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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퀴어축제와 가부장제의 시선 권력에 관하여
게시물ID : sisa_6005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네스티
추천 : 10
조회수 : 15384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5/06/30 23: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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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능동적인 섹스를 좋아해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참가자가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며 “저는 능동적인 섹스를 좋아해요.”라고 말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심사위원들은 무척 당황할 것이고 그는 진선미로 뽑히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참가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미인대회란 그런 것이다. 미스코리아 참가자들은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 앞에서 수영복을 입고 몸매를 보여줄 정도로 ‘야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절대로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보여주어서는 안 되며, 딱 가부장적인 정서에 부합하는 정도로만, 수영복을 입고 나긋나긋하게 웃을 수 있는 정도로만 야해야 한다.


비키니를 입은 경우도 많지 않다.


송아영 이라는 페미니스트 예술가(활동가)가 있다. 송아영은 작년에 토플리스(topless, 가슴을 드러낸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이슈에 올랐다. 토플리스의 시위의 의의는 남성의 가슴과는 다르게 억압받아온 여성의 가슴을 드러내며 여성의 신체적 자율성을 부각시키는 데 있다.

나는 송아영 활동가를 지지했는데, 개중에는 악플을 달며 그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악플의 내용은 대개 “취지는 알겠는데 왜 꼭 가슴을 드러냈어야 하나”, “선정적이다”, “국민정서에 맞지 않다.”였다.



일부 사람들의 반발을 샀던 토플리스 시위


그런데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모종의 아이러니를 보았다. 같은 포털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올라온 «전효성 가슴 노출», «레이싱걸 화보» 같은 글들은 반응이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 알았다. 가부장적 시선 권력에 익숙한 사람들은 절대 선정적이고 음란한 광경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선정성 그 자체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저항적인 태도가 가미된 선정성”이다.





“감히” 동성애자가 “감히” 선정적 방식으로 “감히” 저항을 하느냐


엊그제 열린 퀴어퍼레이드에 대해, “동성애를 하든 말든 상관없는데 꼭 남들 다 보는 광장에서 선정적인 옷을 입어야 하냐”, “아직 우리 국민 정서에 저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보지풀빵이 뭐냐, 상스럽다.”, “저렇게 상스럽고 선정적인 방식으로 어떻게 일반인들을 이해시킬 수 있겠나” 와 같은 반응을 하는 사람들의 헛소리가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많이 보였다.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우리나라가 이 정도로 선정성을 거부하는 금욕적인 나라인 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던 대한민국이 맞나?

그러니까 지금까지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수십 년간 치뤄온 나라 맞냐는 거다. 여자 아나운서와 여자 승무원에게 ‘업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미모 기준을 가혹하게 적용하던 나라 맞냐고. 또한 국군의 날에 걸그룹이 군인에게 꽃을 달아주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라, 많은 여자 배우들이 연극이나 영화에서 남자 배우의 보조적 장치로만 소비되던 나라 맞냐는거다.




퀴어퍼레이드가 선정적이라 싫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퀴어퍼레이드가 선정적이라 싫어하는 게 아니다. “감히 동성애자가” 길거리에서 활보하며 “저항적인 구호를 외치니까” 싫은 것이다.


가부장적인 시선 권력에 충실한 미스코리아, 걸그룹에 대한 관대함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겠지. 하지만 부정하기엔 당신들이 침묵하고 있는 반례가 너무 많다.

사람들은 미스코리아나 걸그룹, 그리고 ‘걸그룹화된’ 아나운서들에게 관대하다. 그들이 가부장적인 시선 권력에 충실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언제 미스코리아가 남성중심사회를 격렬히 비판한 적이 있던가?

미스코리아 대회 주최 측은 언제나 “우리는 단순히 참가자의 외모만 보는 게 아니라 지성과 교양을 함께 본다.”며 변명하지만, 이는 모두 헛소리이다. 그들이 말하는 지성과 교양이란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얼굴 마담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양과 정숙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성과 교양을 가늠한다는 질문 “만약 8일동안 다른 사람과 인생을 바꿀 기회가 있다면?”, “로또 1등과 미스코리아 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이런 질문을 15초 안에 답하라고 한다.


