전쟁 중에도 -_-;) 동진국이 쳐들어오긴 했지만 소수였고 피난을 떠날 정도는 못 됐죠. 그래서 동북면은 아직도 별 피해 없이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동계병마사에게 병력을 모아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역부족이었죠. 동북면이 전장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곧 태백산맥 동쪽을 이용해 경상도로도 쉽게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뜻 했습니다.

한편 서북면에서도 침공은 시작됩니다. 곧 용강, 함종(평북 강서), 삼등(평북 선천)의 세 고을이 함락됩니다. 항복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모두 죽이고 불태웠을 뿐이었죠. 원사에서는 이 세 성을 비롯한 북계의 10여성이 함락됐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 때의 몽고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됐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군으로 성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파괴하는 동시에 소규모 부대로 전국 곳곳을 찔러 약탈과 파괴, 방화를 일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상도로 향한 몽고군의 별동대는 안동으로 향합니다. 이 때 안동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 고장이 파괴될 바에야 아예 항복해서 다른 곳을 치게 한 것이었죠. 타겟이 된 곳은 동경, 경주였습니다. 다만 소수라서 그리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듯 합니다.

강화도에서는 이에 아무런 대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문무백관을 모아 해에 절 하며 저들이 돌아가길 빌 뿐이었죠. 팔만대장경의 두번째 버전인 재조대장경 작업이 시작된 것도 이 때였습니다. 전국의 미납된 세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는데, 어차피 전쟁 중에 세금을 걷는 것도 무리였고, 어디까지나 반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차원의 문제였을 뿐입니다.

이를 보다 못 한 야별초 도령 이유정이 나섭니다. 자기라도 육지로 가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죠. 하지만 최우가 그에게 준 병력은 160명밖에 안 됐습니다. 그는 그 소수 병력이라도 이끌고 싸웠고, 해평(경북 선산)에서 맞서다 전멸합니다. 이외에도 야별초가 경기 양평에 상륙해 몽고군을 기습하기도 했습니다. 삼별초의 전신 야별초가 역사에 제대로 이름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죠.

이런 가운데에서 동북면에서는 용진진, 진명성(함남 덕원) 등이 차례로 함락됐고, 서북면에서는 동주성(황해 서흥)이 파괴되는 등 꾸준한 진격이 계속 되고 있었죠. 전방도 후방도 없었습니다. 이쯤 되면 적도 아군도 그 구별이 제대로 안 됐을 겁니다. 남은 이들은 그저 자기가 살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고종과 최우도 별 다른 방법을 찾지 못 했습니다. 몽고는 사신을 보내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저 계속 파괴를 할 뿐, 몽고군 총대장이 어디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대신 야별초를 곳곳에 상륙시키며 강화도에 오는 걸 사전에 차단할 뿐이었죠. 거기에 대궐의 북쪽에 집 한 채를 지어 기도하면 몽고군이 물러날 거라는 일관의 말을 따르고, 각 주, 군의 병력을 강화도로 오게 해서 -_- 제방을 늘릴 뿐이었죠.

육지에서 지옥도가 펼쳐지고 강화도에서는 나몰라라 하는 동안 어느 새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1236년 2월, 조정에서는 조촐한 잔치를 열었는데, 이 때 채송년이 "송경인이 처용무를 잘 춘다"고 합니다. 이에 그가 술 마시고 직접 처용무를 추었다고 하죠. 여기에 고려사는 이런 말을 집어넣습니다.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다."

참고로 몽고군이 들어온 상황임에도 연등회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2. 점입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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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가 개판인 이유는 그만큼 전국이 개판이 돼서 -_-; 사실상 현 경상남도랑 전라남도 이외에 몽고군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은 없을 것 같네요.

그 해 6월, 몽고의 증원군이 압록강을 건넙니다. 총대장 당고가 이끄는 주력군이었죠. 그는 아직 남아 있던 가주(평북 가산)와 안주를 불태웠고, (그 불길이 하늘에 닿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진을 칩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국에서는 파괴가 계속되고 있었죠. 교주도에서는 몽고군 50여기가 들어와서 약탈을 계속했는데, 2차 침공 당시 낙오됐던 병력들이 여기 합류하면서 대규모로 불어났다고 합니다. 이를 고려군은 "감히 막아낼 수 없었다"고 하죠. 

+) 어찌 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이나 다름 없던 야율유가도 이 때 고려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6월 5일 몽고의 본대는 차근차근 남하해 그 선봉이 13일에 황주로 들어왔고, 15일에는 안주에 본진을 칩니다. 이쯤 되자 조정에서도 아예 나몰라라 할 수 없어서 전국에 방호별감(防護別監)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큰 병력 지원 없이 몸만 간 수준에다 거의 죽을 길로 몰린 것이니 이들이 열심히 싸우길 기대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그 중에도 싸우려는 자가 있었고, 그들은 각 지역에서 각자의 활약을 합니다. 특히 서해 쪽에서는 야별초들이 대거 충원돼 어느 정도 해 볼만한 싸움을 한 것으로 보이구요.

꾸준히 남진하던 당고는 중간에 절대 잊지 못 할 곳을 만나게 됩니다. 최춘명이 끝까지 항거했던 자주였죠. 자주 부사 최경후, 판관 김지저, 은주 부사 김경희 등은 끝까지 맞서 싸웠지만 결국 한 달만에 함락됐고, 복수심에 가득 찬 몽고군은 남은 병사와 백성들을 학살합니다. 대몽항쟁판 2차 진주성 전투인 셈이었죠.

