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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3부 - 5.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
게시물ID : history_219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5
조회수 : 75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7/08 21:4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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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버티기
현 충청도와 경상도의 경계는 소백산맥입니다. 이 곳을 안전하게 넘으려면 그 배후에 있는 충주는 무조건 취해야 했죠. 여기에 총대장 야굴이 직접 뛰어듭니다. 그는 이전에 항복했던 성들의 백성들을 총알막이로 내몰면서 충주성을 공격합니다. 이에 놀란 경상도 성주에서 항복한 이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충주성의 방어는 예상 외로 강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병력이 없었는데도 말이죠. 여기에는 김윤후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처인성에서 싸울 때도 그와 함께 했던 것은 천민들이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지나가던 스님으로, 그 역시도 신분이 그리 높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구요. 처인성 전투로 인해 벼락출세한 셈이었죠.

그랬던 그였기에 천민들을 어떻게 통솔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거기다 충주성 자체도 견고했고, 평성이라는 약점은 있었지만 그 덕에 포위 공격에는 더 잘 버틸 수 있었죠. 성 내에 식수가 있었으니까요.

10월부터 12월에 이르기까지, 충주성은 무려 칠십일을 버팁니다. 그 덕에 몽고군은 경상도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죠. 가장 큰 문제는 이 공격을 주도한 이가 총대장 야굴이었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체면만 잔뜩 구기게 된 것이었죠. -_-; 

그러기를 어느새 한 달, 그 동안 정세는 변하고 있었습니다.

11월이 되면서 다시 몽고군을 내보내는 것에 대한 회의가 시작됩니다. 이번에도 태자를 보내야 된다고 했죠. 고종도 질렸는지 "이 말이 어느 주둥이에서 튀어나왔냐"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을 리가요. 거기다 최항까지 이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고종은 잘 얘기해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항은 지가 책임 지기 싫어서 뺍니다. 누구를 보내는 게 좋겠냐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죠.

"이는 신이 결정할 것이 아니오니 오직 주상께서 재량하소서"

지금 실권자라 자기라는 걸 자기가 모를 리가 없는데 말이죠. 고종은 영안백 왕희와 복야 김보정을 파견합니다. 한편 인질로 잡힌 영녕공 왕준에게도 잘 좀 해 달라고 편지를 보내죠. 

야굴도 조급해져 있었습니다. 충주성 하나에 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병이 들었거든요. 점을 치니 "오래 머무르면 돌아가기 어렵다"는 결과가 나왔고,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했습니다. 일단 그는 아모간, 홍복원에게 지휘를 맡긴 후 1천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서 왕희 등을 만나죠. 일단 건네준 선물을 거부한 그는 고종이 직접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고종은 이걸 들어주게 됩니다.

2. 귀환
야굴에게는 이것이 정말 희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고종과 최항은 정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여긴 듯 하구요. 충주가 떨어지고 다시 적이 경상도로 가면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강화도에서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그것도 한계에 봉착했다고 봐야겠죠. 이렇게 고종은 21년만에 육지를 밟게 됩니다.

장소는 강화도 건너편에서 만든 승천관, 야굴은 몽고대 등 10명을 파견했고, 고종에게는 80명의 야별초가 옷 안에 갑옷을 입은 채 호위했습니다. 

"대군이 국경에 들어온 이래로 하루에 죽은 자가 몇천 몇만 명인가. 왕은 어째서 한 몸만 아끼고 만민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가. 왕이 만일 일찍 나와 맞이하였더라면 어찌 죄없는 백성들이 싸움터에서 처참하게 죽는 일이 있었겠는가. 야굴대왕의 말이 곧 황제의 말이요, 나의 말이 곧 야굴대왕의 말이다. 지금부터는 만세토록 화친하여 좋게 지낼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은가"

몽고대는 이제껏 어떤 사신도 이룩하지 못 한 업적을 달성한 것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종도 꽤 안심했을 거구요. 문제는 그가 너무 기뻐서 제대로 된 대화도 못 한 채 술만 퍼마셨다는 거겠죠. (...) 다음 날 고종은 곧바로 강화도로 돌아갑니다. 야굴은 다시 애가 탔죠.

그는 다시 사람을 보내 고려의 항복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요구합니다. 우선 1만의 다루가치를 두고 강화도의 성을 헐라고 했죠. 하지만 고종은 이렇게 거부합니다.

"군사를 머물러 두고 달로화적을 두면 어찌 후환이 없을 것을 보장하리요. 청컨대 그 일을 중지하여 주시고, 성을 허는 일은, 해적이 때없이 노략질하므로 성을 무너뜨릴 수 없으니, 뒷날에 명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뇌물은 많이 바쳤죠. 다 된 밥을 마지막에 망친 꼴, 야굴은 하릴 없이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동안 몽고는 충주를 다시 공격했지만 또 실패합니다. 결국 몽고군은 모든 걸 포기하고 돌아가니 어느새 12월이었죠.

