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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혁명 네번째 제언-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게시물ID : readers_203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을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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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27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21 13: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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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네번째 제언 올립니다.
 
알라딘 창작 블로그(http://blog.aladin.co.kr/723691194/)와 다음 블로그(http://blog.daum.net/silencedmz) 에도 같이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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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혁명
부제: 교육혁명에 대한 대통령의 제언
 

네 번째 제언-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오늘은 제가 지난 세 번의 제언을 통해 말씀 드린 내용 중 핵심을 짚어보며 시작하겠습니다.
 

하나. 우리 교육은 철학이 없다.
. 현재 교육 목표는 입시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문제풀이 기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 입시전쟁의 승자는 극소수이며 그들만이 우리 사회의 요직과 이권을 사실상 독차지 하고 있다.
. 입시전쟁에서 기회균등은 형식적 균등에 불과하다.
다섯. 극소수의 승자만을 위한, 모두가 불행한 문제풀이 기계 만드는 교육이 아닌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민주시민 육성이 우리 교육의 목표와 철학이 되어야 한다. 이상입니다.
 

, 그런데 그동안 심심찮게 나오던 주장이 우리 교육 목표를 민주시민 육성에 둬야 한다는 세 번째 제언 이후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습니다. 가령 “‘하향 평준화된 학력 수준을 더 떨어뜨리자는 것이냐?”, “그런 식으로 하면 국가경쟁력이 떨어질 것이 훤한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제 공부할 아이들도 학교 가면 공부 안 하겠다. 아이들이 공부는 안 하고 학교에 놀러만 가게 하겠다는 것이냐?”, 대략 이런 형태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런 형태의 주장을 반박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하는데 우리는 보통 입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에만 초점이 맞춰진 교육법이나 학습법에만 익숙해 있다 보니 주입식에 기초한 무한경쟁 방식만이 경쟁력을 보장하고 엘리트를 길러낼 수 있다는 인식에 사로잡힌 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결코, 아니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교육은 국가경쟁력 향상과 엘리트 육성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만 존재 의미 내지 가치가 있다.”는 식의 주장에 힘입어 주입식에 기초한 무한경쟁을 통해 입시전쟁에서 승자를 걸러내는 방식이 아이들의 학습 능력을 오히려 망가뜨리고 있으며 개개인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도 경쟁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한 어조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사회는 입시전쟁에만 초점이 맞춰진 방식과 현실에만 너무 익숙해 있다 보니 다른 방식의 교육에 대해 거의 생각해 보지도 않을뿐더러 그러다 보니 교육 목표를 민주시민 육성으로 잡자는 제 주장이 뜬금없고 황당해 보이기까지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오늘은 민주시민 육성이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제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하려 했는데 학력 저하’, ‘경쟁력 저하주장이 너무 많아 오늘 주제는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로 잡았습니다.
 

진짜 공부라니? 그럼 가짜 공부라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공부란 어떤 것입니까?
너무 포괄적인 물음이라면 범위를 공부법으로 좁혀볼까요?
선뜻 떠오르지 않으면 학교 다닐 때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무래도 낫지 않겠는지요?
 

선생님이 앞에서 얘기하면서 칠판에 적는 내용 따라 적고 교과서에 밑줄 긋고 형광펜으로 칠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선생님이 강조하거나 시험에 자주 나온다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외우는데 어떨 때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이해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그야말로 무식하게 외워 문제 풀면서 문제 유형 익히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시험 준비하고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에서 싹 다 지워지곤 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보통 우리가 공부 내지 공부법에 대해 떠올리는 방식은 좀 전에 얘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상 우리 모두가 학교 다닐 때 하던 방식이니까요. 오늘 주제를 보다 쉽게 와 닿게 좀 전에 얘기한 공부법을 가짜 공부라고 가정하겠습니다. 오늘 주제가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 라고 했는데 가짜 공부를 가정했으니 진짜 공부란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짜 공부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 교육은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몇 번이고 주장했습니다. ‘문제풀이 기계에서 문제풀이를 뺀 기계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너무 추상적인 물음을 던졌나요?
 

