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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그리고 그 이후, 부활
게시물ID : religion_104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까도
추천 : 2/6
조회수 : 505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2/12/04 21:27:11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언제나 삶과의 연관 속에서 다루어 집니다.

 비신앙인들의 삶은 죽음을 햘해 가능 삶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저 모든것의 마지막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삶과 죽음을 상호적 관계로 봅니다.

 죽음 이후에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죽음은 현재의 삶을

정리하고 부활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는것 입니다.

또한 성경은 삶을 죽음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미래의 희망과 연결 되는것으로 봅니다.

죽음은 인간을 유한하게 만들지만 그 유한성은 미래의 희망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현재의 유한성에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신앙인들에게 노력, 성취, 고통과 슬픔마저도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현재의 시간을 유한하게 함으로 오히려 현재적

삶에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두 개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세상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체로서 사는 영원한 삶입니다.

 이 두개의 사이에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과정이자 통과해야만 하는 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개의 삶 모두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만 중시해서도 안되고 또 현재의 삶을 무시하는 것도 안됩니다.

 

신자들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 해 보고 죽음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의 현재적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영과 육의 분리로 보는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영과 육의 분리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의 기자들은 영과 육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지만

신약의 영과 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할때, 영은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을 지칭하고 육은 인간의 연약한

부분을 지칭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톶전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봅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닌

전 인격체로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인간의 영과 육의 분리로 보는것은 좋은 시각이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을 향한 과정입니다. 인간은 전인으로서 이과정을 통과 하고 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죽음면 그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인 영혼이 분리되어 남는것이 아니고

그 인간 전체를 대표하는 인격성으로서 하나님에게 갑니다.

 

죽으면 영과 육이 분리 되는것이 아닌, 죽으면 그 인간 전체가 죽음이라는 변화를 겪습니다.

 

우리는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49

죽은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삻아 나며 고전 15:42

 

죽음자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죽음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죽음자의 하나님이기도 하기때문입니다.

죽음이란 부활의 세계를 향한 하난의 과정입니다.

 

이어서 죽음과 밀접한 부활, 그리고 그 역사성에 대해 한번 말해 볼까 합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내세에 대한 믿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대한 소망도 없고

우리의 모든 가치는 이 세상에 종속 될 것입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신앙의 근거를 잃어 버립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 라고 말합니다. 에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교리 중 하나가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자 근원 입니다.

 

 

기독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기독교를 공격할때에 예수님의 부활을 중요한 주제로 삼습니다.

예수님의 부홣을 역사적 범주에서 다루는것이 좋다고 생각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역사성에대해 많은 질문이 있고 교인들 또한 이런 질문에 회피할수 없습니다.

 

부활과 역사라는 말은 함께 다루기 힘든 개념입니다.

학문은 각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에 맞게 언어과 진술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과학의 진술방법을 통해야만 가장 잘 전달할수 있습니다. 만약 과학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설명도 어렵고 전달도 불가능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교적이고 믿음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자들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만 만난것이 아니라 부활에 담긴 놀라운 의미도 함께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술의 방법도 단일하지 않고 역사적 진술과 종교적 진술이 섞여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 교과서가 아니기때문에 역사 기록의 원칙에 따라 기술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만 다룰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기록의 한계입니다.

부활사건은 역사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역사학은 사료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역사적 자료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료가 신앙고백과 같은 초월적 성격을 갖거나 편향된 그룹에서 진술된것이라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지

의심합니다.

 

부활은 역사적이며 또한 역사를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역사속에 일어났지만 동시에 역사를

넘어서는 종교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는 결코 역사적 접근으로만 다 포착하지 못하는 놀라운 의미가 있다는것을 지적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차원으로 환원하면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건은 역사적으로 이해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점에 대해 충분히 동의 한다면 부활에 대한 의미는 남겨둔 후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부활의 역사성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성경의 자료을 통한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부활에 대한 기록은 검토하고 그 기록이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료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하려는것이 아닌 부활을 얼마나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는지에 집중

해 보겠습니다.

 

우선 역사에대한 기본적인 규정을 해보겠습니다. 역사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여준

트뢸치가 제시한 세 가지 원칙을 적용할 것입니다.

 

첫째는 개연성입니다. 역사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 가선에 대해 이럴것 이라는

개연성을 가집니다. 역사적 사실은 개연성을 갖는것이지 어떤 역사가도 특정 사건을 절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둘때는 유비 입니다. 정말 어떤 범주에도 들 수 없는 사건을 대할때 어떤것과도 유비가 되지 않는

것을 대할때 우리는 그것을 평가하고 분석할수 없습니다.

 

세번째는 상호 연관입니다. 역사의 모든 사건은 다른사건들과 연관되어 있고 상호 영향을 줍니다.

즉 어떤 사건은 반드시 그 이전의 사건에 영향을 받아서 출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활을 세 원칙중 상호 연관에 비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 밖에서 역사성을 의심하는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교회의 출현은 의심치 않습니다. 교회가 역사 속에 나타날수 있엇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죽었을때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불과 얼마되지않아 기독교 교회가 갑자기 유대사회에서 발생하여 순식간에

그리스 로마 문화가 지배하던 여러 나라로 확산 되었습니다.

유대교는 현재도 강한 종교적 배타성을 보이며 유대사회 내에서도 다른 종교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 로마 문화는 아주 높은 수준의 문화였습니다.

그것은 자체적인 종교 언어 철학의 체계를 갖고있습니다. 이런 문화권 안에서 전혀 이질적인

새로운 종교가 형성되고 확산 된다는 것은 불가능이었습니다.

 

그와중에 기독교의 출현과 확산은 어떤 사건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당시 유대사회와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정황을 볼때 많은 역사가들이 기독교 교회의

출현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역사학에서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이 원인이 무엇이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없이 기독교의 출현을 설명합니다만 크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저는 그원인이 바로 부활사건이라고 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황응ㄹ 사료의 차원에서 보려고 합니다. 역사학에서 사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료없는 역사기술은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역사가중 일부는 부활기록을 예수니의 추종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는 이유로 사료의

객관성이 없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 두 입장의 차이는 좁혀질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논의 는 신약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에 모아질 것이고 지금까지 그랬던것처럼

 무의미한 대립이 시작 될 것입니다.

 

대신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삶의 사료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동안 제자들은 열성적으로 예수님을 따랏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제자들의 모든 희망과 기대도 끝이 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때

 그 자리에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며칠사이에 제자들에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들을 죽이려는 무리를 피해 숨어살던 제자들은 갑자기 담대히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한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또한 죽는 순간까지 일관되게 증언하는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목숨바쳐 증언한것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에서 제자들이 거짓으로 부활을 꾸며냈다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심지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과 수많은 무리의 목숨"까지 희생하며 거짓증언을 해야할 이유도없는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때 예수님의 면전에서도 그를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죽은 선생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서 부활을 증언할수 있겠습니까?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부활의 증거는 일관되었습니다.

 

이들을 확신으로 이끈것은 무엇이며 이들이순교조차 두려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든지 아무런 감동없이 단지 부활에 대한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직접적인 체험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현재 살안있는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 체험이 그들을

확신으로 이끌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대한 기억만을 갖고 평생 선교를 한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했고

현재 살아서 그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의 현존이며 그의 현재적 능력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현재적으로 동행했고 성령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부활에대한 소망은 오늘 현재의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부활로 인해 현재의 삶은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않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것이 다만 이세상의 삶뿐이면

모든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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