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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혼을 담은 기록 어진-(御眞)
게시물ID : history_217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카카포
추천 : 14
조회수 : 3020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5/06/28 00: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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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전하는 어진들에 대해 시대 순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신라
 
ㄱ. 경순왕
 
신라신대의 어진은 경순왕의 어진만 전해지고 있다. 경순왕은 고려에 귀부한 뒤 말년을 고자암(高自庵)에서 보냈는데 고려초에 그의 어진이 봉안되었다고 전해 진다. 그 뒤 원본의 행방은 묘연해 졌지만 여러 차례 이모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존재가 잊혀졌다가 2007년 숭혜전 창고에서 어진 5점이 발견 된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오랜 시간 방치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매우 안 좋다. 발견된 5개의 어진은 다음과 같다.
 
1677년 강원도 원주 고자암에서 그려진 어진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려진 어진
1794년 이명기가 그린 어진
1904년 승려화가 그린 어진과 밑그림
 
특히 1677년 그려진 어진은 상태가 매우 안좋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 보았으나 없는 것으로(필자가 못 찾은 걸 수도 있음.) 미루어 볼 때 사진 촬영조차 어려울 정도로 훼손 된게 아닌가 싶다. 1677년 그려진 어진을 모사한 글들을 살펴보면 경순왕 좌우에 시녀가 서있다고 한다. 1677년 그려진 어진은 악기를 든 여인과 시종이 서있는 형식으로 바뀌었고 이 후 어진에는 시종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경순왕의 모습만 그리고 있다. 이러한 변천은 아래 사진을 보면 이해가 쉽게 갈 것이다.
 
경순왕어진1.jpg 경순왕어진2.jpg
        1749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 제작                1794년에 이명기가 그린 경순왕 어진
 
경순왕어진3.jpg 경순왕어진4.jpg
            1904년 이진춘이 그린 밑그림                     1904년 이진춘이 그린 경순왕 어진
 
현재 이 어진들은 2007년 발견 이 후 '신라 숭혜전릉 보존회'에서 보관하다가 2013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 하였는데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서 정밀복원과 보존작업을 거친 후 일반에 공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전란이 많아서 인지 고려 이전의 어진은 경순왕 어진이 유일하다. 궁중화가가 아닌 사찰에서 그려진 이모본이라 이모 과정에서 복장이나 세부적 묘사가 일부 달라지긴 하였지만 고려초에 그려진 원본을 대체로 충실히 이모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경순왕 어진은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어진으로서 그 사료적 가치가 크다 할 수 있다. 경순왕 어진 외에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일화가 남아있는 신라 어진으로 궁예가 복수심에 칼로 난자해 버렸다고 알려진 헌안왕(또는 경문왕) 어진이 있다.
 
 
 
 
 
2.고려
 
고려 시대에는 어진을 왕궁 내부에 경령전(景靈殿)에 모시거나 사찰에 봉안하였다. 어떤 왕은 궁궐에 두고 어떤왕은 사찰에 두고 한것이 아니라 어진을 여러개 그려 궁에도 봉안하고, 사찰에도 봉안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만 해도 기록상 3개의 사찰에 어진을 봉안했다고 한다. 왕궁뿐 아니라 사찰에도 봉안해야 했으므로 이전 삼국시대에 비해 어진이 많이 그려 졌을거라 추정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시대 어진은 사실상 제대로 남아 있는게 없다.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 고려가 외침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거란, 여진, 몽고, 홍건적, 왜구 등이 고려왕조 전반에 나눠 침입해 왔었다. 특히 거란의 2차 침입시에는 수도 개경이 털리는 바람에 실록까지 소실되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잦은 침입에 어진들이 온전히 보존되기 어려웠다. 둘째. 조선이 개국 된 후 고려 왕조 어진들을 제대로 관리 하지 않았다. 화장사에 있던 공민왕의 어진으로 알려진 어진을 잠시 궁으로 들여 왔다가 망한 나라 임금의 어진이라며 다시 사찰로 보낸 기록 등을 보면 고려 어진에 대한 조선왕조의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이처럼 갖은 수난을 겪었기 때문에 고려 시대 어진이 보존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왕건과 공민왕 어진뿐이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고려의 첫번째 임금과 마지막 임금(우왕, 창왕은 폐위 되었고, 공양왕은 양위 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마지막 임금은 공민왕이다.)의 어진만 남아 있다.
 