그 동안 충주성에는 식량이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만약 이 때 충주성이 함락되고 적이 경상도에 들이닥쳤다면 전쟁은 또 다른 양상을 맞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굴 자신이 실패했고, 야굴이 돌아간 후에도 충주성이 버티면서 고려에서도 뻥카를 칠 상황이 만들어졌죠.

흥미로운 건 충주성이 버티게 된 이유입니다. 식량이 다 떨어진 것을 알게 된 김윤후는 이렇게 말 합니다.

"만일 힘을 다하여 싸우면 귀천이 없이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그 말을 마친 후 그는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우고 몽고군에게 노획한 소와 말을 평등하게 나눠줍니다. 이게 아주 잘 맞아 떨어져서 성 내의 천민들은 정말 죽기살기로 싸우게 됐죠.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이 이 정도였습니다. -_-;

이렇게 그들은 자기가 살고자 싸웠고, 신분 상승을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종이 강화도를 나올 정도로 호흡기가 떨어져 가던 조정에 다시 호흡기를 씌워준 격이 되었죠. 

몽고군이 물러난 후, 김윤후는 상장군으로 승진되고 기타 군공이 있는 사람들은 노비든 백정이든 가리지 않고 관직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의 항쟁은 보상 받게 되었죠.

이후 김윤후는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떠납니다. 동북면이 함락된 지 오래니 부임하지는 않았지만요. 하지만 그가 떠난 이후에도 충주의 항쟁은 계속됩니다.

3. 눈 가리고 아웅 하기
몽고군이 물러나긴 했지만 북계에서 계속 머물러 있자 대신들은 안경공 왕창을 보내자고 건의합니다. 어느 정도 여유는 생겼지만 그 뿐이었던 것이죠. 고종은 끝까지 반대하다가 참지정사 최인의 말을 듣고 결국 허락합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정은 귀천이 없이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별(死別)한 자도 있는데, 전하는 어째서 한 아들을 아끼십니까? 지금 백성들이 남아 있는 자가 열에 두셋밖에 안됩니다. 몽고 군사가 돌아가지 않으면 백성들은 농사철을 놓치어 모두 저쪽 편에 투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강화(江華) 하나를 지킨다 하더라도 어찌 나라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참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겠죠.

이 때 왕창을 보내며 몽고의 여러 장수들에게 금은과 포백을 열심히 줬는데 창고가 다 비어 백관들에게 걷어야 될 정도였습니다. 이제 백성과 관리들에게 나누어주는 건 둘째 치고 몽고군에게 바칠 것도 다 떨어진 것이죠. 

이렇게 겨우 겨우 몽고군을 돌려보냈습니다만, 이걸로도 끝은 나지 않았습니다. 몽케는 고려를 대충 봐 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죠. 거기다 기존에 있던 영녕공 왕준이 고종의 아들이 아닌 게 들통나 버렸구요. 이 얘기가 또 골 때립니다.

민칭이라는 자가 몽케에게 "왕준은 왕의 친자가 아닙니다"고 일러바쳤고, 이에 왕준을 불러 따지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이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자라나 왕을 아버지라 하고 왕후를 어머니라 하였으므로 친아들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온 사신 최인은 실상 전날 나를 인솔해 와서 인질로 맡긴 자이오니, 물어보십시오"

이에 최린을 부르자 그는 "준은 왕의 애자(愛子)이지 친자(親子)가 아닙니다"고 대답했구요. 둘이 다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애자라는 것은 남의 아들을 길러서 자기 아들로 삼는 것입니다. 만일 소생자일 것 같으면 어찌 다시 ‘애(愛)’라고 일컫겠습니까? 먼저 올린 표문(表文)을 징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차암 황당했겠습니다만 몽케는 이를 불문에 붙입니다. 이미 충분히 친몽고화 된 왕준을 포기하긴 아까웠겠죠. 대신 그는 전군에 복귀 명령을 내립니다. 이 때가 1254년 1월, 이렇게 5차 침공은 완전히 끝나죠.

큰 공을 세운 -_- 이현은 자신만만하게 강화도로 돌아옵니다. 자기 뒤에 몽고가 있으니 쉽게 죽이지 못 할 거라 여겼겠죠. 하지만 최항은 그를 죽이고 아들들을 바다에 던진 후 몽고에 항복한 장수들을 귀양 보냅니다. 이 때 사람들은 그의 입을 차며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 치웠느냐?"고 하며 욕 했따고 하죠. 강화도에 들어올 때 은비녀만 한 상자에 가득 했고, 다른 물건들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일단 몽고군은 이렇게 물러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야굴의 사정이 큰 역할을 했고, 몽케는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었죠. 아니,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낼 생각을 가졌을 겁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이제껏 하지 않았던 시도를 하게 되죠.

1254년 2월, 몽고의 병선 7척이 갈도(미상?)를 공격해 그 곳에 피난해 있던 백성 30호를 붙잡아 갑니다. 마침내 몽고군이 해군을 동원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몽케는 자랄타이(차라대)를 총대장으로 여속독(에수투), 보파대(보라타이)를 파견합니다. 기존의 아모간, 오야이 등은 물러났죠.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어떻게든 고려를 항복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pgr21 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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