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자작시 8편.
게시물ID : readers_204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배고파너무
추천 : 7
조회수 : 32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6/27 12:00:58
옵션
  • 창작글

web_3077340962_77acc397.jpg





시- 달의 하루


하루를 담은 책은 그 절반이
읽히지도 못한 채 덮인다.
그런데 왜 순순히 덮이는 건가.
밤하늘 뒤로 퇴장한 그 내용을
나는 가까이서 읽어본 적 있다.


온 몸이 가려지고 나서야
화려한 차례가 오는 건
원래는 치욕이었다.
그래서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감던 어머니는
밤새도록 쇠하고도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고 한다.


달은 매일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고 말간
손톱을 정리하는 것이
보잘 것 없는 최선.
그런 진부한 방식은
지나온 생에 대한 오마주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조각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침이 오면
가까웠던 전성기를 깎아내고
깎아내고 깎아내고
존재하는 것이 비겁해 보일만큼
비워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짐승 같은 호통에
겁을 입 가득 집어먹고,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중심이 차오르다가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나를 낳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해처럼 둥글었고
보름은 시들어갔다.


시들어가는 건
뱃속을 온통 굶은 이빨들 앞에
온 몸을 내놓는 것이었다.
배춧잎에 구멍을 낸 애벌레 송곳니 같은
날카로운 아픔이었을 것이다.
말간 손톱을 내주는 커다란 양보였을 것이다.


밤의 탐욕스런 땡깡을 달래고 나면
달은 해의 뒤에 들어가 홀로
외로워하는 음력을 계산했다.
그렇게 달이
하루를 치우다보면
해가 싱싱한 절반을 열었다.
그렇다고 절반이 모두 닫히는 건 결코 아니었다.
초승달 같은 작은 틈새가 단단했다.

-----



시- 기억의 역사


기억의 눈가는 주름지다.


그래서 아가들은 웃음을 지어도
부푼 볼만 하얗다.


걸음마를 떼고, 말을 알아들어
꺼멓게 미간을 찌푸려 본 적이
있은 다음에야 기억은 자리를 잡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주름은 번식하다가,
잠깐 멈춘다. 그게 기억의 한계고, 다시 말해
전성기이다.
물론 힘든 일을 많이 해온 사람은 예외다.
담배 연기 자욱한 추억이 겹겹이 칼질을
해놨을 거니까. 그런 경우엔 좀 부자연스럽다.


나이가 들어 눈가가 자글자글해지면
주름이 서로들 겹쳐서 어디에 기억이 얹혔는지를 찾을 수 없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경우엔 피부병이 아니라 정신병이라고들 한다.


살다보면 쏜살 같은 세치혀에
베이기도 하고,
억지로 웃는 무거운 미소가
이마를 짓이겨 놓기도 한다.
상처의 기억. 그건 깊기도 하다.


우리가 움직이면 파도처럼
일렁이기도 하고, 일그러지기도 하고
비를 맞으면
숨이 막혀 기억을 토해내기도 한다. 그때처럼.


-우리 그때 좋았잖아.
너한텐 아니었어?-


기억에 흰 머리가 났었다.
주름에 기억이 얹힌다는 증거.
지금은 까맣게 포장된 젊은이의 새치.
돌아보면 그 때 주름이 많아지긴 했었다.

-----



시-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가 집의 목덜미를 밟아요.
신발장 전등부터 화들짝 놀라기 시작해서
저 끝 내 방 침대 그림자까지 부르르 떨어요.
새로운 것이 몸에 닿는 소름 때문이죠.


오로지 쇼파만이 아빠를 기억해요.
축 늘어지는 걸 좋아하는
유일한 놈이라 그런 것 같아요.
심지어는 아빠 뒷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요.
누구를 반기는 강아지 꼬리의 잔상 같은거죠.
그런 댓가로 쇼파는 귀여움을 독차지해서
지금 거실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니까요.


다행히 티비 소리는 매일매일 달라요.
그래서 티비는 아빠랑 어색할 겨를이 없어요.
어차피 매일매일 모르는 사이니까요.
어, 다시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아마 티비는 아빠를 잘 모를건데, 아빠는 티비를 잘 아나봐요.
자꾸 아는 척을 해요.


아빠는 티비만 앞에 있으면
자꾸 종이에 시를 써서 날려요.
나한테로 정확히 날아오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주워담아요.
종이엔 한 바닥만큼의 정보가 담겨있어요.
근데 그래봤자 옆구리가 찢어진 종이예요.
대충 요점만 읊어주고 말아요.


종이들의 비명소리가 자꾸 들리면
난 땅바닥을 밀어내요.
엄청 무겁지만요.


인사를 하고 훽 뒤로 돌아요.
-내일 이맘때쯤 봐요-


학다리처럼 코작코작 걸어요.
잠옷이 휘파람처럼 뽀송해서
콧노래가 나와요.

-----

시- 장마


여러분,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정했어요 나는.


장마는 눈물은 쏟는 것이죠.
그러니까 고백은 일종의 일기예보인 셈이에요.


장마가 오는 이유는
서로 다른 마음이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되면 서러운 한 쪽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게 되고,
속눈썹이 아래를 향하게 되고,
구름이 방울져서 매달리게 되고,
복받쳐 어깨를 들썩이면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지게 되겠죠.


얼마나 오래 울까요?
주변 사람들은 뚝 그치라고 할 거예요.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면
조금만 울어야 하긴 하는데…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제 얼굴을 덮은 먹구름은
얼마나 울먹이고 있나요?

-----------



시- 꼬리


우리 집 강아지,
치켜든 꼬리.