ㄱ. 태조 왕건
 
왕건의 어진은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왕씨 족보에 실려있는 왕건의 모습과 매우 흡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왕씨 족보는 1992년 9월 개성시에 살고 있던 태조 왕건의 31대 후손인 왕지송 노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던 것을 개성시 당위원회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단군묘도 만들어내는 북한인지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래 우측 어진을 보고 배낀 것이든 아니면 그 반대로 왕씨 족보에 그려진 왕건의 모습을 바탕으로 우측의 어진을 그려낸 것이든 두 초상화가 매우 닮았고, 연관이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왕씨 족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 져야 알 수 있을 듯 싶다.
 
왕건어진5.jpg 왕건어진2.jpg
                                            고려 왕씨 족보                                                                           왕건 어진(조선시대)
 
아래의 두 어진은 남한(왼쪽)서 사용되는 표준영정과 북한에서 왕건 묘소에 봉안해 놓은 영정이다. 둘다 국가공인 상상화라 할 수 있다.
 
왕건어진3.jpg 왕건어진4.jpg
                   태조 왕건 표준영전                                 왕건 묘소(북한)에 봉안된 영정
 
이처럼 왕건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는 어진은 현존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런데 제대로된 어진은 없지만 신기하게도 동상이 남아있다. 그것도 무려 왕건 당대와 가까운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사이에 만들어진 동상이다. 왕건 당대와 매우 가까운 시기에 만들어진 만큼 왕건의 어진을 직접 보고 만들거나 왕건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들은 토대로 충실히 재현 했을 것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동상은 북한에서 1992년 왕건의 릉(현릉)을 확장 공사하다가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불상으로 오인 되었으나 고려 왕실 제례 때 사용되던 고려 태조상을 조선 세종 11년(1429)에 현릉에 묻었다는 기록과 교차 검증되어 왕건상임이 밝혀졌다. 이 청동상은 왕건의 젊은 시절을 모사한 것이라 한다. 나체상이지만 벌거 벗은 임금님 처럼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상위에 옷을 입혀었다고 한다. 실제 청동상 발굴시 발쪽에서 비단조각이 나왔고 허리띠의 일부로 보이는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기록에도 왕건 청동상에 입힐 비단옷과 옥대(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봉헌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유물과 사료가 교차 검증이 된다. 남북 관계가 비교적 원만했던 2006년에 국내에서 전시된 적도 있다. 왕건의 청동상은 왕건의 제대로 된 어진이 전무한 상황에서 왕건의 모습을 추정 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다. 한편 왕건의 어진은 3곳의 사찰에 봉안 되었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곳인 개태사가 왕건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어진(아래 우측)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왕건청동상.jpg왕건어진1.jpg
                          왕건 청동상                                         개태사에 봉안된 왕건 어진
 
ㄴ. 공민왕
 
공민왕의 어진 한점이 현전하고 있다.  현전하는 어진은 태조 이성계가 1395년 종묘를 창건하면서 신당에 봉안했는데 임진왜란 대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때 이모한 것이라고 한다. 왕비인 노국대장 공주와 공민왕이 마주 앉아 있고 복식은 고려 시대의 것을 충실히 반영했다. 하지만 용안을 간략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에 진짜 공민왕의 용안을 충실히 묘사 했는지 확실 하지 않다. 
 
