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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배신자'란 평가를 받았던 시로 부스토스
게시물ID : history_105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10
조회수 : 97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7/11 20:40:28
‘체 게바라의 배신자’ 낙인 부스토스 “내가 동지를 팔다니요?”;

비망록 ‘체는 당신을 보길 원한다’ 통해 심경 밝혀

26세의 젊은 화가였던 시로 부스토스가 체 게바라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때는 1958년 봄 어느 일요일이었다. 라디오 엘 문도의 인터뷰 방송에서 부스토스는 쿠바의 남동쪽 산악지대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싸우고 있는 자신보다 네 살 위인 체 게바라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부스토스는 “겉만 번지르르하거나 뽐내는 태도는 전혀 없었다. 너무나 편하고 조용해서 형제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그게 나를 그토록 감동시켰다”고 회상했다. 

부스토스는 “양심에서 양심으로 말을 거는 듯”한 체 게바라의 목소리에 이끌려 1961년 쿠바로 건너간 후 그의 가장 충실한 동지로 활약했다. 그는 체 게바라를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알제리와 아르헨티나를 거쳐 볼리비아 원정까지 함께했다. 그러나 1966년 11월부터 체 게바라가 최후를 맞은 다음해 10월까지 지속된 볼리비아 원정은 부스토스에게 40여년간 배신자라는 멍에를 안겨준 비극이 됐다.

그는 2007년 비망록인 <체는 당신을 보길 원한다>가 스페인어로 출간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와 동지들을 배신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가 볼리비아군에 붙잡힌 뒤 체 게바라를 포함한 게릴라 동지들의 얼굴을 그려줘 정부군이 이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는 의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1967년 10월15일 쿠바 인민에게 체 게바라의 죽음을 알리고 있다. 카스트로는 쿠바 각료회의 성명에서 “영웅 에르네스토 게바라 대장이 볼리비아 해방군의 지휘자로서 아메리카 인민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가 전사했다”고 밝혔다. 쿠바는 체 게바라를 비롯한 게릴라 부대원이 죽거나 체포된 10월8일을 국경일인 ‘게릴라 영웅의 날’로 정했다. | 실천문학사 제공

최근 출간된 그의 책의 영문판 서문은 아르헨티나의 대문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 “우리는 우주가 실제 세계에 속해 있는지 환상에 속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를 인용하며 시작한다. 체 게바라에 대한 수많은 문헌들에 나오는 서로 상충되는 주장들 가운데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꾸며낸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부스토스는 “모든 일이 일어났다. 모든 실수와 마찬가지로 모든 좋은 일들도 거의 상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적었다.

부스토스는 자신의 책을 체 게바라를 팔아넘겼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시도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배신자라는 주장을 “아르헨티나의 작가인 토마스 엘로이 마르티네스가 말한 ‘영웅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배신자가 있다’는 말처럼 언론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부스토스는 만약 자신을 만나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길 원하는 기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진실을 말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미국 기자인 존 리 앤더슨이 1995년 스웨덴 남부의 항구도시 말뫼에서 그를 찾아내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답변을 구하지 않았다. 

부스토스는 1961년 쿠바에 들어와 아바나 대학에서 미술감상 수업을 담당했다. 1962년 그는 체 게바라의 친구로 1952년 체 게바라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여행한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만나게 된다. 부스토스는 그라나도의 소개로 그해 7월 아바나의 산업부 장관 사무실에서 환상이 제거된 체 게바라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사람이었다. 그를 만났을 때 거만함은 전혀 없는 완전히 균형잡힌 사람이었다. 적절한 때에 사람을 웃길 줄도 알았다”고 부스토스는 회상했다.

체 게바라는 당시 자신의 혁명 이론을 실행에 옮길 믿을 만한 사람들을 찾던 중이었다. 부스토스를 눈여겨본 체 게바라는 그를 모국인 아르헨티나에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자신의 장기적 목표에 동참시킨다. 체 게바라는 불평등이 만연한 나라에서는 작은 규모의 게릴라 전사들도 억압받는 사람들을 혁명에 합류시키면서 정규 군대를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아르헨티나 원정대는 쿠바와 알제리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게릴라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북부로 들어갔다.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5년 전 체 게바라를 인터뷰한 뒤 기자에서 게릴라 전사로 변신한 호르헤 리카르도 마세티였다. 아르헨티나 원정은 깊은 정글을 헤쳐나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성과없는 행진이 계속되면서 마세티는 점점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해 부대원 중 부상을 입어 뒤처지는 자를 처형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부스토스도 이런 명령을 받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뒤처진 푸피라는 이름의 부대원을 죽여야 했다. 부스토스는 자신이나 마세티가 단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생명이 걸린 위험한 싸움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은 사기가 꺾이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푸피가 “우리 중 누구도 이 게릴라 작전을 살아서 끝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해 부대원의 사기를 꺾은 것이 처형의 빌미였다는 뜻이다.