우리 먼 조상은
저 꼬리가 가리키는 하늘 위
별나라에서 살았을 거야.
그 땐 만만한 땅 위를 내려다보며
온 몸이 얼마나 근질거렸을까?

외로운 나라 버리고
땅 위에서 왕처럼 군림하려고
때를 기다렸지.
우주를 뱅글뱅글 휘젓다가
입맛에 맞는지 잠깐 간을 본거야.

예상 밖이었지.
몸뚱인 떨어지고 있고
꼬리는 몸을 뒤로 잡아끌고,
온몸을 불싸지르는 속도.
준비도 없이 너무 급했던 거야.

모서리처럼 아프게 불타오르다가
온 몸이 뜨겁게 늘어나다가
결국 못 참아서 제 꼬리 끊고 땅으로 떨어졌다나 뭐라나.

그래서 조상님은
영광은 작아지고
옷은 헐벗고 곧 후회한 걸.

그리고 작아진 몸뚱이를 가지고
몇천년간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가
몸 속을 통해 내게도 전해졌지.
여기까지가 우리 조상님 이야기.

그래.
우리 집 강아지,
내리앉은 엉덩이
땅을 가리킨 꼬리.

뒤로 넘어져도 한 번쯤 지탱해줄 꼬리.
걱정을 땅으로 접지할 수 있는 꼬리.
뒷걸음질 몇 번 칠 수 있는 길을 내주는 꼬리.
우린 그런 거도 없이 살아왔던 거지.

-----------



시- 정신지체장애인


삐딱선 타는 걸음 절룩이는 기울기를 타고 이목이 한 곳으로 모이는군요. 저 분은 어느 나라에 국적을 두신 외국인인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얼핏 듣기론 저렇게 생긴 분은 희귀한 곳에 사신대요. 소싯적엔 누구 가슴을 여러 번 겨눈 저격수 행세를 했다는데, 그 전쟁통 속에서도 살아남았다는 흔적이 잘도 절룩대고 있네요. 우리는 그를 보면 숙연해지잖아요. 아무 말도 못하고 생각만 하게 되는 것처럼 조용히, 그의 내부를 파헤쳐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의 나라에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국민들이 모여 자급자족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을 지원해주는 가슴 뻥 뚫린, 전쟁의 피해자는 사레 들린 기침이 펑펑 터지면서도 어떤 연유로 그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깊은 사연을 인터뷰하고 싶네요.


한바탕 전쟁 중에도 그녀는 태엽을 돌린 거죠. 그게 시작이었겠지요. 태엽 인형. 뱅글뱅글 돌아가는 작은 몸을 차마 버릴 수 없었겠어요. 가슴에 총을 맞아 밑 빠진 구멍이 생겼어도요. 피 흘리는 구멍에 싸구려 휴지를 한 움큼씩 채워넣고 채워넣으면서도 태엽을 돌린 거죠. 십수 년간 반복하는 작업이었겠어요.


그 덕에 작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누구 가슴에 총을 겨누다가, 그리고 태엽인형처럼 뺑글뺑글 반복 행동만 하다가, 마침내 전역을 하게 된거죠. 어머니가 늙어빠져서 더 이상 총을 들 일이 없어졌을 테니까요. 그러나 십수 년간 쌓인 태엽의 비틀림은 아직 남아 길거리에 절룩대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쯤 그의 나라에 발을 딛고 서 있을 한국인 아주머니를 위해 나는 잠시 묵념을 하겠습니다.

-----------



시- 고추잠자리


삼삼한 꽃봉오리 단 줄기
를 가슴에 모아 쥔 붉은 프러포즈.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여름과 가을을 수없이 넘나드는
바람이시여, 허락하소서.
수많은 추락을! 수많은 비행을!
공중을 향한 출정식.

둥근 볼이 붉은
하늘은 향이 진한 포도주 한 잔
그 정도.
바람이시여, 로맨틱한 온도를
머금은 촛불은 끄지 마소서.

무리 지은 춤들이 건반을 오르내립니다.
니나니노- 니나니노-

본네트에
착지한 태양 한 알,
쨍 튀어오른 그 삑사리 위에도
남모를 뜨거운 커플 몇 쌍.

-------




시- 인생은 마라톤이래요



인생은 마라톤이라고들 하는데요,
이건 모두가 처음 뛰어보는 마라톤이잖아요,
나는 언제쯤 전속력을 내는게 마땅한 건지를

누구에게 물어봐도 되는 건가요?


혹시 전속력을 내면 내가 가진 에너지가 모두 닳는 것은 아닐까요? 내 허벅지는 얼마나 탄탄할까요?
연습시간이 없으니, 더 빨리,



하루살이의 길과 거북이의 길이 교차하는 지점이 언젠간 나타나나요? 난 그럼 비교적 안심을 할 거예요. 마침표는 몇미터퍼세크의 속도로 찍히는건가요? 그건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다섯 시간을 사용하지 않는 건 규정위반인가요? 새들의 인생도 마라톤인 건가요?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건가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건가요? 바퀴가 구르는 한 회전은 인생인가요? 반환점인가요? 출산인가요? 기도에 붙은 떡은 에너지를 흡수하는 건가요? 비만한 살은 에너지의 형상화인가요? 매 순간 헤어지는 물들은 매 순간 죽는 건가요? 존재가 많아지는 건가요? 어망을 들어간 물고기의 몸매는 트랙을 도는 마라토너의 형식인가요? 그럼 흐르는 강물은 정이 많은 건가요? 뱅글뱅글 돌기만 해도 주파할 수 있나요? 뒷걸음질도 규정상 허락되나요?



그러니까 나 마라톤 같은 삶을 살면서 언제쯤에 전속력을 내야하는 건가요? 인생은 마라톤이라는데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