학교 다니며 교육 받는 우리는 사람입니까?, 기계입니까? 당연히 사람이겠죠. 그런데 우리 교육은 사람을 데려다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임을 밝혔습니다. 사람을 흔히 만물의 영장’, ‘고등 동물이라 칭하는데 다른 생물체와 비교했을 때 사람만이 가진 특성이 뭐가 있겠습니까? 직립보행, 도구 이용, 언어 사용, 생각하는 능력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그 중 언어 사용생각하는 능력두 가지를 꼽고 싶습니다.
 

사람은 말하고 듣는 언어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 있는데 앞의 물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기계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계는 정교하고 정확합니다. 하지만 그 정교하고 정확한 기계도 어디까지나 기계를 설계하고 만든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기계는 애초에 생각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 이쯤 하면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 뿐인 현재 교육과 생각하는 능력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고 제가 무엇 때문에 진짜공부를 언급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십니까? 기계는 정교하고 정확하지만 설계하고 만든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다고 했죠? 그렇다면 문제풀이 기계는 어떨까요? 문제풀이 기계도 쓸모는 있습니다. 정형화된 단 하나만의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객관식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쓸모 있습니다. 단 하나만의 정답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남들보다 정답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면 보다 높은 서열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는데 현재 교육이 추구하는 목표에 이보다 더 쓸모 있는 기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기계는 어디까지나 입시전쟁에서만 쓸모 있을 뿐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기계는 아무리 정교하고 정확해도 애초에 설계하고 만든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을 뿐이라고요.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보통 떠올리거나 생각하는 공부 내지 공부법은 결국 문제풀이 기계가 되기 위한 것에 그치지 않겠습니까? 정교하고 정확하지만 정해진 범위 안에서만 쓸모 있는 기계, 그리고 그 기계가 애초에 가질 수 없는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능력.
 

어떻습니까? 우리 교육이 만들어내는 문제풀이 기계에게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거나 있겠습니까? 저는 단언컨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개개인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단 하나만의 정답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자신의 생각이 과연 중요하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뭐가 중요합니까? 객관식 문제가 요구하는 능력은 정형화된 정답을 빨리, 남들보다 하나라도 더 많이 찾아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습니까?
 

객관식 문제로 점수를 매겨 수험생을 한 줄로 줄 세워 입시전쟁에서 승자를 가려내려는 목표 달성을 위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는 교육이 아닌 문제풀이 기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교육, 바로 이것이 우리 교육의 자화상이고 현실이며 적나라한 민낯입니다.
 

학년이 올라가 입시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계속 죽이며 문제풀이 기계가 되기 위해 익숙해져야만 하는 공부법. 저는 그 공부법을 과감하게 가짜 공부라 정의하고 제가 무엇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진짜 공부라고 생각하는지 말씀 드리려 하는데, 단순히 공부법의 차이만으로 가짜 공부와 진짜 공부를 논하기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그리 흥미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여럿 있겠지만 오늘은 임진왜란을 사례로 들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하나의 사안을 두고 가짜 공부와 진짜 공부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봅시다.
 

먼저 가짜 공부. 우리 대다수가 대동소이하게 겪었을 방법입니다.
 

선생님 혼자만 교과서와 부교재를 이용해 얘기합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략적인 배경을 설명한 뒤 우선 연도부터 외우라고 하겠죠? 몇 년입니까? 1592년입니다. 임진왜란 발발연도 외우기 쉽게 한다고 조선 건국 1392년에서 정확히 200년 뒤라고 얘기하며 조선 건국 연도와 임진왜란 발발 연도를 같이 외울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 선생님도 있으실 겁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대략적 배경 설명했고 발발 연도 짚었으면 뭐 남았습니까? 시간 순에 따른 주요 전투와 전투가 이뤄진 장소, 전투 이름, 지휘한 장수 이름 얘기할 것이고 우리가 임진왜란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사람 누구입니까? 그렇죠. 이순신 장군 얘기 나오기 시작하면서 주요 해전이 무엇인지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전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얘기하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 당사자인 우리를 일방적으로 배제한 채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이뤄진 강화회담, 정유재란, 전쟁이 끝난 뒤 동아시아 정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등을 전체적으로 어디까지나, 선생님 혼자설명할 것입니다.
 

그다음 선생님이 중요한 것을 하나하나 짚어주겠죠? “어느 부분 시험에 잘 나온다.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문제 나오고 지문 유형 대략 이렇게 나온다.” 와 같이 입시문제 대처 요령 짚어주고 하나 더 해주겠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암기 요령이죠.
 