부스토스가 아르헨티나를 빠져나온 3년 뒤 체 게바라는 그에게 볼리비아에 있는 자신의 게릴라 부대에 합류할 것을 요청한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가 남미 대륙 혁명의 뇌관이 되길 원했다. 그는 1966년 11월4일 혁명가 53명과 함께 볼리비아 낭카우아수에 도착했다. 볼리비아 군대는 곧 이들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부스토스는 4월19일 후원조직을 결성하라는 체 게바라의 지시를 받고 귀국하려는 프랑스의 철학자 레지 드브레와 함께 부대를 떠난다. 체 게바라는 떠나는 부스토스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인조 양가죽 재킷을 선물로 주면서 “만약 네가 붙잡힌다면 이곳에 있는 쿠바인들의 존재와 나의 존재를 당분간 감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당부한다. 체 게바라는 이어 “그러나 만약, 그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을 이용해 가능한 한 많은 혼선을 만들라”고 덧붙였다. 

체 게바라와 작별인사를 한 지 하루 만에 부스토스와 드브레 일행은 무유팜파에서 붙잡히고 만다. 부스토스는 볼리비아군이 조사할 때 체 게바라가 밝힌 원칙을 지켰다. 부스토스는 자신을 정치범들의 인권을 다루는 기사를 쓰는 카를로스 알베르토 프루토스라는 아마추어 기자라고 밝혔다. 또 정치범을 주제로 한 회의에 가는 중 게릴라 부대와 마주쳤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진짜 신원이 지문 분석으로 드러날 때까지 3주 동안 버텼다. 

그러나 미 중앙정보국(CIA)과 볼리비아 군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이 명확해지자 부스토스는 전략을 바꾼다. 그는 게릴라 부대원의 몽타주와 게릴라 부대의 근거지를 표시한 지도를 그려달라는 볼리비아군의 요구에 응했다. 부스토스는 “이미 그들은 체의 사진과 부대에 속한 모든 이들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며 “게릴라 부대원이 어쨌든 죽었다면 그들의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아르헨티나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은 보호받아야 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부대원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승리를 선사했다”며 “내가 한 것은 모두 수염을 가진 사람들을 그린 것뿐”이라고 말했다. 

드브레는 부스토스를 배신자로 묘사했다. 드브레는 “체는 그(부스토스)를 첫인상 그대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었고, 그는 체에게 그런 신임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위선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부스토스가 “정부군을 게릴라 야영지까지 데리고 갔고, 동굴을 가르쳐주었다. 솜씨 좋은 초상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게릴라 부대원들의 얼굴을 그렸다”고 전했다. 부스토스는 이후 드브레의 주장을 받아들인 체 게바라의 전기 작가인 피에르 칼퐁에 의해 배신자로 묘사됐다. 그러나 장 코르미에가 쓴 <체 게바라 평전>에 따르면 동굴로 정부군을 안내한 이들은 정부군에 붙잡힌 게릴라 부대원 에우세비오와 칭골로였다.

그림을 그려준 뒤 46년이 지난 지금도 배신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니고 있지만 부스토스는 여전히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물론 사람들이 그 그림에 대해 말하는 것에 화가 난다”며 “그들은 실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지도 않고 조각과 파편만을 줍고 있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의 전기 작가인 존 리 앤더슨은 부스토스가 20일 동안 자신의 정체를 숨겼기 때문에 처음으로 체 게바라의 존재를 CIA에 알린 사람은 레지 드브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처지는 완전히 반대였다. 드브레는 영웅으로 칭송받았지만 부스토스는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체포 몇 달 뒤 부스토스와 드브레는 볼리비아 군사법원에서 3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부스토스는 그날 체 게바라의 처형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게바라를 죽인 총알이 나에게도 박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며 “지도자와 형제, 그리고 친구를 한꺼번에 잃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체 게바라는 1967년 10월8일 체포 하루 뒤 볼리비아 차코의 허름한 시골 학교에서 처형됐다. 

지하의 군수용소에 3년간 수감된 부스토스와 드브레는 볼리비아에 들어선 좌파 군사정부의 특사로 1970년 1월24일 풀려났다. 사회주의 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가 집권한 칠레에 잠시 머물다가 고국인 아르헨티나에 돌아왔지만 1976년 스웨덴으로 도피해야 했다. 반체제 인사들을 숙청하기 시작한 우파 암살단의 처형 명단에 자신이 올라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줄곧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부스토스는 체 게바라가 사살된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전설이 체 게바라의 진짜 모습을 집어삼켜 버렸다고 전했다. 그는 체 게바라의 사진이 티셔츠에 찍혀 나오는 걸 보며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부스토스는 진짜 혁명가라면 우상이 사상을 제거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플로리다 거리를 마지막으로 걸었을 때, 나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체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체 게바라의 사진이 박힌 옷을 입고 있는 한 청년에게 다가가 “체의 그림이 있는 옷을 입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 청년이 답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부스토스는 “체가 단순히 이미지가 됐다”며 “만약 체가 그의 얼굴이 티셔츠에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가 실패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우상을 파괴하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올해 81세가 된 부스토스는 수감과 도피 생활로 점철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죽은 사람들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며 “나는 살아남아 가족들이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다시 한번 삶을 살 수 있다면,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102121565&code=970201

시저를 배신한 심복 부루투스와 이름이 비슷하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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