한편 현전하지 않지만 한국전쟁 당시까지 화장사에 소장되었던 공민왕의 어진으로 알려진 초상화가 사진으로 남아있다. 일제시대 때 촬영한 사진으로 흑백사진인데다 초상화 자체가 주름지고 훼손되어 있어 명확히 모습을 알아보긴 힘들지만 고려시대의 복식이나 왕의 옥좌로 보이는 배경등을 미루어 볼 때 초상화의 주인이 공민왕일 가능성을 높아 보인다. 이 초상화와 함께 다른 초상화 2축이 더 있었는데 조선 정종(공정대왕) 내외의 초상화라는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사에 있던 초상화 3점은 검증을 위해 왕궁으로 옮겨 왔는데 당시 남아있던 정종의 젊은 시절 어진과 비교해 보았지만 명확히 판단을 내릴 수 없어 결국 3점의 그림은 화장사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화장사에 보관되어져 오다가 6.25 이후 행방이 묘연한데 화장사가 폭격으로 불타버렸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소실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공민왕1.jpggonminwang2.jpg
            종묘에 봉안 된었던 공민왕 어진                          화장사에 전해지던 공민왕 어진
 
 
 

3.조선
 
우리나라 어진의 수난사는 조선 시대에도 계속된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전기의 어진은 대부분 소실되고 태조, 문종, 세조, 덕종(추존왕 성종의 아버지)의 것만 남았다. 그나마도 문종의 어진은  이 후 난리통에 소실되었고, 일제시대 때까지 남아 있던 어진은 태조, 세조, 덕종, 원종(추존왕 인조의 아버지),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추존왕 헌종의 아버지),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 뿐이었다. 27명의 임금과 9명의 추존왕(도조, 익조, 목조, 환조, 덕종, 원종, 진종, 장조, 익종)의 숫자에 비교해 보면 남아 있는 어진이 정말 적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모두 모으면 46축이나 되는 양이었고, 조선 후기 임금들의 어진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어진은 또 한번 모진 풍파를 견뎌내야 했다.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정부는 어진을 비롯한 문화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대로 인민군 치하에 방치되고 만다. 천만 다행히 6.25 초기 혼란 속에서도 어진들은 무사했고, 정부는  서울 수복 후 왕실 유물들을 임시 수도였던 부산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진은 무사히 후방으로 옮겨졌다. 옮겨진 어진들은 부산 관재청에 보관되어지게 된다. 그러나 보관장소 바로 옆이 약품창고였고, 당시 용두동 일대는 피란민들이 지은 판자촌까지 빼곡이 들어서 있었다. 언제든 화재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지만 용케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정부에서는 유물들을 다시 서울로 옮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001.jpg
                                        부산 용두동 대화재 1954년 12월 10
 
그러나 전쟁이 끝난 다음해 1954년 12월 10일 대참사가 벌어진다. 식모살이 하던 안모 여인이 촛불을 켜놓고 자다가 그만 불이 옮겨 붙어 대형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따닥따닥 붙어 있던 판자촌은 그대로 장작더미 역할을 해주었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은 불이 삽시간에 퍼지게 만들어 버렸다. 인근에 있던 관재청에도 불이 옮겨 붙었는데 이 위급한 상황에서 문화재청과 문교부 관리들은 서로 창고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바람에 유물을 재빨리 대피 시키지 못했다. 이 화재로 3400여점의 귀중한 유물이 불타버렸고 겨우 546점의 유물만 건져 낼 수 있었다. 왕실 유물이었기 때문에 일제시대 때도 함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도록 해서 사진이 남아 있는 유물도 거의 없어 더욱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어진도 이 화재로 인해 대부분 소실 되었고, 화마에서 살아 남은 어진은 용안이 타버린 태조, 순조, 익종 어진과 용안이 남아 있으나 신원을 알 수 없는 어진 2축, 그리고 용안이 남아있고 신원도 확인 가능한 영조, 철종, 고종의 어진 뿐이었다. 결국 현전하는 어진은 부산 대화재의 화마에서 살아 남은 어진들과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의 어진 뿐이다. 왕실에서 그려진 정식 어진 외에 왕실 족보인 선원보감에 몇몇 왕들의 초상화가 남아있는데 간략하게 표현된 세조, 원종, 정조, 순조, 헌종, 철종 초상화가 남아 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어진들과 비교해보면 과연 무엇을 보고 그린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닮지 않았다. 그 외에 사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세조의 어진이 한점 남아 있지만 이 역시도 퀄리티는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ㄱ. 태조 이성계
 