대략 이런 식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진도가 끝나면 학생들은 선생님이 알려준 요령을 참고해 외울 건 외우고 문제 풀면서 문제유형 익히고 시험을 봅니다. 그 다음에 뭐 남았습니까? 뭐긴 뭐겠습니까? 시험 끝났으니 머리에서 새하얗게 지워질 일만 남았죠. 그렇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 현재 우리 교실에서 하고 있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 현실에서 이뤄져야 할 진짜 공부는 어떨지 생각해 봅시다. 우선 이 방법과 가짜 공부법의 가장 큰 차이는 선생님 혼자서만 얘기하는 주입식이 아니라는 것과 하나의 역사적 사안을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입시문제 풀이가 요구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하나부터 열까지 선생님 혼자 얘기하지 않고 임진왜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즉 세세하게 짚어주는 것이 아니라 숲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다음 선생님과 학생이 전체 토의를 통해 발표주제를 정하고 조를 짠 다음 조별로 발표 주제를 고르면 조별로 발표 주제에 맞춰 조사하고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조별 발표 수업을 하고, 각 조마다 발표가 끝나면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자유 토론을 진행하는데 말 그대로 자유토론 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라는 큰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는 가급적 질의응답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조의 발표가 끝나면 각 조는 발표수업 자료와 자유 토론 항목을 모아 최종 보고서를 만들어 발표하고 선생님께 제출합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한 평가서와 다른 조를 평가한 평가서를 작성해 제출합니다. 다시 말해 최종보고서는 조원 전체가 작성해 제출하는 것이고, 학생 개개인은 자신을 스스로 평가한 평가서와 다른 조 발표 내용과 자유토론 내용을 토대로 다른 조를 평가한 평가서 두 가지를 작성해 제출하는 겁니다.
 

이 때 선생님의 개입은 가급적 최소화합니다. 선생님은 발표 수업 이전에 큰 그림을 그려주고 학생과 전체 토의를 통해 발표주제를 정하고 나서 조별로 발표 주제를 고른 다음부터 발표수업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학생들 몫으로 남겨두고 발표 수업이 매끄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선에서만 개입하고 학생 개개인이 수업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발표 수업에 임할 수 있도록 뒷받침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 어떻습니까? 이런 식의 발표수업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진짜 공부법이 맞기는 한 것인지, 저런 식으로 수업이 이뤄지면 학력 저하가 생기고 국가 경쟁력 약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 하시는 분들 있으시죠?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를 정규 교과로 편성해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 혹은 역사를 가르침으로써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역사에 흥미가 없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하면 머리 아픈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암기과목으로 치부하기 십상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내가 이걸 무엇 때문에 배워야 하는지 생각할 여유나 겨를도 없이 오로지, 단순히 시험에 잘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라 외운 다음 시험 보고 나면 머리에서 새까맣게 지워버리는 경험을 반복하다 보면 역사는 머리 아픈 골칫거리, 암기과목으로 자연스레 인식하는 틀이 학창시절 경험과 맞물려 생길게 훤한데 그런 사람들이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설사 반복하더라도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함 아닙니까? 한 개인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최소화 하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끊임없는 자기 성찰입니다. 그런데 자기성찰을 아무 생각 없이 언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라는 식으로 외우듯이 하면 자기 성찰이 되겠습니까?
 

성찰이 뭡니까? 사전에서 성찰을 찾으면 자신의 일을 반성하며 깊이 살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한 개인이 자기 성찰을 할 때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 가급적 그러지 말아야겠다.’ 라는 식으로 피상적으로 한다면 진정한 자기 성찰이 되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정규 교과로 편성해 배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개인이 자기 성찰을 할 때조차 피상적으로 해봐야 진정한 자기성찰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역사적 성찰을 하고자 할 때 피상적으로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역사를 교육하는 이유가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기계처럼 달달 외워 객관식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게 하고자 함이라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 왔듯 역사 교육을 그런 식으로 한다면 우리 사회는 역사를 보는 시선과 틀이 단순히 지나간 사실, 그러한 사실들을 기계처럼 달달 외워 오로지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기 위한 것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금을 들인 의무교육을 통해 자기 성찰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키워내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 중에서 시험에 잘 나오는 부분을 기계처럼 달달 외워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는 것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물론 지금은 중요하겠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학 입시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아 보다 높은 서열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것만이 교육의 유일한 목표인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연 있겠습니까?
 