복수를 마친 당고는 계속 남하해 남경, 현재의 서울에 주둔합니다. 여기서 방침이 크게 수정됩니다. 어차피 북부에서 중부 지방은 갈릴대로 갈렸고, 하삼도, 경상, 전라, 충청도를 공략해야 했죠. 소부대가 동해를 타고 경상도로 내려가긴 했지만 말 그대로 소규모였을 뿐입니다. 인구도 많고 차령산맥, 소백산맥 등의 방어벽으로 둘러쌓인 남부지방을 공격하려면 대군으로 확실하게 밀고 나가야 했습니다. 더욱이 이 지역들을 확실히 잡으면 강화도는 굶어 죽는 상황에 빠뜨릴 수 있었죠.

하지만 남하하던 몽고군은 뜻밖의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

3. 우리는 싸운다

몽고군은 현 죽주, 현 안성시 죽산으로 향합니다. 이 죽주산성은 차령 산맥을 넘으려면 반드시 넘어야 할 곳이었습니다. 먼저 항복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죠. 이에 몽고군은 자기들이 갈고 닦은 공성 실력을 보여줍니다.

헌데... 참 이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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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군이 투석기로 신나게 성을 두들기며 성벽 일부가 무너질 정도의 포격을 가하자, 성 내에서도 투석기를 동원해 대포병사격-_-;을 합니다.

이어 기름에 불을 붙여 성 자체를 태워버리려고 하자 (여기서도 사람 기름이라 적고 있습니다 =_=) 갑자기 성문이 열리더니 고려군이 돌격해 왔습니다. 전혀 예상 못 한 저항에 몽고군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해야 했죠.

그 다음은 참 예전의 악몽이 떠오르는 패턴이었습니다. 뭘 해도 막고, 이래도 막고 저래도 막고... 결국 몽고군은 단 15일만에 철수합니다. 5년이나 이어진 전쟁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쉬운 포기였죠. 귀주성의 악몽이 계속 머리에 맴돌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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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나 김경손이 거기에 있었던 걸까요?

그 때 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방호별감으로 파견된 송문주, 별 이름 없는 장수였지만 그는 아주 중요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귀주성에서 버틴 5개월, 그는 당시 귀주성에서 함께 싸우면서 몽고군의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죠. 

"오늘은 적이 반드시 어떤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의당 어떻게 대응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 내에서 작전을 짜서 대응했기에 그 방법은 정말 효율적이었고, 그 대응 방식 역시 귀주성과 동일하거나 오히려 한 차례 더 진보한 것이었기에 큰 피해 없이 무난히 성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성 안에서도 이것을 신기하게 여겨 모두 그를 "신명(神明)하다"고 칭송했다고 하죠.

참고로 귀주성 전투 이후 은퇴했던 박서의 고향이 이 죽주였습니다. 그가 언제까지 살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참 신기한 일이죠.

저항은 다른 곳에서도 계속됐습니다. 개주(평남 개천)에서는 중랑장 명준과 야별초 교위 희경이 매복 후 기습해서 이겼고, 이후 몽고군은 개천에는 손을 대지 못 했습니다. 이외에 장주 낭장 광대, 석도(대동강의 하중도) 방호별감 등이 게릴라전을 펼쳐 이기고 포로 두세명씩을 강화도로 보내기도 했죠. 자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야별초 지유 이임수, 박인걸 역시 백명씩을 이끌고 몽고군에 맞서기 위해 상륙합니다. 죽주 근처의 온수(온양)에서도 아전인 현여가 성문을 열고 돌격, 대승을 거두었죠.

이 해 10월, 소규모 몽고군이 차령산맥을 넘어 전주에까지 이르지만 여기서도 반격을 맞게 되죠. 부령(전북 부안)에서 의업(의과-_-a)에 응시했던 전공렬은 매복했다가 공격해서 승리를 거뒀고, 이 공으로 진짜 의사가 됩니다. 박인걸은 공주에서 몽고 군사를 만나서 패하기도 했죠. 대흥성(충남 예산)에서는 약탈하러 온 몽고군에 대항해 백성들이 성문을 열고 돌격해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들은 각기 살기 위해, 나라를 위해, 하다못해 강화도에 상륙하지 못 하게 해서 최씨 정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싸웠습니다. 전국을 불태우며 남하하던 몽고군은 결국 막히게 됩니다. 소규모 부대의 약탈은 이미 태울 대로 태워버려서 큰 효과를 보지 못 했고, 오히려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온수와 죽주에서의 승리로 대군이 남하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제 남은 건 누가 더 오래 버티나의 싸움이었죠. 당고는 남경에 머물러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규모 부대의 준동은 계속됐고, 고려의 게릴라전도 계속되고 있었죠. 적도 아군도 지쳐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느냐의 신경전으로 옮겨갔습니다. 물론 그 동안에도 계속 피해를 입으며 농사도 짓지 못 했던 일반 백성들을 인질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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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후기 - 이미지 복구가 여전히 잘 안되서 여전히 대부분의 이미지가 작습니다, 안구에 피로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출처 pgr21의 지금은 닉네임을 어떻게 바꾸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눈시BB님의 글입니다.

http://pgr21.com/pb/pb.php?id=freedom&no=34960#1217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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