조선의 창업자 답게 많은 어진을 남겼었다고 한다. 신숙주의 기록에 보면 26축의 어진이 있었고, 기마상도 있었다고 한다. 본인의 어진뿐 아니라 아버지 이자춘(환조)의 어진까지 남겼었다고 하니 태조는 어진 그리는 것을 상당히 즐겼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새로운 창업 군주로서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전국 곳곳에 어진을 봉안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었을 것이다. 태조의 어진은 수도 한양 외에 함흥, 경성, 전주 등에 봉안되었다. 그러나 600년 세월을 견뎌낸 온전한 어진은 한점 뿐이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되었던 어진만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부산 화재에서 건져낸 어진은 용안이 타버렸으나 전체적인 복식이나 배경을 볼 때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을 모사한 것으로 보이므로 이를 바탕으로 복원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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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                            용안이 타버린 태조 어진               전주 경기전 어진을 바탕으로 복원한 어진 
 
한편 함흥 준원전에는 전주 경기전의 어진보다 젊은 시절의 태조의 모습을 그린 어진이 남아 있었는데 이 어진을 촬영한 사진이 전해진다. 일제시대 때 촬영한 이 사진은 태조의 젊은 시절을 추측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당시만 해도 어진을 감히 촬영 하는 것은 불경한 행동으로 여겨 졌는데 이 사진을 촬영한 일본 순사도 태조 사진을 촬영하려다 주민들에게 물리적 언어적 저항을 받았고 간신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당시에 일본 순사가 저지른 불경한 행동 덕분에 귀중한 자료가 남은 것이다. 또한 이 때만 하더라도 태조가 사용하였던 활이 같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명궁으로 전해지는 태조의 기상을 엿 볼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었다. 그러나 함흥 준원전은 6.25 때 폭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아마도 이 때 어진과 다른 유물들도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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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흥 준원전에 봉안되었던 태조 어진                  함흥 준원전 태조 어진 확대             태조가 사용하였다고 전해지는 어궁구(御弓具)
 
ㄴ. 세조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고 왕위에 오른 비정한 숙부로 기억되는 세조는 죽어서도 벌을 받았는지 그의 어진은 모진 수난을 겪었다. 아마 세조의 어진보다 더 고생을 한 어진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세조의 어진이 다른 어진과 다르게 임진왜란에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왕궁 밖에서 보관되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주 봉선사 숭은전 봉안 되어 있었는데 왜군이 쳐들어 오자 이 절의 승려들과 당시 능참봉이 었던 이이첨이 빼돌려 화를 모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세조의 어진은 임진왜란에서 살아 남은 몇 안되는 어진이었으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조정에서는 세조의 어진을 강화도(강도)에 봉안한다. 강화도가 천연의 요새이므로 안전하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화도 수비의 책임자였던 김경징의 안일한 대처로 강화도가 점령 당하며 세조의 어진은 또 다시 위기에 처한다. 후금군이 쳐들어오자 강화도는 대 혼란에 빠졌으며 목매어 자결하는 사람, 도망치는 사람, 후금군의 노략질 등으로 난리통이 된다. 이 난리 속에서 세조의 어진은 그만 행방불명이 된다. 그러나 천운 이었는지 세조의 어진은 성 밖에서 발견 되었고, 다시한번 위기에서 구해진다.
 
