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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항쟁 4부 끝과 시작 - 1. 최씨 정권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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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Lemonade
추천 : 6
조회수 : 96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7/19 09: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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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기할 건 참 많은데 그냥 쑥쑥 지나가겠습니다. 삼국지 마지막이 언제나 간단히 서술되는 이유를 알겠네요 -_- 그건 재미없어서지만 이건 못 볼 꼴들이 너무 계속 나와서...

"항이 정권을 잡은 8년 동안 잔학함이 더욱 심하여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살해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죽은 후의 뒷일을 그의 일당인 선인열ㆍ유능 등에게 부탁하였는데, 인열 등이 비밀에 붙이고 발상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의 문객 대장군 최영ㆍ채정 등에게 알리고, 여러 별초ㆍ도방 군사를 모아 옹위한 뒤에야 발상하였다. 왕은 곧 의를 차장군으로 삼으니, 백관들이 모두 그의 집에 가서 조문하고 치하하였다."

1. 적은 오고야 말았는데
1257년 윤 4월, 최항이 죽으면서 그 아들 최의가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전권을 쥡니다. 그 역시 아버지 최항처럼 기생 첩에게서 난 자식이었고, 때문에 문서에서 '창기"니 "노예"니 하는 말이 나오면 쓰지 못 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니 그에게 아부하려는 이들은 참 편했습니다. "누가 너를 미천하다고 하더라"고 하면 끝이었죠. 최항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숙청에 매진합니다. 문제는, 그나마 권력 기반이 있었던 최항에 비해 최의는 그것조차도 없었다는 것이죠.

그나마 처음에는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진휼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최충헌, 최우, 최항 모두 했던 것이죠.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일 뿐.

몽고군은 곧 들어옵니다. 4월에 이미 동진군이 들어왔고, 5월에 차라대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옵니다. 이에 이전에 성과를 올린 김수강을 다시 몽고에 보내죠.

1254년부터 계속된 침공이긴 하지만 일단 김수강의 활약으로 화친을 맺었다가 다시 쳐들어온 것이기에, 이 침공을 7차로 정의하겠습니다. 최항이 몽고와의 연락을 끊어 버렸다는 확실한 명분이 있는 상황, 하지만 그 최항이 죽었으니 이제 그 아들이 아비가 싼 똥을 치워야 했습니다.

쏜살같이 남진한 몽고군은 6월에 남경(서울)에 이릅니다. 급히 장작감 이응을 보내 군사를 물려달라고 하니 선봉 보파대는 차라대에게 말하라고 했죠. 시어사 김식을 안주의 차라대에게까지 보내니 이렇게 말 합니다.

"만일 왕이 친히 나오면 내가 군사를 돌릴 것이고, 또 왕자를 시켜 들어와 조회하면 길이 후환이 없을 것이다."

고려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는 동안에도 공격은 계속됐습니다. 이번의 특징이라면 육전보다는 해전에 더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육지에서 털래야 털 것도 없었고 -_-; 특히 그 동안 손을 안 댔던 후방의 섬들을 공격했죠. 특히 그 곳은 삼별초 등이 활동하며 몽고군의 뒤를 쳤기에 손을 써야 했던 곳이었습니다. 몽고군은 맹주(평남 맹산) 바깥 바다에 있는 신위도를 공격해 맹주수(守) 호수를 죽입니다. 이 때 아내 유씨가 적에게 치욕을 당할 것을 피해 물에 빠져 죽었다는 후일담이 남아 있죠.

9월에는 황해도 옹진반도 쪽 창린도를 공격합니다. 이 때 옹진 현령 이수송은 별초를 거느리고 물리쳤죠. 

차라대는 더 이상 무리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섬을 공략하지 못 하면 육지를 아무리 쳐 봐야 소용이 없고, 이렇게 흔들기만 해도 된다는 것을 아마 알았을 겁니다. 또한 그는 최대한 살상을 금했고, 심지어 약탈까지도 금지합니다. 어마어마한 변화죠.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화친 교섭은 또 -_-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2. 젊은 군주는 무엇을 하는가
이 때 재추 대신들은 왕자를 몽고에 보내자고 계속 청합니다. 왕이 듣지 않자 최자와 개코 아니 김보정 등이 계속 청했고, 결국 허락하게 됐죠. 재추 대신들은 다시 "일단 종친을 보낸 다음에 상황을 봐서 보내자"고 합니다. 이에 영안공 왕희가 뽑혀 갑니다. 그는 은병 1백 개와 술과 과일 등을 주었죠.

"대인께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소환하고 또 화곡(禾穀)을 침노하고 밟는 것을 금지하였으므로, 국왕이 매우 기뻐서 신을 보내어 한 잔 술을 올리는 것입니다"

왜 왔냐는 말에 왕희는 이렇게 비위를 맞춰 줍니다. 그러자 차라대는 이렇게 말 했죠.

"태자가 이르는 날에 마땅히 봉주(황해 봉산)로 물러가 주둔하겠다"

이에 다시 회의를 거쳐 "대군이 돌아가면 태자가 친히 조회하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차라대의 허락을 받습니다. 이 때 "안팎이 텅 비어 아무런 계책을 낼 수 없어서 다만 부처와 신령에게 기도만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없다는 건지 더 이상 선물할 돈이 없다는 건지 의미를 알 수 없군요.