수업의 객체로서 선생님 혼자 진행하는 주입식 수업을 따라가기만 하고 따라가기에도 벅찰 수도 있는 수동적 학생.
 

수업의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과 격의 없이 상호간에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역사와 현실을 보는 안목을 넓히고 민주시민의 기본 소양을 차근차근 쌓아갈 수 있는 능동적 학생.
 

우리 사회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성찰하고 그것을 발판 삼아 역사와 현실을 보는 안목을 넓히는 토대를 제공해 주고자 하는 것이 의무교육을 통해 역사를 가르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분명하다면, 자신의 생각을 죽여 가며 정해진 답만 기계처럼 달달 외우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주체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며 스스로 묻고 답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을 해야 하겠습니까?
 

단 하나의 정답을 미리 정해놓은 객관식 문제에서 귀신같이 정답을 찾아내야 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할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가짜 공부와 진짜 공부가 쉽게 와 닿도록 임진왜란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이는 비단 역사 과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작품, 그 중에서 시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똑같은 시 한 편을 읽었을 때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문학 작품이 객관식 문제 지문으로 출제되는 순간 개개인의 생각과 정서, 감정은 미리 정해진 표준 정답 앞에서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상상력을 키우고 여러 간접경험의 좋은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문학작품이 입시에 잘 나오는 주요 문학 작품으로 둔갑하는 순간 상상력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입니다.
 

역사, 문학, 사회, 정치, 경제를 포함하는 인문사회과학을 배우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인문사회과학은 사람 자체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는 분야입니다. 사람의 본성, 본질, 존재론적 의미, 인류가 지나온 발자취, 사회현상과 같은 복잡 미묘한 분야를 다루려면 철학적 사유와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인데 이런 인문사회과학에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인문사회과학에 필요한 것은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인 것이지 미리 정해진 답을 찾는 능력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은 어떨까요? 인문사회과학이 사람 그 자체에 대해 탐구하는 분야라면 자연과학은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 자연환경, 과학적 현상을 탐구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위해 수학과 과학을 정규 교과로 편성해 교육하고 있습니다. 실체가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아 눈에 보이지 않는 인문사회과학과 달리 자연과학은 실체가 눈에 보인다는 차이가 있으니 객관식 문제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식의 교육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자연과학의 본질 내지 시작과 끝은 호기심입니다. 자연환경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 생긴 호기심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에 인류는 자연과학을 통해 호기심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던가요? 자연과학이 지금까지 찾아낸 답이 언젠가는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밝혀낸 스스로의 답에 만족하지 않는 꾸준한 지적 호기심과 물음입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 참으로 궁금한 것이 많다 보니 계속해서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아이들이 언제부턴가 묻지를 않습니다. 묻지 않는다는 것은 궁금한 것이 없어서 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 시작했다는 위험한 신호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풀이 기계에게 스스로의 생각은 중요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오로지 입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문제풀이 기계가 되기 위한 경쟁에 매몰된 아이들이 입시전쟁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이전까지는 없던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답니까? 결코 그렇지 않음은 대학 현실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죽이는 교육 방식에 길들여져 묻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대학생, 오로지 학점 관리 잘 하고 스펙 잘 쌓아서 취업할 목적 말고는 대학에 다니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기막힌 현실에서 여러분은 희망이나 미래가 보이십니까? 저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어떠한 꿈도, 미래도, 희망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지 못 하는 사람이 대학에 가서 진짜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공부는 시험에 잘 나오는 내용을 달달 외워 시험에서 높은 점수 받은 다음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머리에서 새하얗게 지워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단언컨대 가짜 공부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 함은 그것을 토대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보다 넓힐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고, 진짜 공부란 바로 그 지점에서 단순히 새로운 것을 아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것이며 그 능력은 다름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힘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여러분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끝으로 또 강조합니다. 기계는 정교하고 정확하지만 설계하고 만든 범위를 벗어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문제풀이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객관식 문제에서 미리 정해진 정답을 귀신 같이 잘 찾아내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못 하는 문제풀이 기계 밖에 안 되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교육 방식을 지금까지 그래왔듯 계속 고수하고 지속할 것인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는 교육으로 바꿔낼 것인가.
 

이제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두 주 뒤인 75일 오후 3시에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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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제언은 7월 5일 오후 3시에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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