이 후 세조의 어진은 모진 세월을 견디어 내다가 궁궐에 봉안되게 되는데 영조 때에 가서야 이모가 이루어 진다. 사실 어진은 원본을 계속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 어진이 상하게 되면 정밀하게 이모한 다음 기존 어진은 태워 지난 세월의 풍파를 씻어 내는 의식을 치룬다. 그러나 세조의 어진은 난리통 속에 이리 저리 옮겨지면서 훼손 당해 그림을 온전하게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여서 감히 이모를 시도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더 이상 방치 할 수 없다고 생각 되었는지 이모 할 것을 명하였고, 당시의 화공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세조의 어진은 되살아 나게 된다. 어진을 이모하던 중 영조는 세조의 어진이 백피화(白皮靴)를 신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신기해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세조 어진의 사진을 잘 보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세조 어진은 일제시대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결국 한줌의 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다만 1936년 김은호 화백이 세조 어진을 이모 작업하는 사진이 남아 있는데 어진을 찍으려는 의도가 아니였으므로 흐릿하게 뒤쪽에 찍혀 있어 어진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1965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에 김은호 화백이 인터뷰 하면서 수염이 아직 그려지지 않은 세조 어진 밑그림(초본)을 공개했다는 사실이 한 누리꾼에 의해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는 이 초본의 행방조차 묘연한 상태이다. 흐릿한 초본이긴 하지만 그래도 세조의 용안을 조금이나마 짐작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겠다.
 
010.jpg 011.jpg어진_S~1.PNG
 김은호 화백이 세조 어진을 이모하는 장면    백피화(白皮靴)를 신은 세조의 모습이 보인다.   1965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초본
 
세조는 선원보감에 실린 초상과 합천 해인사에 전해지는 어진도 남아 있는데 선원 보감에 그려진 초상화는 매우 간략하게 그려져 있고, 해인사 어진은 1458년 중추원 윤사로와 승정원 도승지 조석문 등이 세조 임금의 어진을 조성하여 해인사 금탑전에 봉안한 작품이다. 적 색체와 함께 민간에서 그린 것이라는 한계가 있어 온전히 세조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래도 합천 해인사의 어진의 경우 당대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할만 하다. 또한 김은호 화백의 증언에 의하면 세조의 어진은 수염이 설기설기 나있었다고 하는데 해인사 어진도 수염이 적은 것으로 미루어 나름 신뢰가 갈만한 부분이다. 한편 세조 종친회에서 복원한 세조 어진도 있는데 제대로 고증하고 만든 것인지 의문이 든다. 백피화도 반영 되지 않았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남아있는 자료들과 비교 할 때 너무 달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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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보감에 실린 세조의 모습                        합천 해인사 소장 세조 어진                      세조 종친회에서 복원한 세조 어진
 
ㄷ. 원종(정원군)
 
전해지는 어진은 없고 선원보감의 초상화만 남아 있는것으로 여겨 졌으나 최근에 그의 어진일 확률이 높은 초상화가 공개되었다. 용두동 대화재 때 살아 남은 신원 미상의 어진 2축 중 하나로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2축의 어진중 사모복을 입은 어진이 기록과 어진 양식으로 미루어 볼 때 원종의 어진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비록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잠저에서만 살았던 추존왕의 어진이기 때문에 왕의 복식을 갖추지는 못했었도 17세기 초 왕자의 복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용안이 알려지지 않은 선조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다. 과연 원종은 선조와 공빈 중 누구를 더 닮았을지 궁금한 대목이다.
 
이 어진의 신원이 오랫동안 불명확 했던 이유는 어진이 오른쪽에서 부터 타들어 갔기 때문이다. 어진의 오른쪽 위 상단에 어진의 신원을 적어놓은 글이 있는데 이 부분이 타버린 것이다. 용안이 타버린 어진들은 왼쪽에서 부터 타들어가 용안은 남아있진 않지만 오른쪽 위의 글은 남아 있어서 신원 확인이 가능했다. 반대로 오른쪽에서 타들어간 2점의 어진은 오랫동안 신원 확인이 불가능 했던 것이다. .
 