문제는 그 때 최의의 행동입니다. 최우, 최항은 왕의 입조 요구를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고, 태자의 친조도 거부했습니다. 5차 침공 때 왕이 한 번 가긴 했고 6차 때도 그러긴 했지만 어쩄든 최항의 허락 아래서였죠. 헌데 최의는 이 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했냐 하니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거룡의 무고에 상장군 조성을 섬에 귀양 보냅니다. 분명 권력 기반은 적었겠습니다만, 분명 이 때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었죠. 그 동안 몽고군은 물러납니다. 차라대는 일단 화친을 받아들여 남쪽까지 진군한 보파대의 병력을 회군시켰고, 김수강은 남송 정벌에 나서는 몽케를 겨우 따라가서 화친을 약속받고 돌아오죠.

이어 10월에는 민칭이 몽고에서 도망 와서 "몽고의 대신들이 금후로 다시 동쪽으로 고려를 치지 않기로 은밀히 의논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는 말을 했죠. 최의는 기뻐했습니다만, 설마 그럴 리가요.

최의는 몰랐던 걸까요? 이대로 가면 최씨 정권은 끝이라는 것을요. 멀쩡히 허수아비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정통성 있는 왕이 있는데, 그가 살아 있을 필요가 없는데 말이죠. 아니면 그냥 무시했던 걸까요? 그도 아니면 그 자신조차도 버티지 못 했던 걸까요? 그아 아예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예요. 논봉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국고가 바닥나자 강화도의 논밭을 재분배 했는데, 이 때 왕실에 논밭 2000결이 들어갑니다. 헌데 최의가 받았던 건 3000결이나 됐었죠.

몽고군이 물러난 후, 그는 숙청에 몰두합니다.

3. 최씨의 세상은 끝났다
1258년 봄, 최의는 대장군 송길유를 귀양 보냅니다. 그는 경상도 수로 방호별감으로 파견돼 토지와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만 열중했습니다. 이에 안찰사 송언상이 탄핵했고, 송길유와 친한 김인준, 김승준이 유경과 유능에게 이를 숨기길 부탁합니다. 자기들이 나중에 좋게 좋게 보고하겠다 한 거였죠.

하지만 최의의 외삼촌 거성원발에게 알려졌고, 그에 의해 최의의 귀에 들어갑니다. 이에 최의는 송길유를 귀양 보낸 후 김인준과 김승준, 유경, 유능 등을 불러 꾸짖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심복으로 알고 의심하지 않았더니, 어찌 제 마음대로 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이 일은 이렇게 끝난 듯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마음은 최의를 떠나고 있었죠. 최의가 믿는 것은 최양백, 외삼촌 거성원발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자기 노비인 이공주에게 관직을 내려주기도 했습니다. 딴에야 측근을 키우겠다는 것이었겠습니다만... 대신 최항의 심복이었던 송길유와 유경, 유능, 김인준 등을 소홀히 대했죠. 문제는... 그렇게 찬밥을 먹게 된 이들 중에 삼별초가 있었다는 것이죠. 어느새 삼별초는 너무나도 거대해져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아닌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는 것 자체가 곧 그의 운명을 말해 주었죠.

1258년 3월, 유경과 김인준은 거사를 시작합니다. 이 때 신의군 도령 낭장 박희실과 지유섭낭장 이연소가 그들을 찾습니다. 신의군은 몽고에 붙잡혔다가 도망쳐 온 이들로 구성한 부대, 몽고 문제에도 관심 없었던 최의에 대한 불만이 더 컸을 겁니다. 그들은 다른 장수들을 불러 말 합니다.

"최의가 간사한 소인을 친하고 가깝게 하여 참소를 믿고 꺼리는 것이 많으니,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우리들 또한 면치 못할 것이다."

거사할 날짜는 4월 초파일 관등회를 벌일 때, 하지만 이 때 중랑장 이주(위에 노비였던 이공주인 듯)가 급히 견룡행수(견룡군은 왕의 친위대입니다) 최문본 등에게 알렸고, 최양백 역시 김인준의 아들 김대재(그의 장인입니다)의 말을 듣고 따르는 척 하다가 최의에게 알려 옵니다. 하지만... 최의가 급히 유능을 불러 의논하지만 이름답지 않게 유능은 "지금은 밤이니 내일 합시다"라고 해 버립니다.

이 일을 하필 옆에 있던 김대재의 처가 듣게 되고, 김대재는 김인준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 날로 곧바로 거사가 시작되죠.

김인준이 이끌고 간 병력은 신의군, 얼마 가지 않아 각자가 병력을 이끌고 오니 모든 삼별초가 모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죠.

"영공이 이미 죽었다!"

그들은 추밀사 최온과 상장군 박성재 등을 불러 명분을 확보하고, 최양백을 불러 "횃불로 입을 지지고 베어 버립니다." = =;;; 이어 야별초를 맡던 이일휴를 최의가 부른다는 핑계로 불러 죽였고, (이 때 죽인 사람이 임연이죠) 곧바로 최의의 저택으로 향합니다. 마침 안개가 끼어 집 벽이 무너질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외삼촌 거성원발은 힘이 장사였고, 그가 칼을 빼들고 작은 문을 막으니 아무도 안에 들어가지 못 했다고 합니다. 힘이 다 한 그가 최의를 업고 담을 넘으려 했으나...

최의가 "살 찌고 둔중하여" 그러지 못 하고 어떻게 천정 위로 올리고 몸으로 문을 막고 있었죠. 이 때 수산이라는 자가 그의 이마를 맞추었고, 결국 그가 달아나자 강 언덕에서 벱니다. 또한 숨어 있던 최의 역시 그 길로 목이 달아나죠.

이렇게 거사는 성공했고, 최씨 정권은 끝이 납니다. 너무나도 허무한 끝이었죠.

그리고, 이 거사에 성공한 김인준은 최씨 정권에 이은 다음 무신 정권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는 이름을 바꾸니, 그가 바로 김준이죠.
출처 pgr21의 눈시 bb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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