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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30대의, 등록금 투쟁의 기억
게시물ID : sisa_1045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연작
추천 : 11
조회수 : 37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5/18 15:18:28
1996년 3월 29일 금요일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중도 앞 민주광장엔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반, 안 쓴 사람들이 반이었다.
월요일부터 단식투쟁을 했기 때문에, 몸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목요일 밤에 단식을 풀라는 연락을 받고 빵 하나를 먹었다가 탈이 났고, 
밤새 설사하다가 토하다가를 반복하다 맞은 아침이었다.

민주광장 집회에서 더 이야기할 것은 없었다.
이미 2월 신입생 OT 때부터 서로 알만한 건 다 알고 있었다.
어느 노래를 개사한 개사곡 한 곡만으로도 충분했다.
"물가인상 5프로, 임금인상 6프로, 등록금인상 16프로 지랄하네~'

각 대학에서 산발적으로,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등록금 투쟁은 진전이 없었고, 결국 각 대학 학생회는 서로 힘을 합쳐야 했다. 96년 1월에 5개 사립대학(고,연,이,한,홍, 가나다순)이 몇년동안 등록금 인상을 담합했다는 기사가 나고부터는 더욱 그런 요구가 커졌다. 초점은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공약이었던 교육재정 5%에 맞춰졌다. 대선공약을 지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육재정 5%를 맞추면, 대학 지원을 통해 살인적인 등록금 인상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모르겠다. 교육재정 5%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면, 그걸 지키든가 아님 각 대학에 압력을 넣어서 등록금을 내려주든가 하겠지...라는 계산이었을까?
난 그냥 2학년일 뿐이었다.

3월 29일 금요일, 등록금 문제로는 처음으로 거리에 나섰다. 서총련(서울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 단위 거리투쟁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젖으며, 후배들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섰다. 서울의 대학생 1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교육재정 확보하라, 대선자금 공개하라 라는 구호를 외쳤다. 한참을 최루탄과 백골단, 전경에게 쫓겼다. 며칠 후 '토끼몰이식 진압'이라는 뉴스가 보도될 만큼 악랄한 진압이었다. 쫓기고 쫓기다가 명동성당으로 갔다. 최종 집결지가 명동성당이었다. 이미 명성엔 많은 학우들이 모여있었다. 

깃발을 중심으로 모여서 어떻게 쫓겼느니, 어디로 숨었느니, 잡힐 뻔 했느니 하는 이야기를 무용담을 자랑하듯 하다가, 갑자기 학교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학우 한 명이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명동성당에서 학우가 응급실에 있다는 병원까지 깃발을 앞세우고 한달음에 달렸다. 

응급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사수대가 꾸려졌다. 십여 명이 서로 팔짱을 끼고 응급실 앞을 막아섰다. 만에 하나 학우가 죽을 경우,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 가버릴 가능성이 컸다. 사인을 감추기 위해 시신을 탈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었다. 어디선가 생겨난 공포심이 우리를 지배했다. 오늘 밤에, 여기서 싸우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침대에 누운 누군가를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급히 침대째 이동시키고 있었다. 환각이었을까. 침대에 누운 사람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에, 학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같이 사수대가 된 동기 하나는, 서러움에 복받친 듯 크게 울부짖었다. 나는, 믿기지 않아서였는지, 뭐였는지 모르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고, 흐느낄 수도 없었다. 그냥, 밤새 내리는 비를 맞으며, 10여미터 앞에 어둠 속에 방패를 가지런히 세운 백골단만 쳐다볼 뿐이었다.

3월 31일 일요일 밤까지 응급실 앞을 지켜야 했다. 금,토,일 사흘 동안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사실 뭘 먹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자판기 커피 몇 잔은 마셨을 지도 모르겠다. 어떤 전경이 율무차를 타다 주기도 했다. 그랬다. 전경은 적이 아니었다. 마치 철천지 원수라도 된 듯 10여미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냥 같은 젊음일 뿐이었다.

일요일 오후 즈음에 대학 총장님이 왔고, 경찰간부와 협상해서 수석이를 세브란스로 옮기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비로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일요일 밤에 수석이를 학교 버스에 싣고, 학교 버스를 타고, 교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학교 앞 큰 길엔 수천, 수만 개의 촛불을 든 사람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고, 한 쪽에선 화난 복학생들이 전경들과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세브란스 영안실에 수석이를 안치하고, 또다시 조를 나누어 영안실을 지킬 계획이 세워지고 나서야, 요기를 하러 나올 수 있었다. 

분식집에서 라면에 공기밥을 먹다가, 이러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동기,후배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으로 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앓다가 했다. 사흘을 앓고 나서야, 몸을 추스릴 수 있었다. 학교에 다시 나갈 수 있었던 4월 4일. 학교에서 장례식이 치뤄졌다. 학교는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나무마다 푸르렀고, 꽃들은 제각각 고유의 색을 자랑했다. 햇빛이 따사롭게 꽃들 위에, 나무 위에, 잔디 위에, 사람들 머리 위에 내리비췄다. 백양로 어느 나무 뒤에 서서 한참을 통곡했다. 수석이의 영정만 바라보며, 몇 시간을 울었다. 진달래, 개나리,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 교정에서, 눈물이 도무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노수석 이라는 한 학우가, 내 동기가 죽었다. 백골단의 곤봉에 맞아서. 사인은 심장마비라고만 발표되었다. 그렇다. 모든 죽음은 결국 심장마비이다. 심장이 멈추는 거니까. 

그리고 등록금은, 9% 인상으로 결정되었던가. 그 해 등록금 인상이 몇 프로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우스운 일일까. 한 사람의 목숨이 나에게, 그리고 다른 수만 명, 수십만명에게 만 몇천원 혹은 몇 만원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가끔, 미칠 듯한 죄책감으로 돌아오곤 한다. 


2000년도에 연평균 230만원이던 국립대 등록금은 2010년엔 연평균 444만원이 되었다. 
2000년도에 연평균 449만원이던 사립대 등록금은 2010년엔 연평균 754만원이 되었다.

지금의 20대에겐 참 미안한 일이다. 우리 시대에 대학 문제를, 등록금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해서.
그리고 이 <미결 문제>는 또다시 우리 자식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에게 참 미안한 일이다. 

다시 한번 대학생이 되어, 96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럼 우린 미래를 바꿀 수 있었을까. 96년의 4월 4일이 눈부시도록 슬픈 날이 아니라,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날로 기억에 남을 수 있었을까. 그냥, 한숨을 쉬며, 수석이를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발버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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