원종은 본래의 군호는 정원군인데 아들인 능양군이 반정을 통해 왕(인조)위에 오른뒤에 추존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좋은 인품을 지닌 듯 한데 사실은 성격이 개차반이 었다고 한다. 선조의 아들 중에서 막장 3형제로 일컬어지는 3인(나머지 둘은 임해군과 순화군) 중 한명이다. 아마도 왕위에 오른 인조가 자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아버지인 정원군을 좋게 기록했을 것이다. 본래 왕의 아버지로서 보위에 오르지 못한 경우 대원군으로 봉해지는데 처음에는 정원군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나약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함에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한다. 더구나 그 시기는 병자호란 1년 전 이었다. 국방에 힘을 쏟아도 모자랄 때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고자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행동을 밀어 붙인것이다. 역시 여러가지로 민폐 대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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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종으로 추정되는 어진                                        선원보감에 실린 세조의 모습              
 
ㄹ. 영조
 
영조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왕으로 기가 매우 강해 고집 스럽고 다혈질이었다고 한다. 그의 강한기가 영향을 끼쳤는지  용두동 대화재에서 51세 때 그렸다는 영조의 어진만은 비교적 온전히 살아 남았다. 뿐만 아니라 왕위에 오르기 전인 21세 때 연잉군 시절의 어진까지도 살아 남았다. 특히 연잉군 시절 어진은 현전하는 유일한 원본 어진이다. 다른 어진들은 모두 원본을 이모하거나 이모본을 다시 이모한 것이다.
 
사진이 남아 있는 고종과 순종을 제외하고 조선왕조에서 두개의 온전한 어진이 전해지는 유일한 왕이다. 젊은 시절과 초로에 접어든 어진을 비교해 보면 30년의 세월동안 영조가 어떻게 늙어 갔는지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의 매부리코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오똑 서있고 왕위에 올라서 자신감이 올라갔는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얼굴에 붉은 빛 화색이 돌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어진 그리는 것을 상당히 좋아 했던 것 같다. 자주 어진을 그렸으며 부산 용두동 대화재 직전까지 6개의 어진이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 중 2개의 어진이 살아 남은 것이다. 51세 때 홍룡포를 입고 그린 어진에 매우 만족해 했다고 하며 이 후 재위에 오른지 10년 째 되는 해마다 어진을 그렸다고 한다. 아마 51세 때 어진을 그리면서 영조는 한 번 정도 더 어진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 했을것이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3번을 더 그릴지는 본인도 몰랐을 것 이다. 82세까지 살았고 재위에만 52년을 있었으니 여러 어진을 남 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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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잉군 시절 영조 어진                                  51세 때 영조 어진                      영조와 모습이 비슷하다고 회자된 이순재
 
ㅁ. 정조
 
정조는 사도세자의 사후 세손으로서 왕위를 이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정조는 지극 정성으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셨고 아버지를 추존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조선의 마지막 르네상스기라 볼 수 있는 정조 시기에는 뛰어난 화가인 김홍도가 활동하던 시기로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 화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홍도가 그렸을 정조의 어진은 용두동 대화재 때 완전히 타버렸고, 선원보감에 실려있는 초상화로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선원보감의 초상은 워낙 조악해서 얼마나 정조의 얼굴을 얼마나 제대로 표현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정조의 어진이 다시금 나타날 확률이 있는데 일제시대 때인 1920년 수원 화성 화령전에 모셔져 있던 구군복 차림의 어진을 창덕궁으로 옮기던 중 분실 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딘가 남아 있다면 언젠가는 발견 될지도 모른다.(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하다. 일부 글들에서 보이기는 하나 확실한 사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외에 정부가 정한 표준영정도 있으며, 현재 수원 화령전에 봉안된 어진도 표준 영정을 바탕으로1989년에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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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보감에 실린 정조의 모습              수원 화성 화령전의 정조 어진 (1989년 作)                  정조 대왕 표준 영정
 
ㅂ. 순조
 
정조의 장성한 유일한 아들이자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는 재위 내내 병약한 몸으로 세도가문 권력다툼, 홍경래의 난, 천주교 박해 등 모진 풍파를 겪어야 했다. 말년에는 유일한 아들인 효명세자(익종)가 급사함했다. 이후 혼자 남겨질 어린 손자(헌종)를 걱정하다 병이 더 깊어졌고 결국 아들이 죽은지 2년 후에 붕어한 비운의 왕이다. 순조가 승하할 당시 헌종의 나이는 겨우 8살이 었다니 순조가 편히 눈을 감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우 외환의 시기를 겪은 불우한 왕은 죽어서도 운이 없었는지 그의 어진은 부산 용두동 대화재 때 용안이 홀랑 타버렸다. 겨우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구레나룻 정도이다. 선원보감에도 순조의 초상화가 남아 있기는 하나 어디 까지 믿어야 할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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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안이 타버린 순조 어진                                 선원보감에 실린 순조의 모습
 
