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살아간다. 융퉁성있게 넘기자면 당신의 사랑도 옳고 나의 사랑도 옳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포용하는게 넓으니 '사랑'에 대해선 논하지 않겠다. 내가 논의하려는 사랑은 '진짜 사랑', '진정한 사랑', '완벽한 사랑', '완전한 사랑'. 한마디로 플라톤이 구부한 현실의 속성과 이데아의 속성에서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데아의 속성, 사랑의 이데아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하는 연애와 사랑은 거의 백프로 슬픔과 고통, 메마름과 헤어짐을 동반한다. 첫사랑은 참담한 실패와 상처로 끝나며 거짓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고, 영원한 사랑의 서약을 맺은 결혼생활에서 환상은 부서지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혼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거나 차마 가족과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거짓긍정과 거짓행복의 쓰디쓴 웃음만을 지을뿐이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불행을 덮기위한 웃음이란, 행복하기 위해 행복한척 하는 짓이란!
사랑은 달콤한 고통이다. 사랑은 꽃처럼 피어났으면 지는게 당연하다. 만남과 헤어짐의 이치에서 감정의 질림은 잘못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다.
이러한 우리가 겪는 사랑의 비영속성은 세계적으로 우리 인간이 가진 사회, 문화적 잘못된 선입관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 보수적인 성격이 한몫한다.
우리들이 해왔던 사랑들은 진짜사랑이 아니였다. 나는 여기서 '완벽한 사랑'을 말하려 한다.
열린 생각으로 나의 이야기를 받아들여보자.
-완전한 사랑의 방법-
1) 박애주의
한사람만을 사랑한다는 로맨리스트 낭만주의는 거짓이자 위선이다. 우리는 한 사람만을 사랑을 필요가 없다. 자신이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해야하며 이러한 사랑의 감정을 더 높고 넓은 수준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서 사랑의 성숙을 해야한다. 현대의 우리는 일부일부처제인 1명과 1명이 마치 거울처럼 만나서 자신들만의 사랑을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사랑에서 영원성은 없고 영원한 행복 또한 없다. 충분히 우리는 많은 사람과 많은 사랑을 나눌수 있다. 사랑은 아무리 나누어도 사라지지 않는 무한한 비물질,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 경제적인 문제를 물고 늘어질 수 있다. '아이는 누가 기르냐', '살림은 어떻게 꾸리냐' 등의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생길거라는 비판자들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사랑을 위한 문화적인 변화가 무엇보다도 행복을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것이다. 왜 사는지를 알고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게 올바른 순서이다. 현재 존립해 있는 사회, 경제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가? 자본주의의 이면을 볼줄만 안다면 우리 사회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목표 따위는 전혀 찾아 볼수없다. 민주주의의 실현가능성은 현재상태로서는 너무나도 불확실하며 불투명하다. 사회, 경제는 문화적 대개혁에 맞춰서 끌려올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가끔 다른 것들이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이한테 하는 행동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 먹여주고 재워주는것, 웃게 만드는것, 이런건 사랑이 아니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단순히 육성, 육아일 뿐이다. 이러한 사랑이라 불리는 육아,육성은 애견인이 개를 사랑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들과 다름을 인지하는 인간만이 할수 있는 진짜 사랑의 행위란 무엇일까?
2) 자유
나는 내가 정립한 이 '완전한 사랑'을 할때에 이 사랑에 대한 표현방식, 행위는 신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었다. 흔히 알고 있는 예수에 관한 신이다. 이 절대적인 신이 인간에게 했던 사랑, 내가 말하려는 완전한 사랑에 대한 표현방식, 행위를 말해보고자 한다. 일단 신의 존재는 긍정하는 관점으로 신이 우리에게 하고 있는 사랑이라 부르는 짓들을 성경과 현실 속에서 찾아보면 이건 절대 우리인간이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다. 신은 우릴 사랑하는게 아니라 단지 절대권력에 찌든 싸이코패스 방관자로만 보일 뿐이다. 이말에 대해 누군가 신성모독이라 나를 비판한다면 그대는 신을 모르는 것이니 그 맹신에 의거한 믿음 또한 당연히 가짜이다. 신의 사랑은 확실히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사랑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 과연 신은 저 하늘 위에서 외롭게 혼자서 무슨 사랑을 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자유라는 가치에서 신의 사랑이 무엇인지 볼수있었다. 신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라는 사랑을 준것이다. 자유를 주는것. 이것이 완전한 사랑의 성립요건이다.
보통 우리가 하는 사랑은 소유욕이 기반된다. 소유욕에서의 관계는 본능적 욕구인 성관계가 중심이 된다.(부모의 자식에 대한 소유욕적 사랑은 여기서는 열외된다) 성관계보다 큰 그림으로 보자면 외로움의 충족이라 할수도 있다. 어찌됬든 똑같은 음식을 많이 먹으면 배부르고 질리며, 외로움또한 과충족이되면 사적인 시간, 혼자있는 시간을 원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사람을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소유에 집착한다는건 불타오르는 사랑을 한다는 것이고 이는 관계의 빠른 파극을 낳는다. 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 주어야 하며 선택을 존중해 주고 그 사람의 모든 생각, 행동, 모습까지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실존주의와도 많이 닮아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 조건없이 이유없이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의 표현방식은 가능한한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
이게 내가 말하는 영원히 행복이 지속될수 있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할때 사랑의 완벽함, 영속성, 그로 인한 최대의 행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이다.
1. 사랑의 대상과 사랑해야할 대상의 수는 절대 정해져 있는게 아니다. '완전한 사랑'은 다양한 사람을 그리고 많은 사람을 사랑할수록 그 수준과 질이 높아지는 그러한 사랑인 것이다. 가장 비슷한 개념으로는 카사노바가 있다.
2. 사랑의 표현방식은 오직 '자유의 인정'일 뿐이다. 그 사람을 얼마나 존재 자체로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 얼마나 그 사람의 구속하지 않고 자유를 놓아 줄수 있는냐. 너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유를 주는것. 이것이 사랑의 표현이다.
모두가 자유로운 사랑을 하는 문화.
이것이 완전한 사랑, 질높은 행복을 모두가 같이 가질 수 있는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