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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후 20만명 倭로 건너가 '리틀 백제'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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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cckk
추천 : 1
조회수 : 187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5/07/11 07: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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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에 일본인들이 세운 고대도시관련 역사유물이없는 상황에서
일본내에 백제인들이 세운 고대도시관련 역사유물이 넘치는 상황은 재밌네요...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50707033605835

백제 멸망 후 20만명 倭로 건너가 '리틀 백제'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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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상공에서 촬영한 백제사적공원 전경. 1932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발굴조사 끝에 가로세로 140m 넓이의 백제사 터 일대가 베일을 벗었다. 일본 문부성은 1952년 이곳을 고대 한일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중요 유적으로 인정해 특별사적으로 지정했다. 히라가타 시 제공
히라가타 시 백제사적공원 전경. 히라가타 시 제공
백제사와 나란히 붙어 있는 백제왕신사 전경.

.....○ 일본 속 ‘리틀 백제’

33년간 이곳에서 발굴 담당으로 일해 온 시 교육위원회 사무국 문화재과 매장문화재 담당 오다케 히로유키(大竹弘之) 선생은 “1932년 발굴 조사를 시작한 이후 1962년에 이어 2005년까지 3차 조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땅인 줄 알았던 이곳이 고고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 건 1932년. 오사카 부 사적명승기념물보존조사회가 소규모 발굴을 시범 실시한 뒤 이곳에 유적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자 1940년대 정식 발굴이 시작됐다. 결과는 놀라웠다. 비교적 정확한 형태로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가 나온 것이었다. 오다케 선생은 “‘백제사’에 대한 기록은 1679년 ‘하내감명소기(河內鑑名所記)’에서 처음 발견된다. 책에는 ‘백제왕의 궁’ ‘가람의 옛터’란 표현이 등장한다”며 “절을 지은 사람들이 백제인이었다는 사실에 일본 사회가 술렁였다”고 했다.

게다가 백제사가 끝이 아니었다. 발굴이 지속되면서 백제 왕조를 모시는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 터와 도로 주거 흔적까지 발견됐다. 더 놀라운 건 백제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은 도로, 북쪽의 집터와 우물, 기와 굽는 터 등이 가지런히 배열됐다는 점에서 계획도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히라가타는 한마디로 ‘리틀 백제’였던 것이다. 2차 발굴조사가 끝날 즈음인 1952년 일본 문부성은 이 일대를 특별사적으로 지정했다.

백제사의 구조를 알려주는 비석.
오다케 선생은 “추가 발굴 과정에서 도시 규모가 훨씬 크고 도시가 존속했던 기간도 훨씬 더 길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며 “당시 문부성은 이곳을 고대 한일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중요 유적으로 인정해 특별사적으로 지정했다”고 소개했다.

바람이 거세져 오다케 선생이 사무실로 쓴다는 허름한 창고로 옮겼다. 창고에 들어서니 플라스틱 정리함 수백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정리함엔 지난 10년간 이어진 3차 발굴 작업에서 나온 유물들이 비닐 팩에 담겨 가지런히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8세기의 토기, 석탑, 기와지붕 등의 조각 더미를 보고 있자니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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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유민 이끈 경복왕

그가 언급한 ‘백제왕’씨란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백제왕(구다라노코니키시)’씨란 바로 이 히라가타에 백제신도시를 만들었던 주인공들이었다.

백제사 터 왼쪽에 자리한 ‘백제왕신사’가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것을 전하고 있었다. 백제왕신사는 백제 마지막 왕 의자(義慈)왕의 아들인 선광(善光)왕과 우두천왕(牛頭天王·신라계 신)을 함께 모시는 신사이다. 옛날 모습으로 복원된 신사 안으로 들어가니 신사를 소개하는 비석이 나왔다. 비문에는 일본 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백제 선광왕은 조국이 멸망했을 때 일본에 망명해 왔다. …‘백제왕’이라는 성을 하사 받아 오사카 시 난바에 거주했다. 선광왕의 증손인 경복(敬福)왕은 동대사(東大寺) 대불 주조에 금을 헌상해 하내수에 임명됐다. 경복은 일족 결합의 상징이자 일족의 명복을 위한 백제사, 씨족 신사인 백제왕신사를 축조해 일족 다 같이 이 땅에 자리 잡고 산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663년 백강전투에 대규모 왜군을 보냈던 덴지(天智)왕이 왜로 건너온 선광왕 일족을 이듬해인 664년에 나니와(옛 오사카를 일컫는 이름)에 살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나라 시대인 8세기경 히라가타 시로 옮겨오는데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도지사 자격으로 지역을 다스리며 도시를 이루고 살게 된 것이다.

아무리 왜가 살 곳을 마련해 준다 해도 거기서 일족을 이루고 후대까지 번성해 나간다는 것은 독자적인 노력 없이는 힘든 법. ‘백제왕’ 씨족들이 히라가타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선광왕의 4대손(孫)인 ‘경복왕’의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5070703360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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