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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3부 끝은 어디인가 - 1. 재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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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5
조회수 : 66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28 14: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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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종군정(十五從軍征) 팔십시득귀(八十始得歸)
열다섯 살에 군인으로 전쟁터에 나가 여든살이 되어 비로소 돌아올수 있게 되었다.
  
도봉향리인(道逢鄕里人) 가중유가수(家中有呵誰)
오는 길에 고향가람을 만났기에 내집에는 누가 살고있는지 물어보았다.
  
원망시군가(遠望是君家) 송백가류류(松栢家留留)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자기 집인데 이제는 소나무와 잣나무 우거진 무덤만 줄지어 있을 뿐일세.
  
토종구두입(兎從拘頭入) 치종양상비(稚種梁上飛)
가보니 산토끼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했고, 꿩은 들보에서 무심히 날아가고 있었다.

중정생여곡(中庭生旅穀) 정상생여규(井上生旅葵)
안마당에는 잡곡이 우거졌고, 낡은 우물 근방에는 아욱이 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팽곡지작반(烹穀持作飯) 채규지작갱(採奎持作羹)
그 잡곡을 익혀 밥을 짓고, 그 들풀을 뜯어 찌개를 만들었다.

갱반일시열(羹飯一時熱) 부지이아수(不知貽阿誰)
밥과 찌개는 즉시 함께 익었지만, 누구에게 이것을 먹으라 해야할까,

출문동향망(出門東向望) 누낙첨아의(淚落沾我衣)
문밖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그저 눈물만 흘려 내옷을 적셨다.

3부 끝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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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쯧.  토끼나 꿩이라도 잡아 드시지...

1. 짧은 휴전
"북계의 시내와 강에 얼음이 두껍게 얼어 두께가 4, 5척이나 되는데, 갑자기 갈라져 흘러 내려가니, 부로들이 오랑캐 군사가 경계 안에 들어올 징조라 하였다" - 1245년

최이(최우)의 막장 행각은 계속됐습니다. 자기 집을 꾸미기 위해 육지에서 잣나무와 소나무를 계속 운반하고, 하다못해 얼음까지도 운반하게 했죠 -_-; 남의 참소만 듣고, 혹은 자기에게 맘에 들지 않으면 강이나 바다에 던져버리는 짓거리도 계속됐구요. 이 중 김경손도 모함을 받긴 했지만 그에게까지 벌을 줄 순 없어서 다행히 넘어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육지를 복구할 생각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각 도에 권농별감을 보냈는데, 말 그대로 농사를 권장하는 직책이었죠. 하지만 실상은 세금을 더 원활하게 거두기 위한 것이었고 기존의 방호별감이랑 다를 게 없어서 폐지됩니다. 

그 아들 만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훤(박문수)가 얘기하기도 하고, 송국첨도 그들이 하는 사채를 막아보기도 했고, 김지대의 경우 아예 만전의 수하를 강물에 던져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건 만전의 이 한방으로 해결됩니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에도 이같이 압박을 당하니, 만약 돌아가신 후에는 우리 형제는 죽을 곳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꼴에 아비라서 그런 건지, 이런 것을 통해 뭔가 (삥 뜯는?) 능력을 본 건지 최이는 그를 환속시켜 자기 후계로 삼습니다. 그는 속세에 돌아오자마자 상장군에 오르니 바로 최항입니다.

3차 침공이 끝나고 몽고군이 물러간 지 어언 8년, 결국 그 동안 최이가 한 것이라고는 자기 집 꾸미기랑 자기 후계 만든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 동안 육지의 상황은 처참하게 돌아가고 있었죠. 5년 동안의 피해는 그리 쉽게 복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금은 내야 했고, 최이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에 계속 동원돼야 했죠. 이런 상황에서 1246년에는 이런 일까지 벌어집니다.

"독충이 비처럼 떨어졌다. 그 벌레는 몸이 가는 그물에 싸여 있는데 쪼개면 흰 털을 베는 것 같고, 음식에 딸려 사람의 뱃속에 들어가거나, 혹은 피부를 물면 사람이 곧 죽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식인충이라고 불렀다. 약을 써도 죽지 않았으나 파즙을 바르면 곧 죽었다"

