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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뭐예요? #2
게시물ID : humorstory_4386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리조각
추천 : 3
조회수 : 54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7/10 16: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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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사실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내가 1학년때 여자애들에게 장난만 쳐대는 상 또라이가 아니었나 오해를 하겠지만, 나름 대학교 1학년때 나에게도 연애의 징조가 아예 없었던건 아니었다. 


나름 썸을 타던 여자애도 있었고, 호감이 있던 동기도 있었으며, 왠지 나에게만 잘해주는 듯한 선배누나도 있었다. 그러나 태생이 모태솔로인 나는 그 모든 기회를 걷어차 버리고 동기 여자애들과의 전우애를 택했다.


썸을 타던 여자애의 생일 날 폭탄주를 만들던 동기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그녀의 잔에 신고 있던 양말을 집어넣었고, 호감이 있던 동기의 옆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그녀의 가방안에 그날의 안주를 약간 소화시켜 담아주기도 했으며, 나에게 잘해주던 선배누나가 나에게 사준 시집은 자취방에서 라면냄비의 받침으로 잘 사용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상또라이가 맞는 것 같다. ;;


그랬다. 나는 남녀관계에는 영 젬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때려죽인 잡놈이었지만, 그렇게 연애의 기회들을 모조리 걷어차면서도 나는 여자친구가 생기길 아주 조금 바랬던 것 같았다.



신입생환영회때 보았던 그애의 이름은 H라고 했다. 성은 평범했지만, 이름은 특이했다. 신입생주제에 성격도 좋아서 처음부터 나에게 선배가 아니라 오빠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녀는 활달했고, 빛나보였다. 


신입생 환영회가 끝나고, 술자리를 가지고, 몇명이 화장실을 사용불능으로 만들고, 단골 호프집 사장님의 쌍욕을 몇번 듣고, 놀라는 신입생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범하게 웃던 과대표가 머리채를 잡고 끌려나갔다.


즐겁고, 당황스러웠던 술자리가 끝나고 나는 술에 얼큰히 취한채로 자취방에 누웠지만, 도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내옆에서 할리데이비슨의 엔진소리를 코로 내고있는 친구 때문도 아니었고, 17세기 마녀의 항아리에서 날법한 약초냄새를 발에서 풍겨대는 친구 때문도 아니었다. 


가끔 잠꼬대로 멘드레이크의 비명소리를 내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런건 매일같이 격던 일이라 내 숙면을 방해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그녀의 뒷목덜미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후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을때까지 나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법이라지만, 그정도 시간으로 멀어지기엔 내 상사병이 조금 심각했던 듯 싶다.


삐삐번호라도 받아놓을걸... 하는 후회를 하고있던 중 드디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청량리에서 모이기로 했었다. 


나는 1년 365일 24시간 등댈곳만 너무 차지 않다면 어디서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잠꾸러기였고, 심지어 고등학교때 1교시부터 자기 시작해서 야자시간에 깬적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앉은채로 책보면서 잤다.(최고급 스킬 보유)


그러나 그날은 아침부터 정렬맨같은 칼기상을 했고, 새벽 6시부터 일어나서 씻고 옷을 입고 오티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친놈아 청량리에서 12시에 보기로 했어. 도대체 왜 새벽부터 지랄이냐."

"친구야 난 지금 어머니 뱃속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포근해 제발 내 태동을 방해하지 말아줄래?"

"아오 미친놈아!! 새벽부터 왜 샤워를 하고 이지랄이야. 너때문에 나이아가라에서 떨어지는 꿈 꿨잖아."

"아 제발 내가 돈줄께 목욕탕으로 좀 꺼져주라."


새벽 6시부터 좁디좁은 옥탑방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있는 날 보면서 왜인지 모르게 자취방에서 자고있던 친구들은 정감가는 쌍욕들을 시전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기분좋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친구들은 이미 나를 정신병원으로 보내기로 정하고 누가 팔과 다리를 잡을 것인지를 의논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정신병원 대신 청량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그때까지도 내 다리를 붙잡을 사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학번 과대표가 둘둘말은 학과 깃발을 어깨에 걸치고 하품을 하고 있었고, 오로지 술로만 이루어진 오티 준비물들을 학생회장 누나가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H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짧은 머리에 검정티를 입고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느새 친해졌는지 환영회때 교복을 입고 왔던 K가 있었다. 안면이 있어서 인지 둘은 날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행복했다. 왜 행복한지 이유도 몰랐다. 참고로 말하자면 대마초는 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강촌까지 가는 길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를 보는 순간 느낀 행복감 때문에 나는 그냥 게속 그녀를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어차피 우리는 기차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거나 하진 않는다. 거의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우리들은 대부분이 잠에 골아떨어져 있거나, 자고있지 않는 아이들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과대표는 오티때 먹을 술을 다처먹는다면서 쌍욕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다지 낭만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지만, 그 기차여행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강촌에 도착해서 우리는 민박집까지 걸어갔고, 집을 풀고,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다. 선배들이 소개를 하고, 후배들이 소개를 하고, 학생화징 누나가 준비한 더럽게 재미없는 몇가지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과대표가 준비한 더럽지만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나자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풍습이겠지만 그때는 사발식이라는 게 있었다. 나또한 신입생때 별거 아니네 하고 레몬소주 한사발을 들이키고는 민박집 옥상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숙면을 취했던 기억이 있다.(다행히 입은 안돌아갔다.)


