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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공항과 박정희, 그리고 박근혜
게시물ID : sisa_6000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헤이브라더
추천 : 0
조회수 : 164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26 23:28:16
제가 엠팍에서 직접 썻던 글입니다.
오유에서도 한번 남겨보고 싶었네요
제가 직접 쓴 글이니 부족해도 잘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펌은 무조건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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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박근혜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했더군요...
제주를 방문한다면 관문인 제주 공항, 정뜨르를 밟을 수 밖에 없습니다.
뜨르라는 말은 제주방언으로 넓은 들을 의미합니다. 공항은 평지가 필요하기에 최적에 요지였고
이는 제주 요새화 과정에서 일제 육군의 항공기지로 개설됩니다.
애초부터 제주 공항의 시작은 일제 패망군의 유산이였던 셈입니다.

이곳 정뜨르는 광복 후 버려진 폐허가 됩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여객기 하나 없는 변변치 못한 후진국이였기에 제주공항으로 확충되기 전까지는
간간히 군용기나 뜨는 활주로 2개짜리 비행장일 뿐이었습니다.

< 출처 : 디지털 제주문화제전> 50년대 정뜨르의 모습, 당시만 해도 포장이 거의 되어있지 않은 상태

이 곳 정뜨르 비행장은 그러나 새로운 비극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1948년 4월 제주는 소위 말하는 4.3사건에 휘말립니다.
애초 시발점인 된 곳은 4월 3일 관덕정에서 시위가 시작입니다.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고 당시 제주 주둔 미군정의 횡포에 시달렸던 제주도민들은
용담동(지금 공항이 위치한 동네) 근처 제주목관아에 관덕정에 시위를 벌입니다.
이를 강경 진압하면서 어린아이가 숨지고 도민들이 짓밟히면서 때마침 한반도에서의 패퇴로 제주로 내려온
남로당 세력의 반정부 빨치산 활동에 급격히 휩쓸리게 됩니다.
그 후 최소 1만, 최대 3만의 피해자를 낳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던 평균 초등학교 학력 수준의 서민들이
군경과 서북청년, 빨치산들에게 낮과 밤을 매일같이 살육이 벌어지고 약탈이 자행되던 시기였습니다.


4.3은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박정희에게는 어찌보면 하나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4.3진압을 위해 여수와 순천의 주둔해있던 14연대에게 제주도에서 진압을 명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만 당시 14연대는 제주도민 진압을 반대하고 출병을 거부합니다.
이후 여수와 순천에서 정부군과의 교전이 벌어집니다.
이때 현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전 대통령인 박정희는 좌익사범으로 체포됩니다.
형 박상희가 이미 대구10월사건에서 좌익사범으로 목숨을 잃었던 터라 이미 블랙리스트였던 박정희는
여전히 군 내에서 좌익으로 의심받았고 이 사건을 통해서 사형까지 구형됩니다.

< 출처 : 두산백과> 여순반란사건 당시의 사진

당시 박정희는 심한 고문과 사법거래를 통해서 군 내에 좌익사범들을 자백하게 되고
어찌보면 이 이후의 반공주의자로서의 행보를 걷게 됩니다. 더욱이 6.25가 터지면서 군 지휘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박정희는 참전을 통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얻게 됩니다.

여순주둔군반란사건 이후 제주에서의 학살은 절정에 치다릅니다.
이미 단순한 반정부군 진압이 아닌 이데올로기간의 신경전으로 치다르면서
남로당과 정부는 제주도민에게 어느 편에 설지를 묻게 되고 살기 위해 어느 한 편을 택하는 순간 다른 시일에 주검이 되는
어느 선택을 해도 죽음이 되버리는 현실이 되버립니다.
살기 위해서는 가진 재산을 계속 해서 바쳐야 했고 밀고와 모함, 조작을 통해서라도 최대한 조직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마을 주민들은 서로를 팔아넘기고, 본토로 밀항을 하고 심지어는 일본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일 육군에게 핍박받으면서 지하갱도와 군사기지를 강제 징용당하고 일본 육군에게 온갖 공출을 당했던 그들이
가해국가인 일본으로 피신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건 덕분에 많은 제주도민이 넘어갔고
재일교포 수 60만 중 제주출신 12만이 차지할정도로 상당한 숫자가 이 당시에 넘어가게 됩니다.



정뜨르는 4.3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없었습니다. 당시 용담지역은 가장 많은 제주도민이 살았던 곳입니다.
수많은 학살자들은 넓은 들이 정뜨르에 쉽게 묻을 수 있었기에 상당수가 묻혔을거라고 추정되어 왔습니다.
다만 이후 70년대 공항이 건설되는 덕분에 유골에 대한 확인은 할 수 없었습니다.

< 출처 : 디지털 제주문화제전> 70년대 공항청사의 모습,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 밑에는 수많은 희생자의 유골이 묻혀있다.


이후 2007년... 그야말로 58년만에 제주공항 주변에 유해발굴이 시작됩니다.
이 발굴사업으로 200여구의 유골이 수습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242599.html - 당시 유해발굴 사업에 대한 기사(한겨레)
(사진은 불쾌감을 줄 수 있기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아직도 모든 유해가 발굴되진 못합니다. 이미 청사와 활주로가 지어졌기에 그 밑에 추정 수천구에 유골은
아직도 그 밑에서 고통스럽게 묻혀져있습니다.
여기 회원분들도 한번씩 이 제주공항의 활주로를 이용하셨을겁니다.
그 밑에 아직도 수천명의 원혼이 서려있다는것을 아신다면 착잡하실겁니다.


오늘 박근혜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하였습니다.
아마 공항옆 군용 활주로를 통해서 방문하셨을터입니다. 군용활주로도 유해가 매장됬을거라 추정되는곳입니다.
그곳은 제주도와 대한민국, 아버지인 박정희에 운명을 바꿨던 치열한 역사의 현장의 증거입니다.
오늘 대통령은 일회성 공약이 농후할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과 동문시장에서의 현장 방문만을 하셨을 뿐입니다.
어찌보면 반공의 이데올로기와 해방 이후 급격한 혼란기에서 희생된 수많은 원혼들에게
또 아버지 박정희를 바꾸게한 역사의 현장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느낄지 궁금합니다.
공약이였던 4.3특별법에 대한 보완 및 강화는 지금 어느정도가 되었는지 진정 묻고싶습니다.
출처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2&mbsIdx=2718005&cpage=2&mbsW=&select=&opt=&key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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