대체 어떤 놈이었는지 몰라도 타이밍은 참 잘 잡은 것 같습니다. -_-

그렇게 1247년이 밝았습니다. 이 때 몽고에 항복한 동진에서 50명이 고려에 귀순해 오기도 했지만 그저 (이제는 괴뢰국이 된) 동진과의 대립을 낳을 뿐이었죠. 최이는 이 해 만전을 환속시킵니다. 그리고, 전 해에 칸이 된 구유크 칸은 마침내 고려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2. 재침
폐허가 된 서북 지방에는 심심하면 몽고군이 쳐들어와 수달을 잡아가는 등 약탈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고려 조정에서도 이들을 막을 수 없었죠. 이 해에도 400여 명의 병력이 들어왔죠.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습니다. 그들은 황해도 수안까지 둘러보며 정찰을 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3차 침공은 몽고가 때리다 때리다 지쳐 돌아간 케이스입니다. 아무리 좁아도 거친 편인 바다를 건널 순 없었고, 아무리 육지에서 깽판을 쳐도 고려왕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느꼈죠. 그렇다고 고려 전체를 불태우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유목민, 기마병이 아무리 기동력이 우세해도 대군이 움직이려면 보급이 필요했습니다. 몽고군은 대규모의 말과 양 들을 이끌고 다니며 보급했죠. 하지만 이 가축들을 충분히 먹일 수 없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보면 금나라는 쌀을 먹고 전쟁 때마다 그 쌀을 운반해야 되니 초원으로 올라올 수 없다는 내용이 (약간 비웃는 듯이, 혹은 몽골의 유리함을 자랑하는 듯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죠. 초원이 아닌 곳에서는 전투력은 둘째 치고 천하의 몽고군도 보급 능력이 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 뭔가 신기한 사실 하나 더 붙이자면, 고기를 잘 먹고 못 먹고를 잘 살고 못 살고로 따지는데... 이것도 환경의 영향이 큽니다. 유럽의 경우 목축을 하기 좋아서 고기가 구황 식품 취급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 그래서 상류층은 하늘과 가까운 것들을 먹고 하류층은 땅을 걸어다니는 것들을 먹었다 이런 말도 있죠. 

대군을 몰고 들어오기도 힘든 상황, 대군을 몰아치더라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눈 앞에 보이는 성들을 다 깨뜨리지 않는 이상 고려 전체를 먹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고려에 온 신경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서쪽의 바투 등과는 결별하다시피 했고, 남송과의 전면전도 시작돼 버렸으니까요. 

그렇다고 항복한다 해놓고 제대로 공물도 바치지 않고 입조도 안 하는 고려를 그냥 둘 수도 없었습니다. 짧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이번에 대장을 맡은 자는 아무간(야무칸), 그는 구유크 칸의 명령을 기다리며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명령이 떨어지자 실행에 옮기죠.

3. 왕은 나오라
"우리 나라는 몽고와 화의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별달리 경계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도피하여 숨어 있던 자까지도 모두 쫓기고 노략질을 당하여 화를 면한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하였다"

그는 별 목표 없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게릴라전에 휘말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앞만 보고 진격한 것도 아니었죠. 압록강에서 서해도(황해도)에 이르기까지 숨어 있는 성을 하나하나 공격하며 남아 있는 고려인들을 처리한 것입니다. 결국 몇 년 동안의 평화로 조금이나마 살 만 했던 사람들은 다시 섬이나 다른 지방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 그렇게 몇 차례 계속 밟히면서도 사람이 계속 살았다니 참......

이 과정에서 이후 궂은 일을 도맡아 한 김방경이 등장합니다만 다음 편으로 미루겠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진격한 아모간은 마침내 황해도 연안에 도착합니다. 이제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넓은 바다였죠.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몽고군이 거기까지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조정에는 큰 충격이었죠.

조정에서는 바로 사신을 보내 몽고군을 호궤합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죠. 철수하면 공물을 성실히 납부하고 입조하겠다는 것, 아모간은 고종이 직접 나오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또 대립하다가 이번엔 강화도 맞은편 갑곶진으로 장소를 바꿉니다. 고려에서는 다시 신안공 왕전이라는 카드를 내밉나다만, 결국 결렬됩니다.

고려가 계속 버티는 걸 본 아모간은 별 미련 없이 후퇴합니다. 어차피 해전 준비가 안 돼 있었으니 더 이상 방법이 없었고, 더 밀고 나가봤자 3차 침공 때와 같은 결과를 낳을 뿐이었죠. 그가 이끈 병력도 그리 많진 않았던 모양이고, 고려 조정을 직접 타겟으로 삼아서 병력을 분산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피해가 적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로 인해 청천강 북쪽은 확실히 몽고군의 손에 떨어집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계 지방 전체가 몽고의 전진기지화 됐죠. 굳이 압록강을 건널 필요가 없었고, 몇 차 몇 차를 나눌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매년 크고 작은 규모가 들어왔다 나갔다 합니다. 고려가 완전히 무릎 끓을 때까지 말이죠.

아모간은 우선 청천강 북쪽으로 철수합니다. 하지만 흔히 4차 침공이라 정의하는 이 전쟁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해에도 그는 쳐들어 왔고, 다행히 이번에는 섬으로 도망쳐서 피해도 그리 크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끝낸 것은 고려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데서 왔죠.

한편 아모간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최이는 아들 최항을 추밀원지주사로 삼습니다.

최이가 죽을 날도 그리 멀지 않은 상황, 3대 세습이 슬슬 굳혀지고 있었죠.
출처 pgr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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