신입생들을 위해서 선배들은 소주와사이다와 레몬소주 가루를 다라이에 열심히 섞고 있었고, 신입생들은 이 비현실적이고 야만적인 레몬소주 다라이를 보면서 군침을.... 아니 근심을 하고 있었다. 


"00대학교 00학과 98학번!! 000입니다!!!"


오티에 참가한 신입생들이 한명씩 나와서 큰 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 레몬소주를 한사발씩 들이켰다. 물론 술을 못마시는 학생들을 위해서 가끔 선배들이 대신 마셔주기도 했다. 아, 물론 여학우들 대상이었다. 남자애들은 저 시커먼 남자선배들이 자기 흑기사를 해주지 않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죽을 각오를 하고 레몬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어느새 K의 차례가 왔다. H는 그 뒤에 있었다. K가 꽤 이목을 끌었던지 남자선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서있는 H를 정신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소리조각 선배님이 마셔주시면..."


뭐지? 내이름이 들린 것 같은데?


그 아이를 쳐다보느라 잠시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흑기사를 해주기 위해 우르르 몰려들었던 남자선배들중 K가 날 지목한 것이었다. 난 뭔가 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갸우둥한 뒤 흑기사를 거절하고 K에게 레몬소주를 두사발을 먹이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난 안..."


그리고 그때 나는 무협지에 나오는 그 현상을 피부로 느껴야했다. 수십명의 동기들이 살기를 내뿜으면서 나를쳐다보고 있었다. 나같은 오징어가 감히 저렇게 풋풋한 신입생의 부탁을 어찌 거절한다는 케이스는 이 신성한 신입생 오티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확율로 수렴하고 있었다. 아 이과 망했으면. 하여간 그게아니고...


"아니.. 내가... 그게..."


난 당황했다. 


H가 흑기사를 부른다. -> 내가 손을 들고 나간다. -> 한번에 원샷을 하고 그녀의 간을 지킨다. -> 훗 목이 말랐는데 잘됬군. 꼬마아가씨. -> 뭐 대충 이런 스토리?


그런데 내 시나리오가 송두리채 무너지고 있었다. 매일같이 술독에 빠져 살았지만 그다지 쎄다고 보기힘든 내 주량을 볼때 레몬소주 한사발이면 이미 나는 경희대 학사파전집에서 파는 사이즈의 해물파전을 하나정도는 연성해야 될 것이 분명했다.

그 한번의 기회를 여기다 쓰라고? 왜죠? 흑기사는 거절하면 두배로 마시는거 아닌가요? 도대체 왜 내가 이걸 마셔야 하는거죠?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들어간다. 죽죽죽죽~~"


그러나 나는 그 살기를 이겨내고 내 의지를관철시키기엔 너무 약했다. 

힘이 약했다.

LAPD가 투팍을 연행하듯 나는 질질 끌려나가서 결국 레몬소주를 원샷했고, 멘탈이 붕괴된 채로 곧 다가올 욕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H의 차례가 되었다.


"00대학교 00학과 98학번!! H!!! 인사드립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씩씩했고, 당당했다. 여자임에도 우렁차게 자기소개를 하고 그대로 과대가 주는 사발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술을 처음 마셔본 건지, 아닌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선배들의 환호성 속에서 레몬소주 한사발을 원샷하고 머리에 터는 그녀의 모습에선 빛이 났다.


그녀의 짧은 머리는 기분좋다는 듯이 웃고있는 그녀의 얼굴을 따라서 찰랑거렸고, 또다시 내 눈에 들어온 그녀의 귓바퀴는 나에게 그녀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즐거웠다. 

젊은 날 무엇이던 즐겁지 않으랴만 그때의 나는 즐거웠고, 


그녀는 아름다웠다.










아 옛날일 써보려니 엄청 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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