ㅅ. 익종(문조, 효명세자)
 
21세에 사망한 비운의 세자이다. 아버지 순조가 병약하였기 때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처가인 풍양 조씨 가문과 외가인 안동 김씨를 서로 견제하게 하고, 새로이 단행한 인사에서 안동 김씨를 배제하는 등 세도정치를 일신해 보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젊고 활기찬 성격에 의욕적인 움직임 거기다 후사를 이을 아들까지 젊은 나이에 얻었으므로 탄탄대로를 열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가 조선에 희망을 던져 준 기간이 너무 짧았다. 병든 아버지와 어린아들만은 남기고 21세의 나이에 급서 하면서 조선의 세도 정치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결국 2년여 뒤에 순조도 붕어하고 8세의 나이로 어린 아들이 왕(헌종)위에 오른다. 헌종은 왕위에 오른 뒤 할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위치한 효명세자를 문조(文祖)로 추존 한다. 이 후 대한제국이 성립된 뒤 그의 시호는 익종으로 고쳐져 익종황제로 추존된다. 그러므로 효명세자, 문조, 익종은 모두 그를 가르키는 말이므로 헛갈리지 말자. 그의 불행은 어진에도 이어졌는지 용두동 대 화재 때 용안이 다 타버렷다. 그래도 눈썹은 남았으니 구레나룻만 남은 아버지보다는 조금 나은셈이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익종의 용안 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던 당시의 암담한 조선의 미래가 어진에 투영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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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안이 타버린 익종 어진                    권오창 화백이 복원한 익종 어진                   선원보감에 실린 익종의 모습
 
ㅇ. 헌종

조선왕조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보위에 이른 임금이다. 겨우 8세 때 보위에 올랐기 때문에 대리청정이 행해졌다. 세도정치의 폐해가 들 끓고 이양선이 출몰했으며 안으로는 천주교 박해가 이어졌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것도 헌종때의 일이다. 15년의 재위 기간 동안 특기할 만한 치적을 찾기 힘들다. 8세에 보위에 올라 22세 때 사망했으므로 나이가 차서 뭘 좀 해봐야지 할만 할 때 붕어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헌종이 죽음으로서 효종의 직계 혈통은 끊기게 되고 방계 혈통으로 왕위가 넘어가는데 7촌 아재뻘인 철종이 뒤를 이었다. 삼촌이 조카의 제사를 지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 졌으나 당시 8촌 이내의 왕족 남자라고는 철종이 유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 왕위를 잇는 고종의 무려 17촌이다. 그만큼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왕손이 귀했다.

상당한 미남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타깝게도 정식 어진이 전해지지 않는다. 용두동 대화재 때 홀라 다 타버렸가 때문이다. 선원보감에 실린 초상화만으로 그의 아름다움 외모를 추측 할 수 밖에 없는데 참 초상화가 난감하게 생겼다. 분명 22세에 붕어한 왕인데 40은 넘어보이게 그려져 있다. 외모가 뛰어 나서 궁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하며 궁녀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카사노바 기질보다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더욱 눈에 띄는데 경빈 김씨를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본래 왕비 간택에서 최종 후보였으나 왕비가 되지 못했던 것을 기어코 후궁으로 들였다. 경빈 김씨를 위해 낙선재를 짓고 경빈 김씨가 듣게 일부로 큰소리로 경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헌종이 급사 하면서 경빈 김씨는  죽을 때 까지 청상과부 생활을 58년 이나 해야 했으니 참으로 비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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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보감에 실린 헌종의 모습