만약 진짜 똑똑한 여자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참가하여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심사위원들의 행태를 비판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아무리 예쁘게 생겨도 진으로 뽑히지 못할 것이다. 보수 세력이 퀴어퍼레이드를 어떻게든 욕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퀴어퍼레이드에 나온 동성애자들은 미스코리아처럼 특정한 기준에 속박되지 않으며,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퀴어퍼레이드의 의의는 참가자들이 누구의 시선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같이 야한 옷을 입는다 해도 퀴어퍼레이드가 질적으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모습들이 보수 세력에게 얼마나 거슬릴까.



이들은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왜 우리는 성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강요받아야 하는가

논란이 된 보지풀빵에 대해서도 한마디. 난 초중고-대학 모두 공학을 다녀서 주변에 남자 친구들이 많은데, 남자 친구들은 언제나 내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야동을 봤던 이야기나 자위를 했던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난 그들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이 싫어서 늘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곤 했는데, 아마 대부분의 여자들이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반면 초등학교 때 옆반의 어떤 여자애는 수학여행 진실게임 자리에서 자위 경험을 이야기했다가 왕따를 당했다. 이것이 젠더 위계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여자 아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성에 대해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태도를 강요받으며 자란다.

그런 인습을 조금이라도 깨부수자는 게 보지풀빵의 의의다. 대체 여자가 여자 스스로 자신의 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게 뭐 그리 거슬린단 말인가? 남자들이 “남자니까 포르노도 볼 수 있지”라고 말하며 «아시아나 승무원 팬티 도촬» 보는 건 괜찮고, 페미니스트들이 보지풀빵 만들면서 자신의 신체에 대해 말하는 건 보기 싫고?




이것이 정말 그리 큰 문제인가


퀴어퍼레이드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아니다


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은 남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킬 의무가 없다.

만약 퀴어퍼레이드가 일반인들의 시선을 고려해야 한다면, 이 대회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와 크게 다를 바 없어진다. 젊고 예쁘고 나긋나긋하고 적당한 학벌을 가진 여자만이 무대에 서서 아저씨들의 비위를 맞추는 미스코리아대회처럼, 잘생기고 예쁘고 나긋나긋한 동성애자들만 선두에 서서 헤테로들의 비위를 맞추는 대회가 될 것이다.

퀴어퍼레이드는 바로 그런 식의 ‘비위 맞추기’를 거부하는 축제인데, 여기다 대고 “일반인들의 시선을 고려하라”고 충고하다니, 바로 당신같은 사람들 더 불편하라고 더욱 운동을 가시화하는 것인 줄 모르고 말야.



해외의 불편함 클라스


LGBT와 진정한 평등


지인 중에 ‘인격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LGBT다. 나는 하루 빨리 LGBT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대로 보장하는 사회가 도래하여, 내가 이 친구를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싫어한다는 소리를 어떤 오해도 받지 않고 떳떳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이 친구를 싫어한다고 말했다가 호모포비아 아니냐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어서 그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짜 호모포비아는 내가 아니라 그 오해를 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 사람이 여태껏 LGBT를 얼마나 “미화하고 신화화했으면” 그런 반응을 보였겠냐는 말이다.

평등이란 그런 것이다. 상대를 혐오하지 않는 것만이 평등이 아니고, 쓸데없이 미화하거나 신화화하지 않는 게 평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퀴어퍼레이드가 아주 유의미했다고 본다. LGBT는 신화화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LGBT는 LGBT이기 이전에 인간이므로, 당연히 성격이 천차만별인 것이며, 경우에 따라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착하고 헤테로들의 비위를 맞추어 적당히 숨어 지내고 민폐 안 끼치는 동성애자”라는 프레임을 조속히 부수어야 한다. 내년에는 퀴어퍼레이드가 더 격렬하게 벌어지길 기대해본다.

출처 http://ppss.kr/archives/5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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