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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뭐예요? #6
게시물ID : humorstory_4387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리조각
추천 : 0
조회수 : 46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7/13 18: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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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그녀는 마치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나를 안은 순간부터 꼼짝도 할 수 없었고, 그대로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면서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지하철이 흔들리고,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지하철 벽에 기댄채로 술에 취한 여자를 안고 있는다는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 사랑의 감정으로 힘든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H를 좋아하는건 좋아하는 거고, 힘든건 힘든거였다. 나는 낑낑대면서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안고 있었다.


그녀의 집은 상당히 외곽지역이었고, 사람들이 점점 내려서 지하철은 조금씩 비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그때까지 걱정하지 않고 있던 문제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녀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다시 갈 수 있을까? 지하철 무단 탑승했는데, 걸리는거 아닐까? 


만약 돌아가는 지하철이 없으면, 어쩌지?


술먹고 길거리에서 잠을 참 잘자던 W의 말에 따르면 신문지가 그렇게 따뜻하다던데... 노숙이라고 해야하나?

만약 H가 집에서 재워준다고 하면..... 갑자기 이렇게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야 하나? 

부모님이 가족계획을 물으시면 어떻게 하지? 난 딸이 좋으니 딸 한명만 낳아서 잘 기르겠다고 할까?

아니 그것보다 H 아버님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결혼은 안된다고 하시면 어쩌지?

집에 들어가기 전에 흙을 좀 챙겨서......


머릿속에서 온갖 말도 안되는 잡생각이 바운스바운스 하고 있을 무렵, H가 자기집이라고 했던 지하철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황급히 나에게 안겨있던 H를 깨웠다.


"야 H야. 일어나봐. 다왔어!"

"어? 어! 선배님... 어? 여기 00역이예요?"

"그래 일어나봐 우리 내려야해."


우리는 몇명의 사람들과 함께 열린 지하철문으로 빠져나왔고, 나는 약간 비틀거리는 H를 부축하면서 지하철역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머리속으로 아직 뭘 해야할지 정해지지도 못했지만, 나는 그때 한가지 다짐을 하고 있었다. 지하철안에서 H를 안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했던 생각이었다.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나는 오늘이 가기전에 H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할 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하철역 개찰구까지 다다랐다. H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에게 말했다.


"저 선배님... 개찰구 나오지 마세요. 아직 막차 있을거예요. 저때문에 여기까지 오시고... 너무 죄송해요."

"아니야... 그냥 내가 데려다주고 싶었어."


H는 뭔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 아니예요. 그럼... 빨리 들어가세요, 저도 들어갈께요."

"아 저기..."


나는 돌아서려는 H의 손목을 잡았다. 아까전부터 다짐했던 말이었지만, 쉽사리 말할수없던 말이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H는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런데 H의 표정은 마치 울 것 같았다.


"H야.. 저기 내가..."

"아니... 오빠 미안해요, 제발... 말하지 마세요... 아... 어떻게하지... 안되요. 말하지 마세요."

"뭐라고?"


울것같은 H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제발... 미안해요... 말하지 마세요."

"아니 나는..."


나는 울것같은 그애의 표정에 당황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던 걸까? 그건 눈치를 챘다고 치지만... 왜 말하지 말라는 걸까? 도대체 왜? 우리가 느낀 감정은 서로 비슷한 것이 아니었나? 지금 나혼자 그녀를 짝사랑 하고 있었던 것야? 갑자기 내 속안에 있던 무엇인가가 북받쳐 올랐다. 나는 내 손에서 손을 빼려는 H의 손목을 다시 붙잡았다.


"왜 그래. 난 지금 말해야겠어. 나는..."

"아아... 나 어떻게 해... 안되요... 제발... 말하지 마세요."


H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지고야 말았다. 왜 우는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넌 날 가지고 장난친 거였어? 나는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냥 나혼자만의 생각이었다고? 왜? 지하철에서 내 가슴에 안길때 너는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나는 눈으로 백가지 의문을 쏟아내었지만, 입밖으로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H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손에 잡힌 그녀의 손을 빼내었고, 도망치듯이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허탈했다.


계단을 내려오자, 막차가 내 눈앞을 휘잉 하고 스쳐지나갔다. 망했다라는 생각보다 허탈함과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다시 올라가 개찰구를 뛰어넘었다. H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나는 3시간을 걸어서 학교앞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밤거리는 쌀쌀했고, 어두웠으며, 자정이 지난 시간의 서울거리는 한산하고 쓸쓸했다. 자취방 가까이 오자, 불이 꺼진 옥탑방이 보였다. 내가 없어서인지, 친구들은 자취방에 입성하지 못했고, 불이 꺼진 창은 내 마음처럼 쓸쓸해 보였다. 


나는 터덜터덜 철제 계단을 올랐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조용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나는 슬쪽 소리가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옥탑방의 한쪽 벽에 기대어서 취한채 잠이 든 S가 있었다. S의 발 앞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보였다. 


"아 이 미친놈......"


입으로는 욕을 했지만, 허탈하고 쓸쓸한 마음에 오히려 술취한채 널부러진 친구가 더 반가웠다. 나는 옥탑방의 문을 열고, 친구를 들쳐업고, 이불을 펴고, 친구를 누이고, S가 가져온 비닐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소주두병과 오징어와 참치캔이 들어있었다. 취해 드러누워있는 친구가 가져온 그 비닐봉지가 무슨 뜻인지 금방 알 것 같았다.


"아.. 또라이 같은 놈... 술산다는게 이거였냐? 고기를 사와야지 이 개놈아."


나직하게 S에게 욕을 지껄인 나는 어두운 방의 천장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S가 K를 대하는 태도와 내가 H를 대하는 태도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S는 마치 포기를 모르는 또라이처럼 K를 쫒아다니기 시작했고, K는 그런 S를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차마 경찰에 신고를 하지 못하였다. 나와 내 동기들은 몇번이고 K를 대신해 S를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K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그 뜻을 이루진 못하였다.


그리고 나와 H는 서로를 피하기 시작했다. 먼저 피하기 시작한 것은 나였다. H는 그 다음날 학교에서 나를 보고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녀를 보고 웃을수가 없었다. 졸렬하고 치사한 복수였다. 동기들과 후배들이 함께 모이는 술자리에서도 나는 H의 근처에 가지 않았고, 항상 자리에서 일찍 일어났다.


H가 보기 싫었다.


사실 그녀는 그날 이후에도 여전히 빛나보였고, 아름다웠다. 나는 배신감과 분노에 휩쓸렸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럼에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스물한살 어린 나이에 내가 조숙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도저히 그 감정에 충실해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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