ㅈ. 철종
 
용두동 대화재 당시 영조와 함께 용안이 보존된 왕이다. 철종은 태어 날 때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남자들이 반역에 연루되거나 비명횡사 하는 등 계속 죽어나가는 바람에 효종 이후의 혈통 중 유일하게 생존한 상태라 다른 대안이 없었다.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연명하던 철종은 모두가 바라는 왕위에 앉았지만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던 시절이라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진주민란 등 대규모 민란이 연이어 터지고 삼정의 폐해가 곪아 터지는 아수라판만 그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강화도령 시절 사랑하던 양순이란 처자가 있었는데 그녀를 못 잊어 상사병에 시달리는 철종을 본 왕실에서는 양순을 독살하고 만다. 이를 알게된 철종은 실의에 빠져 주색에 빠져 허송 세월만 보내다 13년만에 붕어한다. 고자는 아니었던듯 하다. 자그만치 자식이 5남 6녀이다. 하지만 딸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이 장성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나마도 남은 딸 하나도 결혼하고 얼마안되 죽었다. 여러모로 안습한 왕일 수 밖에 없다.
 
철종의 기구한 운명이 불쌍해서 인지 화마 속에서도 그의 용안은 살아 남았다. 입 주변이 조금 타긴 했으나 전체적인 얼굴 윤곽이 남아 있어 복원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선원보감에도 초상이 남아 있는데 어진과 선원보감의 초상을 제대로 비교할 수 있는 경우이다. 비교해 보면 알겠지만 선원보감에 대한 신뢰도가 여지 없이 추락한다. 최근에는 철종의 사진이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사진이 발명된 시기로 미루어 볼 때 철종의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이 불가능 하지는 않지만 쇄국 정책 중인 조선에 그것도 왕실에서 사진을 찍었다는게 믿어 지지 않는 다는 의견이 많다. 심지어 사진 속의 인물은 고종을 빼닮아서 고종의 사진을 잘 못 알고 알린 오보가 아닌가 생각된다. 궁금 하다면 검색을 통해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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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재로 손상된 철종 어진                                  복원된 철종 어진                             선원보감에 실린 철종의 모습
 
ㅊ. 고종

고종부터는 사진이 남아 있어 용안을 파악 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더구나 기존 왕들과 달리 어진을 화사한 화가가 밑그림을 가지고 갈 수 있어서인지 복사본도 많이 만들어 졌다. 고종의 어진은 황제가 입는 황룡포를 입고 있는데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뒤쪽 배경에 휘장이 쳐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기존의 어진과 달리 서양 화법이 적극 도입 되었으며, 전통적인 어진이 아닌 유화로 그린 어진도 남아 있다. 최근에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진이 발견 되기도 했는데 나름 멋쟁이 였던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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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천관을 쓴 고종 어진                                    황룡포를 입은 고종 어진                          휴버트 보스가 그린 유화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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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웰이 촬영한 고종의 모습                                                              선글라스를 착용한 고종
 
ㅋ. 순종
대한제국 2대 황제이자 조선왕조 마지막 군주이다. 그러나 그가 제위에 오른건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한 아버지 고종의 자리를 매꾸기 위해서 였을 뿐 실권 없는 황제였다. 비운의 황제여서 그런지 그의 어진은 부산에서 화마에 사라졌다. 물론 사진이 남아 있으므로 그의 용안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또한 어진 화사 당시 밑 그림이 남아 있다. 순종의 어진은 순종이 붕어한 이 후에 화사되었는데 신식 군복을 입은 사진을 보고 어진을 그린 것이다. 김은호 화백이 어진을 화사하고 있는 사진을 잘 보면 뒤에 순종의 사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복장은 전통적인 곤룡포로 바뀌었다. 선원전에 봉안 하기 위해서는 신식 군복 차림 대신 곤룡포 차림의 어진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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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식 군복 차림의 순종 사진                                         순종 사진을 보고 그린 밑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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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호 화백의 순종 어진 화사 장면                    사진으로 남아 있는 순종 어진                               고종과 순종 사진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는 어진 이야기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잦은 외침과 전쟁의 역사 속에 많은 어진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 어진에 대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 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장문의 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혹시 잘못된 내용이나 더 알고 계신 내용이 있으시면 제보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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